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은 오지 않았지만
상태바
‘국가부도의 날’은 오지 않았지만
  • 박준영
  • 승인 2018.12.14 14: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역사에 말을 걸다- 2번째 이야기

크로스컬처 박준영 대표는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언론과 방송계에서 밥을 먹고 살다가 지금은 역사콘텐츠로 쓰고 말하고 있다. 『나의 한국사 편력기』 와  『영화, 한국사에 말을 걸다』 등의 책을 냈다. 앞으로 매달 2주차 금요일에 영화나 드라마 속 역사 이야기들을 본지에 풀어낼 계획이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출처 네이버영화)

 

이른바 IMF 사태는 불과 20여 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를 역사라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 생활의 많은 모습을 바꿔버린 IMF 체제의 충격은 너무나 컸고 지금도 그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점에서 현재 진행형 역사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그래서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은 지금 당장 복기하여 다시는 그런 비극적인 사태가 오지 않도록 교훈 삼아 배워야 할 좋은 교재라 생각한다.

영화 제목 처럼 ‘국가 부도의 날’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1997년 그 해는 온 나라가 파산 한 기업처럼 만신창이가 되었다. 우리는 한국전쟁 이래 가장 큰 난리를 한바탕 치러 내야만 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IMF라는 기구는 마치 점령군처럼 대한민국에 들어왔다. 구제금융의 댓가를 치러야 하는 일은 대형 재난인 A급 태풍에 쓸려가 버린 삶의 터전을 지키는 것보다 힘들었다. 잘 나갈 줄만 알았던 한국의 기업인들은 살을 에는 아픔을 견뎌야 했고 어떤 이는 결국 좌절하여 목숨을 끊는 도리 밖에 없었다.(그해 자살률은 다른 해에 비해 3배나 높았다.) 

한국경제가 어떻게 일 순간에 이렇게 망가질 수 있었을까? 대체 1997년에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런 사태가 생기도록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20년이 지난 지금 짧았지만 그러나 너무나 길었던 그 순간을 영화는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극적으로 되살아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지금 한창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이례적으로 현역 국회의원이 영화 관람 소감을 SNS에 올렸다. 민주평화당 유성엽(전북 정읍 고창)의원은 자신의 페이스 북을 통해 이 영화는 ‘좋은 영화’나 ‘바람직한 영화’는 결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글의 요지는 이렇다. 실제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은 경상수지 적자로 인하여 외환이 고갈되어 발생한 재앙으로 재정지출을 팽창시킨 정책이 ‘국가부도의 날’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인데도 신자유주의자들을 외환위기의 원흉으로 끌어들였다며, 진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한 책임자들, 즉 김영삼 정권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영화지만 새빨간 거짓을 관객들에게 전달해서는 안되며 이런 어이없는 오독은 또 다른 ‘국가 부도의 날’을 일으킬 것이라 하였다. 과연 그럴까? 자 한 발 더 들어가 보자.

한국전쟁을 치르고 난 대한민국 경제는 쑥대밭이었다. 우리는 당시 필리핀보다 못 살았고 북한 인민들보다 더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최빈국의 국민이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수출주도 정책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단 시간에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수출 100억불 달성 기념 시상식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정치적 격변과 독재 정치를 겪으면서도 80년대 3저 호황 덕에 우리는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었고 국민소득 2만불 시대에 진입하여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불릴 정도로 경제 규모는 성장하였다.

시장은 돈이 넘쳐 흘렀고 국민의 85%는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믿고 살았다. 그러나 비정상적 경제운영은 경제의 펀더멘털을 취약하게 하였고 결국 한국경제의 뇌관은 1997년에 기어코 터지고 만다. 방만한 외환관리는 환율 800원을 단 일주일 방어하기 위해 정부가 약 20억 달러를 쏟아 부어야 했고 한보 같은 기업은 금융권에 뇌물을 먹여 대출 은행의 자산보다 많은 금액을 받을 정도로 악성 차입경영이 비일비재 했다. 순간 외국 투자자들이 한국의 신인도를 의심하면서 단 한번도 멈추지 않았던 한국경제의 엔진이 불시에 꺼져 버린다.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대한민국이 최대 호황기를 누렸던 그때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의 보고서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대한민국 국가부도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이라며 한국은행 총재(권해효)에게 한시 바삐 비상대책팀을 꾸릴 것을 종용한다. 한반도 역사상 처음 맞는 국가 부도 위기는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되는데 대통령 면담 전 경제수석은 보고는 최대한 쉽게 해달라며 신신당부한다.

어려우면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일까? 당시의 대통령은 김영삼이었다. 참담한 보고를 들은 대통령은 우리 경제의 펀드멘탈이 그동안 좋다고 하지 않았느냐 질책하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고는 한 마디를 내뱉는다. “이대로 잔치는 끝난 건가?”

뒤늦게 청와대 수석과 경제국 차관(조우진), 그리고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이 하나가 되어 비공개 대책팀을 꾸리지만 내부 이견으로 바람 잘 날 없다. 차관은 지금 사태를 국민들에게 비공개로 하자고 못을 박지만 한팀장은 더 많은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솔직하게 국민들에게 털어 놓자고 주장하나 일언지하에 묵살 당한다. 비상대책팀은 기자회견에서도 한국경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브리핑 한다. 마치 한국전쟁 당시 절대로 서울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거짓말이 오버랩되는 장면이다.

영화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위기를 막으려는 자, 위기에 투자 하려는 자, 위기를 고스란히 온 몸으로 맞으며 버티는 자로 나눠진다. 한국경제의 위기를 감지하고 잘 다니던 회사에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더니 투자자를 끌어 모아 대박을 노리는 윤정학(유아인)은 국가 부도의 위기를 이용해 역배팅을 지른다.

(출처 네이버영화)

실제 IMF 당시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자들은 술자리에서 건배사 ‘위하여’ 대신에 ‘이대로’를 외쳤다고 하지 않던가? 윤정학의 위기에 투자하겠다는 확언에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반신반의 하지만 몇몇은 그와 함께 한다. 결국 그들은 몇 배 아니 몇 십 배의 투자 이익을 거둔다.

살인적 경제 파국에 죽어 나는 사람은 중소기업과 서민들이다. 관객들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이입이 되는 인물이 갑수(허준호)다. 작은 공장을 어렵게 운영하면서 미도파 백화점에 납품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는 그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행복해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미도파의 부도로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해 파산하고 동업자 친구는 구속된다.

설상가상 자신을 끝까지 믿어 주었던 거래처 사장은 갑수가 결제를 하지 못하는 바람에 자살의 길을 택하고 만다. 갑수도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어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나 문득 눈에 들어오는 건 그저 자식들의 낡고 더러운 운동화였다.

국가부도까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대책팀 내부에선 대책을 놓고 대립한다. 이제 영화는 핵심을 향해 달려간다. 정부와 한시현팀이 해결 방안을 놓고 각을 세우고 급기야는 IMF 총재(뱅상 카셀)가 한국정부와 협상을 위해 비밀리에 입국한다. IMF 협상팀에 미 국무부 재무차관이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 시현은 미국정부가 이번 기회에 한국의 알짜 기업을 손쉽게 먹으려는 의도로 보고 문제제기를 해 보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한국은 IMF 관리체제로 들어간다. 기업으로 치면 법정관리에 처하게 되는 국치의 순간이다. 우리는 ‘경제신탁통치’라는 굴욕적인 사태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한시현의 주장대로 우리는 IMF로 가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한시현은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지만 그렇게 설득력이 있진 않았다. 공허하다고 해야 할까? 중요한 것은 IMF로 가느냐 마느냐가 아니며 ‘그런 사태를 왜 우리는  막지 못했으며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것이냐’이다.

영화의 캐스팅은 대체로 후한 점수를 줄 만하다. 먼저 통화정책팀장으로 나오는 김혜수의 연기는 물 만난 고기의 모습이다. 워낙 극 중 역할에 몰입하는 배우로 유명하며 장면의 디테일까지 연구하고 공부한 티가 역력하다. 김혜수는 인터뷰에서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고 누군가는 꼭 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고 했다.

(출처 네이버영화)

다른 배우들의 열연도 좋았지만 특히 눈에 띠는 배우는 갑수역의 허준호였다. 감정에 오버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역에 충실하면서도 관객의 마음을 훔쳐냈다. IMF 총재역의 뱅상 카셀 역시 출연하는 장면은 많치 않았지만 씬 스틸러로서 충분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실제인물인 미셀 캉드쉬(Michel Camdessus)는 영화처럼 곧바로 청와대를 방문하고 대통령 후보들에게 협약을 요구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대통령 후보들에게 협약을 이행하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굴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합의문 이행각서에 서명했다....(중략)..그들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했다. 물론 IMF 뒤에는 미국, 일본 등 보이지 않는 손들의 압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관 제공의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영화는 실제 뉴스 장면과 기업 실명을 거론하면서 다큐적 편집 기법으로 현실감을 높혔다. 실제 경제학 전공자인 시나리오 작가의 전문적 지식도 빛을 발한다.

IMF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혹자는 헬조선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무한정 구조조정의 가능성이 열렸고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활개치기 시작한 원년이라는 것이다. 완전고용은 없어졌고 2%의 자연실업률은 7%까지 치솟았다. 실질임금이 줄어들면서 빈부 격차는 더욱 커졌고 서울의 아파트 가격은 지방과의 격차를 더욱 벌렸다. 순진한 국민들은 어떡하든 IMF 체제를 빨리 극복하기 위해 금모으기 운동에 나섰다. 이걸로 500억 달러의 빚 중 23억 달러의 기업 빚을 대신 갚았다. 매번 국민들의 세금으로 기업들의 부실 채권을 막는 악습도 생겨났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우리는 다행히 IMF를 조기 졸업했다. 영화는 세 사람의 현재 모습을 에필로그로 보여준다. 한시현은 시민단체 금융감시 대표로 여전히 소신껏 일하고 있다. 까마득한 한국은행 후배가 그녀를 찾아와 도와 달라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문제가 있나보다.

윤정학은 대형 투자사의 오너가 되어 고층빌딩의 주인이 되어있다. 세계경제의 허점과 사람들의 욕망의 틈새를 노리는 기업 사냥꾼으로 잘 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지금의 20대가 가장 되고싶은 인물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응원했던 주인공 갑수가 가장 궁금하다. 다시 어떡하든 재기를 한 모양이다. 여러 명의 외국 노동자를 두고 공장을 돌리고 있다. 갑수 아들은 어렵게 들어간 직장의 첫 출근 날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다. 갑수는 아들에게 신신당부 한다. “절대로 남을 믿지 말고..너한테 잘 해 주는 사람 믿지 말고..오직 너만을 믿어라.”

영화가 끝나갈 무렵 인상적인 장면이 머리에 떠 오른다. IMF 체제가 시작되자 각 학교마다 IMF 극복 방안에 대한 홍보영상 교육을 하였다. 초등학생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화면을 보고 있다. 거기에는 학용품 아껴쓰기, 전기 절약하기, 국산품 애용 등이 보여진다. 허..참...참았던 욕지기가 올라온다.

자 다시 글의 맨 앞으로 돌아가서 보면 유 의원의 얘기의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경제정책의 책임자도 IMF의 원흉이며 외국의 무자비한 투기 자본(여기서는 신자유주의라고 하자)의 탐욕도 가해의 책임 반은 나눠 가져야 맞다. 따라서 우리 국민들이 IMF에 대한 죄책감 따위는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와 신자유주의가 다시 만난다면? 그래서 영화의 클로징 나레이션은 더욱 무섭게 다가온다. “20년 전과 지금...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위험해졌다고 단언한다.”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는 어느 칼럼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남은 인생에 보고 싶지 않은 것 두 가지가 있다. 전쟁과 그리고 IMF 경제위기라고... 나 역시 그렇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