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병원 앞 제주의 ‘봄’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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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지’병원 앞 제주의 ‘봄’은 오지 않았다
  • 건강과대안
  • 승인 2019.02.2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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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대안 칼럼] 건강과대안 김관욱 운영위원

“여러분,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2018년 제주4.3항쟁 70주년 추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선언했다. 제주시민들에게는, 특히 가족 중 희생자가 있는 시민들에게는 벅찬 순간이었을 것이다. 당시 4.3항쟁의 희생자가 약 3만 명(제주도민이 30만여 명일 때)에 달했다 하니,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공안의 감시 하에 빨갱이라는 낙인과 연좌제에 대한 불안감으로 부모, 형제에 대한 제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왔겠는가. 이제서야 청정 제주의 꽃이 영혼까지 만개할 거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대통령의 선언처럼 제주에 ‘봄’이 도래한 것일까. 제주도민에 ‘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들이 고대하던 ‘봄’은 단지 그들에게만 필요한 것인가.

지난 해 연말부터 다시금 제주도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겨울에 고대하던 ‘봄’ 소식과는 거리가 멀다. 2018년 12월 5일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2개월 전 전달된 시민들의 ‘숙의’(숙의형 공론조사위원회의 개설 불허 의견)를 거스르고 중국 녹지재단이 세운 ‘녹지병원’(47병상)의 최종 허가를 선언했다. 원희룡 지사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제주의 미래를 걱정해 ‘고심’ 끝에 ‘불가피한’ 선택을 했음을 ‘품격’을 지키며-어려운 결정이었음을 표정으로 강조하며-전달했다. 반면, 그 자리에서 “거짓말 하지 마십시요”라며 항의하던 한 시민이 관계자에 의해 곧바로 끌려 나갔다. 시민은 원희룡 지사가 “일부에서 염려하시는 건강보험 등 국내 공공의료체계에는 영향이 없습니다.”라는 발언에 항의했다.

그가 말한 ‘일부’에는 숙의형 공론조사위원회에 참여한 제주시민은 포함되지 않은 것인지, 공공의료체계는 한 명의 도지사가 책임지고 지킬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마치 책임을 ‘죄송하다’는 말 정도로 가볍게 보는 것처럼 들렸다. 확실한 것은 시민의 반대 주장은, 그리고 그 시민은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도지사의 공적인 의례가 시행되는 성스러운 곳에 마치 불경스런 존재처럼 취급당했다. 난 그 시민의 절규가 힘에 의해 저지당하는 모습을 보고 사실 절망스러웠다. 2018년 4월 3일 벅찼던 그 가슴은 온데 없고 또 다시 제주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인가하고 말이다.

시민의 민주적 의견과 항의를 외면하는 것, 그 대가는 그 어떤 것으로도-특히, 경제적 이윤으로는- 보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제주 녹지병원 사태는 주목해야 마땅하다. 물론 현 사태가 경제활성화라는 미명 하에 투자자한테 의료 영역의 문을 위험스레 열어주고, 그로 인해 그나마 의료비상승을 통제하고 있던 국민건강보험 체계가 민간보험회사의 거대한 마케팅에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주목해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 당장 간과해서는 안되는 ‘외면’이 있다. 원희룡 도지사가 고향시민들이 ‘숙의’ 기간을 거쳐 제시한 민주적 의견을 ‘염려 끼쳐 죄송하다’는 말로 철저히 외면했다는 사실이다. 시민들의 대의를 대변하라고 뽑아주고, 그래서 의견을 모아 전달까지 했음에도 단 한 번의 기자회견으로 뒤집은 일은 그 어떤 질병 못지않게 시민들을 절망스러운 고통에 빠지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수십 년간 ‘빨갱이의 섬’으로 억울하게 감시 받아왔던 제주시민들에게는 더더욱 큰 아픔일 것이다. 시민들의 ‘숙의’가 한 명의 도지사의 그것보다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은 그 전달 방식이 아무리 예의 바르다 하여도 지극히 폭력적이다.

미국 인류학자 아서 클라인만(Arthur Kleinman)은 ‘질병’을 넘어 ‘사회적 고통’에 주목해야 함을 주장해왔다. 그는‘의학’적 시선을 넘어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힘에 의해 초래된 복합적 결과물로서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주도의 ‘녹지국제병원’은 고급의료서비스 제공을 지향 할지 모르나, 그 설립 과정만으로도 시민들에게 커다란 사회적 고통을 초래하고 있다. 시민의 ‘숙의’는 제도와 정치, 그리고 경제의 힘에 의해 쉽게 외면당할 수 있다는 현실에 의해서 말이다.

원희룡 도지사의 기자회견 자리에서 끌려나간 시민의 모습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 신분에 의한 ‘분류체계’가 굳건히 작동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 체계에 의해 있어야 할 장소가 정해져 있고, 그곳을 벗어나면 ‘오염원’(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의 표현을 따른다면)으로 취급받는 것 말이다. 시민은 기자회견 장소에서 순식간에 말끔히 ‘청소’됐다. 시민은 자신의 공간에 있을 때만 ‘깨끗한’ 사람인 셈이다. 이렇듯 병원 진료실 안에서도 병원 밖에서도 시민들의 아픔의 호소는 ‘전문가적’ 의견에 의해 외면당하기 쉽다. 의학적이든, 행정적이든, 경제적이든 시민은 아직까지 많은 경우 부족한 존재로 여겨진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봄’을 기대했던 제주에서 한겨울에 또다시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제주, 그 청정 지역이 왜 대한민국을 『하얀정글(송윤희 감독, 2011)』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의 이윤추구 경쟁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다큐멘터리의 제목이기도 하다)로 오염시키는 진원지가 되어버렸는가. 왜 그 오욕을 또다시 제주시민들이 뒤집어써야만 하는가.

정치와 경제 논리에 의해 ‘병원’설립이 사회적 고통을 유발한 비근한 예가 있다. 2017년 9월 5일 서울 강서지역 장애인특수학교를 요청하는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은 사진을 기억해보자. 2013년 11월 공진초등학교가 폐교된 자리에 서울시 교육청이 특수학교 설립을 예고했음에도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이 지역주민에게 장애인특수학교 대신 ‘국립한방병원’을 설립하겠다고 공약을 내걸었다. 병원의 설립이 가져다 줄 경제적 이득 앞에 결국 장애인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학업권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 “저거 다 연기야”를 외치며 비난하는 지역주민들 사이로 김성태 의원은 ‘유유히’-문자 그대로- 퇴장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의 녹지병원 허가 기자회견과 많은 부분 닮아 있다. 장애인의 몸은 지역의 경제적 가치-땅값-를 떨어뜨리는 불경한 존재다. 그 ‘땅’에는 이윤을 가져다줄 대형병원과 의료소비자들만이 청결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마찬가지로 녹지병원이 설립된 제주의 서귀포시 헬스케어타운 ‘땅’ 안으로 불경한 제주도민과 공공의료시설은 들어갈 수 없다. 오직47명의 외국인 환자(병상을 기준으로만 본다면)만이 신성스럽게 환대받는다.

이번 제주 녹지병원 사태는 한국사회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도덕관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단순히 투자와 법적 책임 등의 현안을 넘어선다. 또한 병원이 영리 목적을 지녀야 하는지 그렇지 말아야 하는지를 넘어서는 이야기다. 시민들은 이미 이 사안에서 암묵적으로 무엇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주요한 도덕적 가치인지를 체감했을 수 있다.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시장자본주의에 손쉽게 상처받을 수 있고, 그것이 공공연히 ‘품격과 배려’의 얼굴을 하고 백주대낮에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또한 그들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이러한 사회적 ‘바이러스’에 의해 병들고 있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시민들이 ‘고통스럽게’ 외치고 싸우는 것을 목격했다.

진정 사회의 ‘간병인’ 역할은 언제까지 시민들의 몫이어야만 하는가. 세금을 내고, 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정말 부족한 것인가. 영리병원의 개설은 어찌 보면 시민들에게 사회가 여전히 촛불의 힘으로도 치유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확산시키는데 있어 치명적 숙주가 될 가능성이 있다. 언제 전국으로 확산될지 모를 일이다.

이제 다시 되묻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님, 제주의 봄은 진정 올 수 있겠습니까? 제가 생각한 봄과 대통령님의 봄은 다른 것이었습니까?” 마칩니다.  

김관욱(의료인류학자, 가정의학전문의, 건강과대안 운영위원)

*본 원고는 원작자의 요청으로 한겨레에 동시 게재됐음을 알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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