인의협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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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협에서 만난 사람들…
  • 김미정
  • 승인 2017.11.0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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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협 30주년 특별기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김미정 반핵팀장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의 물결을 따라 '올바른 민중사회 건설'이란 목표 아래 의료인들은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해 시민단체 건설에 나섰다.

그 해 겨울 더 평등한 사회에서 시민의 건강권이 보편적으로 지켜지길 바라는 사회를 꿈꾸는 의사 187명이 여전도 회관에 모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를 창립했다.

이어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이하 건치),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이하 청한), 노동건강연대가 연달아 창립되면서,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이란 이름으로 함께 의료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연대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의협은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는 창립 정신에 따라 아픈 사람을 보듬는 의사로서 사회적 책임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숙인·쪽방촌 사람들·철탑 위의 농성자·이주노동자·낙도오지 주민·북한 어린이 등 소외계층에 대한 진료는 물론,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의료영리화 정책, 안전규제 완화 등 비인도적 정책에 앞장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본지는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는 인의협의 역사와 활동을 돌아보고 기념하기 위해 기획연재를 시작. 그 첫번째로 인의협 이보라 사무국장 인터뷰를 게재 했다.

두 번째로는 인의협 김미정 반핵팀장의 기고글을 싣는다. 이어 인의협 조수근·이현석·박태훈 회원의 기고글이 순차적으로 게재 될 예정이다.

- 편집자

 

건치신문에서 인의협 30주년 기념 원고를 싣는다고 해서, 건치 선생님들은 인의협 회원들에게 무엇을 궁금해 하시려나 생각하면서 글을 궁리했다. 우선 내 소개를 해야겠다. 나는 2000년도 연말에 의약분업 의사파업이 끝난 시기에 인의협에 가입해서 17년 되었다. 그 해 총회에서 원진녹색병원에서 가정의학과 의사를 뽑는다는 이야기를 들어 지원하였고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취직하였다. 그 후로 병원일과 인의협일을 같이 해나갔고, 2003년 지역위원회를 시작하여 3년간 건치, 건약 선생님들과 구로, 용산, 강동 지역에서 진료 사업을 같이 하였다. 그리고 이후 개인적인 사유로 인의협에서 적극적인 활동은 중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의협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언제나 의사로서의 내가 정치적,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데 늘 도움을 주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나 내 일상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오늘 저녁 병원 당직을 서면서 이 분들 중 몇 분을 하나하나 다시 떠올려 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

1999년, 인의협 회원들이 서울역에서 노숙자 진료를 진행했다. (ⓒ인의협)

임동규
2003년 인의협에 지역보건위원회가 생겼다. 지역에서 의료소외계층들의 진료를 위한 네트워크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구로에 있는 ‘우리네 약국’과 ‘구로건강복지센터’를 모델 삼아 용산, 강동 등으로 확장시키려 하였다. 지역마다 의료소외계층들을 위한 시민단체들은 있었고 그분들은 의료복지사업 외에도 지역을 지키려는 운동도 함께 하고 있어 많이 배웠다. 그 당시 사무국장이셨던 임동규 선생님은 그 무렵 페미니즘과 채식주의에 대한 신념과 실천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 달에  여러 번의 회의가 있었는데 도시락을 싸오셨고, 되도록 진정성 있는 음식만 섭취하려 하셨다. 나는 둘째를 낳고 1년 정도 되던 해라 부기가 안 빠져 있었는데 선생님을 옆에서 보면서 건강한 음식을 먹는 방법, 태도 등을 배웠다. 그 후로 나도 하루 세끼를 챙겨 먹을 때 공복감을 느끼며 좀 더 생각을 하고 먹게 되었고 몸을 돌보는 방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운동을 시작하였고 수영을 2년간 하게 되었다.

정이은정
2005년 정이은정 선생님은 사무국장이었다. 페미니스트였던 선생은 여성위원회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하였고 다섯명 정도 모였다. 그때 송파구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하시는 선생님 한분이 참여하셨는데 스포츠 댄스를 20년 정도는 하신 대단한 내공자다. 나도 그때 한참 스포츠 댄스를 배우고 있던 때라 선생님 따라서 댄스 슈즈 들고 파티에 간 적 있다. 다들 너무 실력들이 좋아 2년 정도 배운 나는 딱 한번 춤을 추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여성위원회 모임은 성폭력 피해자 진료 시 매뉴얼 만들기 등을 시도하다가 흐지부지 되었다. 정이은정 선생을 따라서 성매매 여성을 위한 진료소를 꾸리는 모임에도 갔는데 시간을 내서 참석하기 어려워 이후 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 때의 나는 여성성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었고 육아 때문에 모성에만 파묻혀 있었다. 그래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에서 정 선생을 만났는데 둘이 서로를 꼬옥 안았던 기억이 있다. 언젠가 또 만날 수 있기를.

2014년 인의협 송년회 (ⓒ인의협)

김미경
 2009년 1월 용산에서 철거반대투쟁을 하던 분들과 경찰이 대치하는 과정에서 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침 일찍 전해오는 뉴스를 보면서 가슴이 덜컥했다. MB정부는 이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약자들의 정당한 생존권조차도 경찰과 폭력으로 억누르려는 심산인가보다 했다. 인의협 회원들은 용산참사 이후 진상규명 및 경찰청장 사과요구 등을 위한 거리시위에 참가하였다. 김미경 선생님은 용산참사가족대책위를 통해 가족들의 정기 진료의 주치의가 되었다. 1년간 진료를 보신 것으로 안다. 선생님과는 인의협에서 책모임을 2년간 하였는데 많이 배웠다. 인의협 소식지에 선생님이 리뷰한 책과 음악은 다시 찾아보았다. 오르한 파묵의 『눈』을 덕분에 끝까지 읽었다.

백남순
 2009년 5월 쌍용자동차 경영진은 2,500여명의 대량해고를 예고하였고 노동조합은 평택 공장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인의협에서는 의료지원단, 인권위원회 등을 꾸려 농성에 들어간 노동자들을 지원하였다. 지원단 전체를 이끌었던 것은 백남순 선생님이었다. 매일매일 포천과 서울, 평택을 오가는 선생님과 지원단 참여 선생님들을 보고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뉴스를 보니 평택 공장 주변에는 부당해고 반대, 일방적 구조조정 반대를 외치는 시민단체 회원들, 금속노동조합지회원들, 언론사 기자들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2009년 7월 20일 진료에 참가하였다. 그날 공장안으로 들어가 200여분의 노동자들을 만나 진료와 상담을 하였다. 진료가 끝나갈 즈음에 만났던 두려움과 불안에 떨던 노동자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아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박지선
2009년 2월에 다니던 원진녹색병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미국 연수 가는 남편을 따라가는 거였지만 한동안 진료실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진료 공백이 생기지 않고 아름답게 떠나고 싶은 마음에 후임자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때 인의협 총회에서 박지선 선생을 만났고 흔쾌히 원진녹색병원에 취직하겠다는 승낙을 받았다. 내가 다시 진료실로 돌아온 게 2011년 9월이었는데 그 때까지 병원을 잘 지켜주셨다. 이후로 2015년 2월까지 진료를 같이 했는데 환상의 콤비였다. 진격의 박지선 선생님, 우리 언젠가 같이 일합시다.

김정은
2011년 9월부터 다시 새롭게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진료에 다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2012년에는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운영위원이 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마흔에 새로 단체 활동을 하려니 멋쩍었는데 그때 김정은 선생님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같이 일하고 싶다는 의지가 되었다. 선생님의 말에는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이게 하는 힘이 있다. 2015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이후 경기시흥 촛불팀에서 진상규명을 외치며 세월호 유가족들과 지역에서 서명을 받고 강연회를 여는 모습은 페이스북을 통해서 늘 응원한다.

송홍석
2012년 10월 나의 아버지가 하인두암 4기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시작하셨다. 수개월의 항암제 치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육체적 상태, 정신적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3차병원에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었으나 종합병원을 포기하지 못한 아버지는 그 병원 응급실을 여러 번 들락날락 하였다. 어느 날  응급실에서 이틀 밤을 꼬박 금식한 채 검사만 하다 지친 아버지는 그제서야 내가 권하는 병원에 가겠다고 하셨다. 갑자기 상태가 나빠진 상태라 병원을 정하기가 어려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때 내 옆에 집회에 참가하고 있던 분이 송홍석 선생님이었다.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어렵게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고 흔쾌히 주치의가 되어 주셨다. 서둘러 송홍석 선생님이 계시던 서울녹색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아버지를 만났다. 이후로 아버지는 서울녹색병원을 떠나면 죽는 줄 아셨다.

2014년 의료인 시국선언 당시 참가한 인의협 회원 일동 (ⓒ인의협)

백재중
2014년 1월 22일 건강미디어협동조합 창립식이 있었다. 민의련과 연대활동을 하던 서울녹색병원 선생님들이 『차별없는 평등의료』라는 제목의 일본책을 번역하여 출판하는 것을 계기로 만든 협동조합이었다. 이사장을 맡은 백재중 선생님은 편집, 교정, 홍보, 펀딩, 회계 등의 일을 하는데 중심이셨다. 나는 책읽기 모임 담당이었는데 여섯분 정도와 열심히 책을 일고 있다. 건강미디어협동조합에서 출판하는 책들은 인의협에서 주최하는 히로시마 학생캠프, 민의련과의 교류 등이 있을 때면 읽어야 할 머스트 아이템이 되어 도움을 주고 있다. 2014년도는 철학사책을 시작으로 많은 책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읽지 못했던 중요한 책들, 예를 들어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함께 읽어가고 있다.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고, 인연이 되었을 때 연대활동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조합원들이 생겨 좋다.

2017년 10월
이 글을 쓰며  건치선생님들과 2003년 지역보건위 사업을 했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누군가의 말대로 기억은 과거의 것이 아닌, 미래를 만들어 가는 데의 시작이라 한다. 기억해두었으니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실명을 써서 게재하는 것에 대해 각 선생님들께 양해를 구하지 못했다. 사랑으로 용서해주시길.

 

김미정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반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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