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치의학 120년] 최초의 치과학 교실 개설과 치과전문의 수련
상태바
[한국 치의학 120년] 최초의 치과학 교실 개설과 치과전문의 수련
  • 이주연
  • 승인 2006.05.3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W.J.Scheifley

한국에서 최초로 치과학 교실을 개설(1915)하고 독립된 치과진료실을 운영하기 시작한 곳은 세브란스연합의학교였다. 당시 ‘치과진료부’란 명칭으로 일본인간의 도제교육이 실시되던 총독부의원과는 달리 ‘치과학교실;의 개설은 학문으로서의 치의학의 위상을 높이고 미국식 치과 진료기술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초대 과장으로 임명된 쉐프리(W.J.Scheifley)는 한국인의 특성에 따른 치의학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 치과학 교실 부속 진료실에는. 치과방사선기계(1917)와 4대의 치과진료의자(1918)가 있었고, 기공사 이씨(Mr. Lee)가 별도로 기공작업을 하였다. 초기에는 한국인 환자들에 대한 무료시술 비율이 높았으나, 환자가 늘어나면서 그 비율은 줄어들었다. 쉐프리는 한국인들이 치과진료를 받지 못하는 이유로 경제적 빈곤, 구강건강에 대한 인식 부족, 치과에 대한 상업적 인식 세 가지를 들었다. 당시 일본인 치과의사나 입치사들의 치료관행에 의해 많은 한국인들이 치과를 금박이나 은박을 해넣는 상업으로 인식하게 된 것을 비판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미국은 기존의 보철치료 중심의 치의학 교과과정을 반성(1909)하고, 사설치과대학을 종합대학이나 의과대학에 편입시켜 전반적인 의학 및 과학교육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템플 치과대학을 졸업(1913)한 쉐프리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와 연계해 치과대학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 첫 시도로 의대생들에게는 한 과목으로 구강학을 가르치고, 의과대학 졸업 후 과정으로서 치과전문의 수련제도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의대졸업생 최주현이 2년(1915-1917)간 치과기공과 임상수련을 받았다. 하지만 최주현의 수련은 당시 한국내 치과의사 자격시험이 개설되지 않고 있었고, 총독부의 관련규정도 변화시키지 못한 채 좌절되었다. 최주현은 치과전문의로 인정받지 못한 채 외과의사로 살아야했다.

 

 이후의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만주를 둘러싼 미․일의 이권대립으로 양국의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고, 3.1운동을 전후하여 총독 정치에 비판적인 선교사들에게 직접적인 탄압이 가해지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쉐프리는 치과학 교실의 발전에 필요한 비용을 자신의 봉급에서 일정 부분 각출하여 대야 한다고도 주장하리 만큼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쉐프리가 견지한 낙관주의와 개인적 헌신에도 불구하고 치과학교나 졸업 후 치과전문의 과정확립에 대한 실제적 성과를 얻지 못한 채 개인적 건강의 악화로 인하여 사임(1921)하게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