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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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 송필경
  • 승인 2018.11.05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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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민혁명광장

역사학자 토인비가 친구와 함께 비행기로 눈 덮인 록키산맥을 넘을 때였다. 친구가 비행기 창밖의 광경은 보며 감탄했다. "보게나, 저 자연의 장관을! " 토인비가 답했다. "나는 경관이 웅장한 이 산맥 보다는 인간의 냄새가 나는 아테네의 작은 동산이 더 좋다네."

나는 20세기에서 인간의 냄새가 가장 진했던 베트남을 18년간 26번 찾았다. 이제 베트남에 못지않은 인간의 냄새가 나는 쿠바에는 처음 간다. 가슴속에 큰 떨림이 일었다.

드디어 멕시코에서 쿠바로 간다. (제공 = 송필경)

멕시코시티와 아바나는 거의 같은 위도에 있다. 비행기는 멕시코시티에서 곧장 동쪽으로 향한다. 비행기가 이륙하여 어느 높이에 이르자 멕시코시티의 고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밖 멀리 남쪽에 뾰족한 봉우리 끝에 뜨거운 여름인데도 만년설 같은 흰 눈이 쌓인 우뚝한 산이 보였다. 멕시코시티가 해발 고도가 약 2천m 인데 저 산 높이는 얼마나 될까라는 호기심이 일었다.

귀국해서 여러 자료를 뒤져 보니 높이 5,482m인 포포카테페틀 화산(Popocatepetl volcano)이었다.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2016)와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가 멕시코시티에서 머물 때 게릴라 활동을 대비해 체력 단련하기 위해 이 산 정상을 자주 올랐다고 했다. 체는 심한 선천성 천식 때문에 정상은 한 번도 밟지 못했지만 훈련에는 빠지지 않았다. 이때 피델은 체의 노력에 감탄했다. "여기서 체의 성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엄청난 정신력과 성실성이 바로 그것이죠."

포포카페테틀 화산. 광활한 멕시코시티 고원에서 우뚝한 산이 구름 위에 솟았다. 산 정상 극히 일부에 눈이 남아 있었다. (제공 = 송필경)

비행기는 동쪽으로 멕시코만과 유카탄 반도와 유카탄 해협을 거쳐 3시간 정도 지나서 쿠바 상공에 진입했다. 하늘에서 본 아바나 주변은 끝없는 녹색 평원이 넓은 잔디밭처럼 보였다. 아바나 하늘 관문 이름은 아바나 국제공항이었으나 피델 카스트로가 1959년 집권하자 공항 이름을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으로 바꿨다.

3시간 조금 넘게 비행했다. 아바나 주변이 광활했고, 비행장은 작았다. (제공 = 송필경)

국제공항은 외국인에게는 그 나라의 얼굴이다. 미국은 1948년 개항한 세계 최대 도시의 뉴욕국제공항을 케네디가 1963년 암살된 이후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으로 이름 바꿨다. 프랑스 파리의 하늘 관문 이름은 제2차 세계대전 영웅이며 프랑스 대중에게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의 이름을 딴 ‘샤를 드골’ 공항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혁명 성공 이후 모든 명예를 64년 전 죽은 선배 ‘호세 마르티’에게 바쳤다. 49년 동안 최고 권좌에 있으면서도 카스트로는 자신의 동상 같은 조형물이나 자신 이름 쓴 어떤 기념관도 만들지 않았다.

우리 인천공항이 시설과 서비스 질에서 세계 1위라고 한다. 그러나 아쉬운 건 세계 최고 공항의 이름에 혼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에겐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을 만든 ‘세종’이 계시고, 일본인들이 인정한 세계 최고의 해군 제독으로 꼽히는 ‘충무’공이 계신다. ‘한글’ 공항, ‘세종’ 공항, ‘충무’ 공항 이런 식으로 이름 바꾸면 외국인에게 우리 혼을 보여줄 수 있고, 우리는 우리 역사와 문화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까?

누나 아이데 산타마리아(Haydée Santamaría; 1922-1980)와 남동생 아벨 산타 마리아(Abel Santamaría: 1927~1953)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독재자 바티스타를 타도하기 위해 1953년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에 참가했다. 공격은 실패하고 둘은 바로 붙잡혔다. 서로 다른 방에서 조직원을 밝히라는 고문이 있자 남매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찰은 동생 아벨의 눈알 하나를 떼어 누나 아이데에게 보여주며 말을 하지 않으면 다른 눈알도 뽑겠다고 윽박질렀다. 그러자 누나는 단호히 말했다. 동생이 눈알을 뽑혀도 말하지 않았는데 내가 말하겠는가 하며 버텼다. 동생은 나머지 눈알도 뽑혔고 결국 고문 중에 사망했다. 쿠바의 혁명 도시 산타클라라의 국제공항 이름이 ‘아벨 산타마리아’ 국제공항이다.

착륙 직전 비행기 창밖으로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의 전체 모습이 보였다. 활주로 수도 적고, 공항 터미널은 우리나라의 웬만한 지방 버스 터미널보다 작았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호세 마르티'란 이름만으로도 공항의 작은 크기나 열악한 시설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관광의 나라답게 입국 수속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짐을 들고 공항 터미널에 나오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광경은 옛 미국 영화에서만 본 1960년 이전의 미제 승용차였다.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차를 생산하지 못했다. 엔진 등 주요 부품을 중고로 수입해서 조립하고 차체는 드럼통을 뚝딱뚝딱 펴서 만든 지프차 형태였다. 어릴 때 통통하고 늘씬한 미제 차를 길거리에서 드물게 봤는데 우리 성냥갑 같은 차에 비해 당시 미제는 꿈의 차였다. 지금 쿠바에 있는 수많은 승용차는 1961년 미국과 단교하기 전, 우리가 꿈의 차라고 바라 본 그 미국 차량들이다. 차량 수명이 60년이 넘었을 텐데 아직 씽씽 달린다. 특히 미국인에게는 향수를 자극하는지 인기가 높아 그들에게 관광 상품으로 잘 이용한다고 한다. 단 오르막을 오를 때 대부분 차는 진한 매연을 내뿜었다.

1950년대 보이는 미국산 차들이 쿠바 도로의 주인공이다. (제공 = 송필경)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쿠바인 여성이 가이드로써 우리를 맞이했다. 이 가이드는 어릴 때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북한에서 약 10년 살았다고 했다. 20인승 소형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어릴 적 북한에서 살았던 여성 가이드(우)와 관광 전세 버스(좌) (제공 = 송필경)

쿠바에 올 때 저가 항공이어서인지 국제선임에도 기내식이 없었다. 서비스라곤 달랑 생수 한 병이었다. 점심을 먹지 못해서 시내로 향하는 도중에 가이드가 준비한 샌드위치로 버스에서 배고픔을 겨우 달랬다. 쿠바에서 먹은 첫 음식이 하필이면 미국식이었다.

먼저 아바나 베다도(Vedado) 지역에 있는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ón)으로 갔다. 쿠바에는 크고 작은 광장이 어디에나 널려 있다고 한다. 이 혁명광장이 쿠바에서 가장 넓고 혁명의 나라 쿠바를 상징하는 장소다. 이 광장은 프랑스 파리의 에투알 광장을 본떠서 1920년대에 작은 언덕 위에 건설했다. 면적이 72000㎡(약 2만2천평)이어서 세계에서 13번째로 큰 광장이며 넓이를 환산해 보니 여의도 공원의 1/3크기다.

넓은 혁명 광장. 체 게바라 형상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형상과 호세 마르티 기념탑이 마주보며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제공 = 송필경)

109m의 호세 마르티 기념탑(1953년 시공, 1996년 완공)이 있는 ‘시민 광장’이었으나 쿠바혁명 이후에 ‘혁명 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기에서 기념일 때마다 혁명 시위와 퍼레이드가 있었다. 특히 연설중독자인 카스트로가 매년 5월 1일과 7월 26일에 때로는 100만 명에 이르는 관중 앞에서 2~4시간의 긴 연설을 자주 했다고 한다.

광장 가장자리 중심에 기념탑 앞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같은 자세를 취한 호세 마르티의 동상이 있다. 17m 높이로 적지 않는 크기의 동상인데 거대한 기념탑 앞에 있으니 장난감처럼 작게 보였다. 광장 주위로 국립도서관, 국립극장 그리고 많은 행정 부처들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기념탑 건너편 가장자리 양쪽에 내무성 건물과 통신성 건물이 있다.

내무부 건물 전면에 내 글의 주인공인 체 게바라 얼굴 형태를 철근 부조로 장식했다. 1957년 게리라 전투에서 체가 혁혁한 성과를 올리자 피델은 체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체는 스스럼없이 자랑스러워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허영심이 있기 마련이다. 그날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의기양양한 사람이 되었다.“

그 이후 체는 별을 단 베레모를 썼는데, 이 모자, 길게 덥수룩한 머리칼, 수염 그리고 오뚝한 콧날의 형상은 체를 혁명아의 영원한 상징으로 자리 잡게 했다.

1960년 3월 군수품을 가득 실은 프랑스 수송선 라 쿠르브호가 아바나 항에서 원인 모를 폭발을 했다. 쿠바 정부는 미국 CIA를 배후로 확신하고 폭발 희생자를 추도하고 CIA를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를 이 혁명 광장에서 열었다.

유명한 패션 사진작가에서 피델의 전속 사진작가로 일한 코르다 (Alberto KORDA, 1928~2001)가 이 집회에서 비장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체를 우연히 찍었다. 체 게바라의 수많은 매력적인 사진 가운데서도 혁명 의지가 가장 잘 나타난 사진으로 꼽힌다. 코르다가 저작권 없이 무료로 배포해 지금도 상업적으로 널리 사용하고 있다.

이 사진의 이미지는 쿠바 전국 방방곳곳, 거리 노점에서도, 골목 담벼락에서도, 가정집 벽화에서도, 기념품 가게에서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넓은 혁명 광장. 체 게바라 형상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형상과 호세 마르티 기념탑이 마주보며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제공 = 송필경)

체는 또 다른 혁명을 꿈꾸며 1965년 3월 아프리카 콩고로 떠날 때 피델에게 비공개를 부탁한 편지를 남겼다. 피델은 이 편지를 1965년 10월 3일 쿠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낭독했다. 약10여 년 동안 피델을 만난 행운과 피델에게 혁명을 배운 고마움을 표시하고, 이제는 정치 견해를 달리하기에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 솔직히 담은 편지다.

그 편지의 마지막에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란 구절을 남겼다.
이 글귀 또한 영원한 혁명아의 영원한 표어로 쿠바 사람에게는 영원한 울림으로 가슴 깊이 파고들어 있다.

코르다가 찍은 사진에서 뽑은 체의 형상과 체의 구호를 내무성 벽면에 철골 부조로 만들어 놓았다. 요즈음은 관광객에 호세 마르티 기념탑보다 더 유명해 혁명 광장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통신성 건물 정면에는 넓은 둥근 창 모자를 쓴 긴 수염의 나이 많은 농부처럼 보이는 얼굴이 있다. 이 형상을 피델이라고 오인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는 피델보다는 6살 어린 또 다른 혁명 영웅인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1932~1959)다. 혁명 성공 아홉 달 뒤인1959년 10월 28일 지방에서 임무를 마치고 세스나 비행기를 타고 아바나로 돌아오던 길에 비행기가 감쪽같이 사려지면서 실종했다. 피델과 체는 카밀로의 흔적을 1주일이나 찾았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사진 작가 코르다가 찍은 체 게바라 사진. 체 게바라 사진 가운데 가장 알려진 사진으로 그림 등으로 형상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제공 = 송필경)

1959년 1월 1일 혁명군은 아바나에 입성했고 1월 3일 카밀로는 아바나에 들어왔다. 피델은 아직 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피델은 지방에서 카밀로와 통화하면서 아바나에서는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카밀로는 ‘잘하고 있어 피델’(Vas Bien Fidel)이라고 대답 했다. 카밀로 초상 아래 이 말을 철근 부조로 새겨 놓았다.

초상과 함께 어록이 드넓은 광장의 가장자리 건물 전면에 크게 걸려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두 혁명 전사는 선배 호세 마르티를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매일 밤마다 이들의 형상이 철근 부조를 조명을 받아 빛으로 탄생한다. 일정상 밤에 여기를 다시 찾을 수 없어 야간 사진을 남길 수 없어 무척 아쉬웠다.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혁명 직후 주역들이 아바나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왼쪽 사진 가장 왼쪽에 피델 카스트로, 세 번째가 체 게바라, 다섯 번째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오른쪽 사진은 체 게바라와 함께.(제공 = 송필경)

내 전체 글의 핵심 주제는 쿠바 의료 혁명이다. 다시 말해 쿠바 혁명이 낳은 소중한 결과물인 의료 무상 제도이다. 혁명의 광장에서 ‘혁명’을 떠올리니 가슴이 뭉클했다.

혁명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거나 나아가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는 많다. 그러한 사람들의 성향은 보수적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은 박정희를 좋아하거나 나아가 숭상하는 사람들임이 거의 틀림없다. 1961년 5월 16일의 박정희 행위를 쿠데타란 군사반란이라 보고 있지만, 박정희 자신은 쿠데타란 용어를 거부하고 ‘혁명’이라 불렀다.

일반적으로 혁명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이 박정희가 한 혁명만은 숭상하는 이런 괴리 또는 간극, 다시 말해 앞뒤가 안 맞는 뒤틀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역사에서 혁명은 ‘평등을 위한 반란’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반항의 배후에는 평등하려는 욕구가 있다.” 이는 2,300여 년 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인간 사이 ‘평등’의 실현은 이제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간절한 염원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개인 사이는 물론 민족 사이, 나라 사이에서도 나타나는 ‘불평등’이야말로 인류의 영원한 굴레로 인류에게 근원적인 재앙을 가져왔다고 단정할 수 있다.

18세기 계몽시대를 선도한 루소는 자신의 저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명의 진보가 부와 권력 그리고 사회적 특권의 인위적인 불평등을 초래함으로써 하늘에서 부여 받은 인간의 행복과 자유를 파괴하고 억압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법과 제도 또한 이러한 불평등을 영속화할 뿐이라고 보고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명석한 사상은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다.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형상과 말(言)을 철골 부조로 만들었다. (제공 = 송필경)

‘불평등’의 문제는 인류의 여러 스승께서도 일찍이 말씀하셨다.

공자께서는 경제적 평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적게 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공평하게 가지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라. 평등이 가난을 사라지게 하리라.“

2,500여 년 전의 공자 말씀은 2,400여 년이 지난 19세기 마르크스 경제 사상의 핵심과 본질적으로 별 다름이 없다.

붓다는 신분의 평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간을 비천하거나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태어날 때의 신분이 아니라 그 자신의 행위에 따른다.”

붓다의 말씀을 가장 생생히 기록한 불교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인간평등관이며 계급타파였다. 붓다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 어처구니없는 카스트 제도에 의지한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혁명적 사상이었다. 세계적 종교로 발전한 불교는 신분 계급의 불평등이 단단히 굳어버린 고향 인도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예수는 사회적 평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나누어 주며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에게 똑같이 베푼다.”

이에 근거하여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피부색과 인종을 떠나 인류애적인 평등을 실천하라는 사자후였다. 그러자 예수의 동족인 유대인들은 예수를 로마 당국에 고발하여 십자가로 보냈다. 또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서구 제국주의는 이 말씀을 2,000년 동안 전혀 따르지 않고 인종 차별, 종교 박해, 식민지 침탈을 끊이지 않았다.

인간 사회에서 강자의 소유욕은 약자에게 노예 노동을 강요함으로써 약자에게 비참이 생겨났다. 인류사에서 있은 큰 재앙은 인간과 인간 사이, 사회와 사회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의 소유욕이 불러 온 불평등에서 비롯했다.

평등하려는 욕구로서 반항을 역사는 혁명(革命)이라 불렀다. 혁명은 기득권을 가진 강자(정복자, 지배자, 권력자, 남성)가 강요하는 질서(命)를 약자(피식민자, 피지배자, 민중, 여성)가 뒤엎고 갈아치운다(革)는 의미다.

14세기 르네상스 이후 유럽은 과학혁명에 불 붙였고, 중세를 지배한 로마 가톨릭에 억눌렸던 인간의 존엄과 개성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항해술과 화약 발달로 국가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신대륙(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에 분주했고, 덕분에 상인들은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유럽 나라들은 교회 영향에서 벗어나 절대군주체제로 서서히 바꾸고, 무역 상인들과 금융업자들은 부르주아란 새로운 계급을 형성했다.

새롭게 떠오른 부르주아는 왕과 귀족이 권력을 세습하는 낡은 체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힘과 추진력과 야망이 있었으며, 돈 벌 수 있다면 언제나 무자비할 태세였다. 세습 귀족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할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새로운 경제 권력은 새로운 정치사상을 만들기 마련이다. 18세기 계몽사상은 세습 특권을 부정하고, 공화제 수립을 위해 3가지 인민의 권리를 옹호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압제 정부는 인민이 전복할 수 있는 혁명권을 가진다는 3가지 권리다.

영국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에는 귀족계급이 없었으며 봉건적 제약에 얽매이는 농민이 없었다. 대신 자원이 무한한 미개척지가 있었다. 계몽사상으로 무장한 부르주아는 유럽보다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체제를 만들기 쉬웠다.

근대에 들어 토마스 페인은 1776년 저서 ‘상식’에서 세습 군주제를 비판하고 미국은 공화제로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독립과 민주주의 수립은 상식이라고 주장하고 미국 독립전쟁을 혁명의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미국독립선언서의 첫 구절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All men are created equal)』이는 1776년 7월 4일, 영국 식민정책에 대항하여 미국 부르주아 지식인이 발표한 독립선언문 첫 구절이다. 인류의 염원을 담은 평등이 바로 미국의 건국이념이다. 그래서 역사학자 랑케(Ranke)는 영국에 대항한 미국독립혁명을 세계사에서 가장 의의 있는 사건이라고 했다.

또한 근대 인권 자각의 신호탄이었으며,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 ‘자유, 평등, 우애’는 근대 민주주의 체제의 주춧돌이 되었다.

명료하고 분명 칭찬할 가치가 있는 이 선언은 인류 근대의 새벽을 밝힌 신호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기만적이었다. 당시 미국 지식인이 정의한 이 평등한 ‘Men’의 실상은 모든 인간이 아니라 백인 부르주아까지였다. 이전에는 왕과 일부 특수 귀족만이‘평등하게 태어난 인간’이었다. 독립선언 이후‘Men’은 돈 많은 신흥 계급도 과거의 귀족처럼 평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유색 인종, 여성은 물론 백인 프롤레타리아조차 그때까지 ‘평등’은 고사하고 인간으로도 취급받지 못했다.

1800년대 중반까지 남부 농장에서는 노예 없이는 농장 운영이 불가능했다. 수많은 불행한 아프리카 흑인들은 인간 사냥으로 잡혀 대서양을 건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미국으로 끌려왔다. 흑인은 사고파는 가축이었으며, 남부 농장에서 채찍질 당하며 농사일을 했다.

북부 산업 부르주아들은 흑인을 자유롭게 고용할 수 있는 기업 경제를 바랐고, 남부 농장주들은 노예를 소유하며 자신들이 유쾌하고 유리한 농업 경제를 원했다.

북부를 대변한 링컨이 당선하자 남부 11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고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링컨은 애초 노예 해방론자가 아니었다. 노예를 값싼 노동자로 만들기 위해 노예제 폐지에 동조했을 뿐이었다. 인권 존중보다 정치적 계산이 앞서 있었다. 대통령에 오른 링컨의 목표는 탈퇴한 남부를 연방에 복귀시켜 북부가 원하는 경제 체제를 만들려고 했다. 이를 남부가 거절하자 충돌했는데 이게 남북전쟁이다.

링컨은 1861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나의 최고 목적은 연방을 유지해 이를 구제하는 것"이라며 노예제도는 문제가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백인과 흑인이 어떻게든 정치적, 사회적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의견에 찬성한 적도 없고, 지금도 찬성하지 않는다.”

왼쪽 그림은 프랑스 대혁명 때 왕과 귀족을 단두대에 보낼 때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평민이 높은 철골 구조에 올라 교수형에 처한 성직자 머리를 밟고 단두대를 보고 있다.

(오른쪽) “시민 계급, 농민, 여자들까지도 똑똑하고 자부심이 가득하며 생기발랄해 보였다. 멍에를 지고 허리를 숙이고 있던 인민들이 다시 곧바로 일어서서 걷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변화에 놀란 어느 귀족이 남긴 기록이다. 혁명은 억압받고 주눅들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다. 혁명 광장에 모인 군중 사이에 한 사람이 가로등 위에 올라 있다. 마치 왼편 그림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카스트로 전속 사진 작가 코르다가 찍은 사진이다  (제공 = 송필경)

19세기까지 약 4백년 간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한 세력은 스페인이었다. 20세기에 들자 미국은 세계 최강 세력으로 떠올랐다. 임종 직전의 늙은 스페인은 건장한 청년의 모습을 한 미국에게 라틴아메리카의 중요한 식민지를 빼앗겼다. 새로운 지배자 미국은 오직 군사력에만 의존한 스페인과 달리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척 하였다. 미국식 민주주의란 한마디로 자본주의에 다름이 없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라틴아메리카에서 그 정체를 드러낸 사건이 1928년 12월 6일 콜롬비아 산타마리아 근처 시에나가에서 일어났다. 이를 바나나 학살(Masacre de las bananeras)라 한다.

미국 자본가 소유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nited Fruit Company 이하 UFC)'의 바나나 대농장(플랜테이션)에서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요구한 노동조합의 파업이 한 달간 일어났다. UFC는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콜롬비아 정부를 압박했다. 그러자 미국 자본에 고분고분한 콜롬비아 정부는 헌법을 중지하고 계엄을 선포하여, 파업진압에 군대를 동원했다.

비상사태가 아래서 바나나 농장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파업 및 항의 차원에서 시에네가 시 광장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모였다. 5분 안에 구역을 깨끗이 비우라는 명령을 받은 콜롬비아 군인들은 기관총으로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사격했다. 이날 미국 대사는 콜롬비아 군인들이 1,000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노벨상 수상 작가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 1927〜2014)는 이 학살은 『백 년 동안의 고독』이란 소설을 통해 묘사했다.

바나나 학살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미국 자본에 종속한 정권은 이런 탄압을 모범으로 삼았다. 미국 자본가들의 필요와 소유를 위해 자신의 나라를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앞잡이 노릇을 하는 그야말로 괴뢰 정권이었다.

유대인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을 첫 공식 방문한 음악가 메누힌(Yehudi Menuhin : 1916~1999)은 자신의 시대인 20세기를 이렇게 평가했다. “인류가 품어온 희망 중 가장 큰 희망을 낳고는, 모든 환상과 이상을 파괴해 버렸다.”

20세기를 지나는 동안 공업과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인류는 예전에 비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물질적 토대를 쌓았지만, 러시아 혁명에서 극좌라는 몹쓸 사생아가 태어났다면 자본주의 역시 극우 파시스트라는 포악한 자식을 길렀다.

이들의 출몰과 대립으로 광적인 증오가 이전 세기보다 더욱 널리 퍼졌고, 야만적인 대량 파괴와 끔찍한 살상이 이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저질러진 적이 인류역사에 일찍이 없었다. 자본주의 모순에서 비롯한 제1·2차 세계대전, 그 와중에 발생한 유대인 학살, 미·소 대립이 부추긴 한국전쟁, 중국의 티베트 침략, 미국의 야욕이 저지른 베트남전쟁, 소련의 아프간 침공, 석유쟁탈을 위한 걸프전쟁, 화약의 냄새가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과 주변 중동, 그밖에 남미·아프리카·동유럽에서 벌어진 분쟁·약탈·침공 따위가 끊임없이 이어진 20세기는 메누힌의 말대로 인간의 존엄을 여지없이 파괴했다.

20세기 최강자로 등극한 미국은 오로지 ‘기업’의,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나라였다. 미국의 ‘기업’은 노동을 옹호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야만적으로 혐오했다.

역사상 어느 제국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더도 덜도 아니한 자기중심주의 국가다. 미국은 건국이념으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를 내세웠으나, 이념과는 달리 자본주의 탐욕과 야심을 위해 유색인종 살상을 멈춘 적이 없었다. 20세기 중반부터 약소국 사회주의에 대해서 혐오와 무자비한 증오만 가득했을 뿐 기독교적인 사랑과 자비와 동정심을 한 치도 베푼 적이 없었다. 미국은 자유와 평화가 가득한 에덴의 나라가 결코 아니었다. 사회주의 국가나 유색인종에게 밟아서 꿈틀거리지 않으면 더욱 짓밟는 태도가 미국의 속성이었다.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1783~1830)는 1820년대에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를 해방하고 콜롬비아공화국과 볼리비아공화국을 수립하여 미국을 제외한 ‘범 아메리카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볼리바르는 일찍이 그리고 정확히 미국의 속성을 예측했다.

“미국은…신의 섭리에 따라 자유라는 이름으로 라틴아메리카를 괴롭힐 운명인 것 같다.”

여러 역사 증거를 보면 링컨은 인류애로써 노예를 해방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익을 위해 노예를 해방했다. (제공 = 송필경)

20세기 인간인 피델과 체는 자라면서 기업이 자유로운 나라 미국이 패권을 장악한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 기업에게 자유를 빼앗긴 민중들의 비참한 현실을 분노와 연민으로 바라보았다.

'범 아메리카주의‘의 기초를 수립한 남아메리카 독립운동 지도자. 아바나 중심부 거리에 동상이 있다. (제공 = 송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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