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의협 최규진 교수님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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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협 최규진 교수님을 만나다!
  • 이승현
  • 승인 2018.09.06 17: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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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특성화 교육] 경희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 본과 4학년 이승현 학생

경희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이하 경희대치전원) 4학년 학생 6명이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이하 건치)를 찾아 '익스턴십(Externship)' 지난 7월 16일부터 8월 12일까지 실습을 진행했다.

경희대치전원 학생들은 실습의 일환으로 보건의료운동 일선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에 본지는 학생들이 작성한 인터뷰를 순차적으로 게재하고자 한다.

게재는 ▲김병주·양유현 학생의 건치 홍수연 공동대표 인터뷰 ▲이승현 학생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최규진 학술위원장 인터뷰 ▲박소영·이호은 학생의 살림의료사협치과 박인필 원장 인터뷰 ▲공연진 학생의 본지 김철신 편집국장 인터뷰 순이다.

편집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 이렇게 더울 줄 알았으면 동네 치과에 지원할껄.. 하는 마음이 잠시 스쳤지만, 아직은 불우한 본과 4학년의 처지임을 깨닫고는 신용산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건치 사무실에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건치 사무실은 히로시마 원수폭금지세계대회 건치 참가단 사전세미나로 모인 원광치대 학생들 및 관계자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건강과대안 이상윤 선생님의 유익한 강의에 이어 맛있는 저녁식사를 함께한 후, 최규진 교수님을 만나기 위해 다시 분주히 걸음을 옮겼습니다.

‘인터뷰’ 형식에 대한 막연한 부담감이 있었지만, 정책연구회에서 최규진 교수님의 강의를 한 번 들어본 경험이 있었기에 다행히 어색함은 덜했습니다. 진부한 질문들에 대해 교수님은 전혀 진부하지 않은 답변, 특히 역사 전공이자 달변가로서의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해 주셨습니다. 당시의 대화를 문답의 형식으로 재구성해보았습니다.

최규진 교수

Q. 안녕하세요 교수님, 정책연 강의 이후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희는 경희대 치전원 4학년 학생이고 익스턴십(Externship)으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교수님 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릴게요.

A. 네, 반가워요. 저는 의학사를 가르치고 있는 최규진이라고 합니다. 인하대 의학교육학교실 소속이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제 인터뷰가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하하.

Q. 어떤 내용이건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의학사라는 분야가 치의학에서는 굉장히 생소한 분야라서요, 간단히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A. 우선 의학사는 의사들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시작된 측면이 큰 학문이에요. 의사라는 전문가집단의 집단의식을 강화하는 데에 꾸준히 그 기능을 계속해왔죠. 한국에서는 황우석 사태 이후 의료윤리에 대한 관심이 무척 커졌고, 이에 따라 의학교육, 의사학, 의학사와 같은 분야가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동시에 의학사의 저변도 확장돼서 저처럼 보건의료운동의 역사를 추적하거나 질병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생겨난거죠.

Q. 교수님 연구하시는 주제는 역시 흥미롭네요. 그런데 교수님은 어떤 동기로 의학사를 전공하게 되셨나요?

A. 계기는 따로 없어요. (웃음) 그냥 저는 보건의료운동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의사라는 직업을 영위하지 않으면서 보건의료운동을 하는 것은 어떨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진료를 하면서 운동도 하는 분들의 역할이 분명하고 또 필요하지만, 의사라는 stance 없이 운동하는 사람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해 생각했다고 할까요? 그런데 사실 가족의 반대나 주변의 시선을 생각하면 쉽게 결정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고민을 거듭한 끝에, 플랜 B로 의학사 전공의 대학원 진학을 선택한거죠. 대학원 교수님들이 응원해주신 덕분에 인의협 활동도 꾸준히 해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과감하면서도 현명한 결정이었네요. 그런데 여러 보건의료단체 가운데 인의협을 선택하신 건지 궁금증이 생기는데요. 교수님이 선택하실 당시 인의협이 어려움을 겪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A. 맞아요. 사실 인의협은 의약분업을 계기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제가 가입할 때까지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당시 인의협을 비롯한 보건의료단체에 던져진 숙제가 있었거든요. 1980년대부터 시작된 민주화라는 아젠다를 계속 가지고 갈지에 대한 논란이었어요. 논란이 많고 어려움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제 관점에서는 그 정체성을 가장 잘 지켜온 인의협이었기에 가입을 했죠.

가입 이후에는 아무래도 젊은 의사, 더군다나 낮에 진료를 해야 하는 입장이 아니다보니 여기저기 쓰임이 많았던 것 같아요. 노숙인 진료소, 민의련, 보건의료학생캠프부터 세월호 유가족이나 고공농성하시는 분들을 찾아가 건강을 살피는 것처럼요. 물론 인의협에서 필요한 물품이나 약품을 지원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요.

Q. 저도 사실 고공농성 기사에서 교수님을 처음 알게 됐는데 인의협이라는 지원군이 있었네요. 그런데 한편으로 의아한 것이, 의학사- 그러니까 역사 전공이라면 책상에 앉아계시는 모습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역사라는 관점이 진행형인 현장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어떤 게 있을까요?

A. 음 확실히 그런 느낌이 강하긴 하죠. 진료라는 수단으로 기여를 한다면 사실 전문과목을 가진 전문의들이 더 적합한 측면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직간접적으로 역사라는 관점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보는데요, 우선 간접적으로는 낙태죄 반대와 같은 운동 현장에 기여할 수 있어요. 역사적으로 볼 때 낙태죄란 게 일제의 잔재거든요. 그 역사를 밝혀서 반대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거죠.

직접적인 것은 故백남기 농민의 부검논쟁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당시 인의협의 원로선생님들의 역할이 컸어요. 역사적으로 볼 때- 가령 1987년도의 사건처럼 국가기관이 부검을 악용하는 경우가 꾸준히 있었거든요.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사실이 아닌 내용을 기록할 수는 없겠지만, 200여일간 신체가 어떻게 변화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고, 언론 등을 통한 물타기가 충분히 우려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인의협 선생님들과 함께 유가족을 설득해 부검을 반대했던거죠.

Q. 아 그럼 인의협선생님들과 유가족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계셨던건가요?

A. 그렇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백남기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실 당시 현장의 진료팀장이 저였어요. 그렇게 쓰러져서 힘겹게, 끌고 대피시키는 모습을 다 봤던거죠. 즉시 인의협 회원 중 신경외과 전문의가 달려와 모니터링을 하는 등 과정에서 유가족과 충분한 라포를 형성하고 있었어요.

Q. 부검논쟁 당시 인의협이라는 단체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이전부터 이어온 관계였군요. 인의협의 역할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A. 재밌는 건 부검논란 이후에 사망진단서 관련 논란에서도 인의협의 연결고리를 찾아볼 수 있다는 거에요. 당시 사망진단서 작성에 압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 레지던트가 인의협의 보건의료학생캠프에 참여했던 친구였던 거죠. 캠프에 참여했던 다른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성명서를 내기도 했고요.

Q. 와…. 이건 정말 소름 돋는 사실이네요. 밝혀지는 사실들 가운데 보람도 크셨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 마지막 질문을 드려야 하는 것이 아쉬운데요. 현장에서의 보람 외에 학문적인 측면에서의 보람도 있으실 것 같아서요. 역사전공자로서 느끼는 보람은 어떤게 있을까요?

A. 아무래도 학문적으로는 개인적인 만족이 큰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책을 두권 내고, 챕터 저술도 조금 하고 그 결과물을 보니, 내가 이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작업을 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막막한 마음이었지만 막상 정리되고 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구나 싶고, 여기저기 인용될 때 느끼는 보람도 무척 큰 것 같아요.

Q. 진료 외적인 부분에서 활동은 물론 보람을 느끼시는 분들을 거의 보지 못해서 그런지, 교수님의 말씀들이 신선한 자극이 된 것 같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 감사합니다.

A. 도움이 됐다니 저도 기쁘네요. 보건의료 운동 현장에서 또 만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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