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봄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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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봄꽃처럼
  • 김기현
  • 승인 2017.12.30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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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김기현 공동대표

1789년 프랑스에서는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삼부회는 당시 프랑스의 신분제 의회로써 제1신분인 성직자, 제2신분인 귀족, 제3신분인 평민의 대표가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회의였다.

1614년 소집된 이후 실로 175년 만의 소집이었다. 그 오랜 기간 국가의 중대사가 없었을 리는 만무할 테니, 그동안 제3신분은 철저히 무시하고 인구의 2%에 불과한 성직자와 귀족의 대표자들이 제멋대로 결정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1789년에 삼부회가 소집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3신분의 도움이 없이는 직면한 국가적 문제, 중대사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더불어 제3신분의 지위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그만큼 강대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175년 만에 열린 삼부회는 토론과 투표 방식에서 제1신분·제2신분과 제3신분의 대립으로 인해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 채 해산되었고, 평민들은 국민의회를 발족시켜 그동안의 국가운영 관행에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의 서막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국민의회는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를 들고 절대왕정을 비롯한 구체제와의 결별을 고한 혁명의 성공을 이끌어냈고, 이것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근대사회를 견인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과 의의를 압축해서 표현하면 그것의 3대 정신, 즉 '자유, 평등, 박애'의 승리와 확산이라고 말하는 것도 틀림이 없겠지만, 나는 '앙시앵레짐(구체제의 모순)의 타파'라고 말하고 싶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앙시앵레짐'은 당시 프랑스의 절대왕정과 같은 체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제도와 체제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어 혁명의 나침반과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해주는 의미로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앙시앵레짐의 타파'는 어느 사회, 어느 시대이건 혁명을 꿈꾸거나 진보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가슴속에 염두에 두어야 할 절대적 가치와 같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 인류의 생산력은 지구 상 모든 사람을 먹이고 입히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이웃 둘 가운데 하나는 굶주리고 헐벗고 있다. 이는 강자의 탐욕 때문이다. 불과 몇 개 되지도 않은 국가들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다른 세계 여러 나라들을 요리하고 있다.

불평등한 무역 협정, 무차별적인 자본 침투, 군사력을 통한 압박과 정복 등으로, 약소국은 강대국의 무릎 아래 조아릴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쪽에서 주장하는 정의와 평화가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짓밟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결코 정의도 평화도 아닌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오늘날 세계 앞에 놓인 '앙시앵레짐'인 것이다.

눈을 돌려 우리 사회의 그것을 들여다보자. 인간미를 상실한 자본의 위력은 더할 나위 없이 막강해져 있고, 그것을 등에 업은 세력들은 권력의 중심부에 여전히 포진하고 있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우리 사회를 요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들이 외치는 정의와 평화가 우리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불의와 억압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이제 며칠 후면 문을 닫게 되는 2017년은 이 땅에 다시 오지 않는다. 해마다 이맘때면 흔히 '다사다난'이란 상투적인 말로 한해를 마무리하곤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다난의 고통을 피하고 다행을 누리고 싶어 하지만 올해도 다난은 예외 없이 우리들 눈앞에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도 어느 해보다 큰 다행이 우리에게 와서 그나마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의 실세들은 자신들의 위기를 스스로 극복할 힘을 잃었고, 조금씩 힘을 비축해가던 평민들은 그들의 지배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은 한 해였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변화들이 우리 사회에서 신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분한 해방의 길을 열어줬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비상식과 불통, 불의와 억압으로부터 약간의 숨통을 틔워주긴 했지만 그것이 부족해 보이는 이유는 '앙시앵레짐의 타파'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주의자들과 그들의 비호를 받는 세력이 여전히 정치, 경제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힘을 더 모아야 할 필요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무적인 것은 그럴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권이 바뀌어 객관적 환경과 상황이 호전된 것 때문이 아니라, 저들은 위축되었고 우리는 자신감이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봄꽃처럼 피어나는 사회는 아마도 아직까진 먼 곳에 있는 요원한 기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이 시대는 자유주의자들과 정글의 법칙을 찬양하는 노래가 우상으로 자리 잡고 들어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예지하는 세상은 달라야 한다. 시대의 우상으로 누가, 무엇이 자리 잡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외쳐야 한다. 세계질서도, 우리 사회도, 남북관계도, 우리 치과계도, 낡고 억압하는 구체제와 단호히 결별할 수 있도록….

'앙시앵레짐의 타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봄꽃처럼 피어나는 세상을 꿈꾸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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