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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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 송필경
  • 승인 2019.03.19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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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Santa Ifigenia Cemetery)에서 죽음 뒤에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은 최고 권력자

 

아니, 이럴 수가?
어쨌든 1959년부터 49년 간 의심할 바 없는 절대 권력을 행사했고, 2008년에 권력을 넘기고 나서 2016년 사망할 때까지 ‘헤페 막시모(Jefe Maximo; 최고지도자)’라 불리던 권력자의 죽음 뒤의 흔적이 이렇게 단순한가?

고작 두세 평 크기의 둥글고 납작한 바위만 달랑 세워 놓은 것이 무덤이었다. 바위 한 가운데에 쑥색 바탕의 금속판에 금색 알파벳 5자 만 있다. 더 이상 장식이나 문구가 없다.

FIDEL

이 금속판 뒤에 사각형 홈이 파여 있고 그 곳에 화장한 유해를 안치했다고 한다.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에 있는 피델 카스트로(Fidel Alejandro Castro Ruz; 1926∼2016)의 무덤 모습이다.

카스트로의 무덤 모습

1953년 7월 26일, 27세 젊은 변호사 피델은 이 묘역에서 불과 10여분 거리에 있는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가 실패하고 산으로 도피하다가 8월 1일 잡혔다.

즉결 처형당하거나 살인적인 고문을 받지 않고 재판에 넘겨진 것은 쿠바혁명을 위해 기적이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취조 중에 배후가 누구냐를 캐묻는 질문에 피델은 당당히 말했다.

“나의 배후는 바로 호세 마르티다!”

취조 받는 모습, 호세 마르티의 사진 앞에서. (제공 = 송필경)

호세 마르티는 1853년 태어나 1895년 죽은 인물이다. 다시 말해 피델이 태어나기 31년 전에, 1953년 당시로 보면 58년 전에 죽은 인물이다.

우리나라에서 경찰, 검찰, 정보기관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 인사를 잡으면 모진 고문으로 배후 조작에 힘을 썼다. 배후를 어쨌든 빨갱이로 엮기 위해서였다. 거짓 실토에 이르게 까지 악랄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이럴 때 배후자를 억지로 강요받는 연행자가 “내 배후는 녹두 장군 전봉준이다!”, 또는 “내 배후는 전태일이다!”라고 했다면 고문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피델이 배후자를 ‘호세 마르티’라고 말 했을 때, 아마 쿠바의 심문관들은 피델을 돈키호테로 생각하고 코웃음을 치지 않았을까, 그 어처구니없는 돈키호테 말이다.

피델이 자신 행위의 정당성을 위대한 선배의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일화에서 뿌리 깊은 나무가 튼튼하듯이 쿠바 혁명의 단단함을 느꼈다. 피델의 쿠바에서는 과거 신념을 무시할 수 없었고, 과거 신념은 무시당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부럽고 긍정적인 전통이었다.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괴뢰 독재의 탄압에 저항하는 혁명의 당위성은 모든 억압받는 시대를 관통하는 궁극적인 이상(理想)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마세오 혁명 광장에서 불과 5분 정도 가서 버스에서 내리니 깔끔한 담장이 있어 그 어떤 성지(聖地)라는 느낌이 확 다가왔다. 정문을 통과하여 조금 들어가니 경비원 복장을 한 사람들이 더 이상 들어가는 것을 통제했다. 통제선 저 너머에 파란 바지에 빨간 윗도리에 파란 머플러를 걸친 많은 청소년들이 어떤 행사를 치르고 있는 듯이 보였다.

가이드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호세 마르티와 카스트로의 무덤이 있는 묘역이라고 했다.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 입구 모습 (제공 = 송필경)

경비원들이 막고 있는 곳의 100m 정도 앞에 6각형 형태의 8층(?) 정도 되는 높이의 기념탑이 있는데 그 안에 호세 마르티의 묘지가 있다고 했다. 멀리서는 잘 안 보이는 작은 바위를 가리키며 카스트로 묘지라 했다.

쿠바혁명의 정체성을 대표한 선배와 쿠바혁명을 완수한 후배의 사후 흔적을 한 번에 볼 수 있어 마음이 들떴다. 그러나 경비원은 일반인 접근을 막았다. 가이드를 통해 멀리서 온 외국인이어서 관람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어림없었다. 행사가 언제 끝날지 몰랐다. 그러니 가이드는 다음 행선지로 가자고 했으나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고 하니, 가이드는 30분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경비원의 통제선을 뚫지 못해 애타는 마음으로 여러 궁리를 하며 얼마간 어슬렁거렸다. 어느 순간 의장대 의식이 열리며 행사가 끝나는 것 같이 유니폼 입은 청년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4번 청소년 운동 선수들이 단체로 참배를 왔다. (제공 = 송필경)

드디어 호세 마르티 묘지 가까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묘지가 있는 기념탑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곳은 아직 통제하고 있었다. 다만 카스트로 묘지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피델의 바위 정면에서 보면 뒤쪽 왼편에는 호세 마르티의 웅장한 기념관 묘지가 있고 오른편엔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에서 숨진 혁명가들의 화려한 기념비가 있었다. 카스트로 묘지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달랑 바위 하나뿐이었다.

왼편부터 호세 마르티 시신이 있는 기념탑, 피델의 작은 바위 묘,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에서 숨진 용사들의 기념비. (제공 = 송필경)

죽은 뒤에도 권위를 누리기 위해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세웠고, 중국의 진시황은 거대한 지하 궁전 무덤을 팠다.

20세기에서도 피라미드나 사후 궁전이 많다. 내가 본 대표적인 곳이 터키 수도 앙카라에 있는 아타튀르크 기념관과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있는 호찌민 영묘다. 그러나 터키의 아타튀르크나 베트남의 호찌민은 과거의 강력한 지배자가 스스로 무덤을 만든 것과 달리 국부로 숭상하는 국민이 성원하여 기념관과 영묘를 만들었다.

아타튀르크(Kemal Atatürk; 1881~1938)는 이슬람 신정(神政)체제에서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 터키의 혁명가이자 초대 대통령이다. 1920년대에 여성의 이슬람 복장을 폐지했고 나아가 남녀교육평등권을 시행했다. 여성을 세상과 분리하는 장막인 히잡을 고집하는 여성에게만은 대학 문에 빗장을 걸을 정도로 세속적인 변화를 강력하게 추구했다. 이슬람 전통인 일부다처제를 일부일처제로 법으로 확립했으며, 1930년대에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는데 당시 아랍 사회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획기적 혁명적 조치였다. 아타튀르크는 급사함으로써 유언을 남기지 않았으나, 수도 앙카라 시내 어디에서도 잘 보이는 중심부 언덕에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본뜬 그러나 그 보다 더 웅장한 기념관을 후배들이 세웠다.

터키 앙카라에 있는 국부로 추앙 받는 케말 아타튀르크 기념관.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제공 = 송필경)

호찌민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인간이 자만에 빠져 흔히 날조하는 지배자의 신화적인 이미지를 아예 만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쏠리는 개인숭배를 막기 위해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서 그저 조국 땅에 여기저기에 뿌리고 그곳에 나무를 심어달라고 유언장으로 신신당부했으나, 그를 흠모하는 후배들은 간절한 유언을 어기고 그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근엄한 영묘에 잠들게 했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있는 호찌민 영묘. 참배객이 항상 만원을 이룬다. (제공 = 송필경)

1922년 중반 이후 레닌은 몇 차례 뇌졸중을 일으키며 의식을 점차 잃었다. 1924년에 레닌이 사망하자 시체를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미라로 만들어 레닌을 일종의 성인으로 떠받들었다. 레닌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기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 동지였던 아내 크룹스카야는 그런 식으로 레닌을 찬양한 것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촉구했기 때문이다.

“레닌 기념관을 건립하지 마십시오. … 레닌은 평생토록 그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블라디미르 일리치의 이름을 기리고 싶다면 탁아소. 유치원, 주책. 학교, 도서관, 보건소, 병원, 장애인 복지관 등을 건립하시고, 무엇보다 그의 권고를 실천에 옮기십시오.”

레닌의 시신을 미라로 만든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레닌 영묘. (제공 = 송필경)

20세기 위대한 혁명가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자신의 뜻이었건 아니었건 간에 웅장한 기념관에 안치되어 있고, 때로는 미라가 되어 있다. 피델은 존경했던 선배들의 이런 모습만은 단호히 거부했다.

2016년 4월 쿠바 공산당 전당대회 폐회식에서 피델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나는 곧 90살이 된다. 다른 사람과 같아 질 것이며 시간은 모두에게 찾아온다.”

2016년 11월 26일, 90세에 모든 나이 먹은 인간이 그렇듯 피델은 눈을 감았다. 죽음 앞에서 지혜롭게 겸손했다. 인간 피델이 단 하나 낸 욕심이라면 그토록 존경했던 호세 마르티의 잠자리 곁에 누운 것이다, 허세 없이 가장 소박하게!

자신의 몸을 뒤로 물러서 낮추지만 그 몸은 도리어 앞선다.

즉 “후기신이선신(後其身而身先)”은 인류의 놀라운 지혜서인 노자 도덕경, 그 7장에 나오는 경구다.

자신의 몸은 뒤로 한 처세(後其身)는 카스트로의 특질이었다고 나는 본다. 쿠바 전역에서 자신의 조형물은 하나도 없지만 선배이자 영원한 스승 호세 마르티와 후배이자 혁명동지인 체 게바라의 형상은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카스트로는 왜 자신보다 호세 마르티와 체 게바라를 앞세웠을까? 쿠바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 한참 동안 내가 품은 화두였다. 이 화두를 내 나름대로 풀자 ‘카스트로의 쿠바혁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관점이 생겼다. 카스트로는 권력을 행사했지만 절대 권력자가 흔히 저지르는 우상화에 집착하지 않았다. 헛된 명예를 앞세우지 않고 뒤로 물러섰기에 오히려 역사의 이름은 날이 갈수록 빛을 더 발하지 않을까?

로동신문의 카스트로 추모 글 (제공 = 송필경)

1953년 7월 26일 아침, 27세 젊은 변호사는 독재정권에 깊은 분노를 느끼며 법 대신에 총으로 정권 전복을 기도했다. 그러나 30분 만에 처참하게 작전 실패하고 산으로 도망했으나  6일 만인 8월 1일에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에서 젊은 변호사는 조국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목격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심장의 피와 진리의 골수’로 이룬 말로 스스로 변론했다.

“결과에만 관심이 있다면 반란자가 되고 애국자가 된 것을 후회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가슴 속에 같은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 결코 고립되지 않습니다. 감옥의 벽이나 묘지의 잔디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한 가지 기억, 한 가지 정신, 한 가지 사상, 한 가지 양심, 한 가지 존엄성이 우리 모두를 떠받칩니다.“

피델이 말한 ‘한 가지’의 의미는 “동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정의는 군대보다 강하다.”란 신념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민중이란 영합하는 사람들, 즉 어떤 억압적 정권이나 독재, 혹은 전제 정권이라도 환영하며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머리를 숙이는 보수 집단이 아닙니다. 우리가 투쟁을 얘기할 때의 민중이란 모든 이가 뭔가를 약속해 주고 속이는 존재, 하지만 전혀 보상받지 못한 광범한 대중을 의미합니다. 또 더 나은, 더 존엄한, 더 정의로운 국가를 열망하는 민중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랫동안 불의와 모멸로 고통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중대하고 현명한 변화를 갈망합니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뭔가를 신뢰하면, 특히 자신을 신뢰하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민중을 말합니다.”

몬카다 병영 습격하기 전부터 피델은 혁명의 구체적 목표를 이미 설정하고 있었다.

“토지, 산업화, 주거, 일자리, 교육, 국민 보건, 이 여섯 가지 문제는 우리가 국민의 자유, 정치적 민주주의의 회복과 동시에 이를 해결위해 즉각 조치를 취할 것들입니다.

우리는 사탕을 수입하기 위해 설탕을 수출하고, 신발을 수입하기 위해 가죽을 수출하며, 쟁기를 수입하기 위해 철을 수출합니다.

자본주의자들은 노동자가 계속 절름발이의 족쇄를 차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국가는 수수방관만 하고 있고 산업화는 언제 달성할지 알 수 없습니다.

국가가 집세를 내리려 하면 지주들은 모든 공사를 중지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집세를 높게 유지하지 않으면 나머지 인구가 비바람을 맞으며 살더라도 그들은 벽돌 한 장 놓지 않을 것입니다.

공공시설(수도, 가스, 전기 등)의 독점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들은 이윤이 보장되는 한 선을 확장할 뿐, 사람들이 일생 동안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국가는 수수방관하고 국민들에게는 집도 전기도 없습니다.

교육제도는 국가의 나머지 상황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카스트로는 혁명으로 집권한 후 여섯 가지 문제 가운데 산업화와 일자리를 제외한 문제를 거의 완벽하게 해결했다. 두 문제는 미국의 야비하고도 잔인한 경제봉쇄 조치로 어쩔 수 없이 해결하지 못했다.

미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한 5시간 동안의 최후 변론은 참으로 유려했다. 자신의 박학다식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변론이 막바지에 이르자 ‘법의 정신’의 저자 몽테스키외, 중국의 군주제, 고대인도 철학자,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로마의 공화정,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틴 루터, 존 밀턴 등을 언급했다. 그리고 토마스 페인, 루소 같은 계몽 사상가들의 어록을 인용하고, 미국독립선언문과 프랑스대혁명의 의미를 거론하고, 쿠바의 영원한 스승 호세 마르티에게 존경심을 나타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장엄한 신념의 사자후를 변론 마지막에 외쳤다.

“나에게 유죄를 선고하시오, 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에게 무죄 판결을 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위대한 소크라테스의 최후 변론인 ‘변명’에 버금가는 감동이었다. 이 마지막 외침은 70년대와 80년대 우리 민주화 투쟁으로 법정에 선 수많은 투사들도 재판관 앞에서 되뇌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삶에서 정치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되도록 고귀한 정치를 이상으로 삼지만 인간세상 현실에서는 각 인간의 욕망이 제각각 이기적으로 흐르기 마련이기 때문에 정치도 속물적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 이기적 욕망은 천박한 정치를 낳기 마련이고, 천박한 정치에서는 절실한 철학적 언사를 찾기 힘들다.

아무리 고상하더라도 철학만으로 정치를 이끌어 갈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적 성공 여부를 떠나 그리운 정치인은 나름의 철학을 말해 온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인으로서 비극적 최후를 맞은 노무현을 우리 사회 많은 사람이 잊지 못한다고 본다. 정치 시각의 얼마간 결점과 정치적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말이다.

삶의 본연에서 절실한 시대 과제를 고민한 철학을 구체화하는 자세야말로 정치가의 올바른 의무일 것이다.

역사의 도덕적 평가를 항상 염두에 두는 정치인, 마치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자신의 신념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실천한 정치인을 나는 존경한다. 카스트로는 그러했다.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는 산티아고 데 쿠바의 서쪽 끝 평온한 곳에 있다. 이 묘지는 아바나의 국립묘지(Necropolis Cristobal Colon) 다음으로 크고 중요한 묘지다. 면적은 약 4만평 이다.

1868년에 처음 만든 이 묘지는 독립전쟁 희생자와 동시에 대규모 발병한 황열병 사망자가 잠들어 있다. 8천여 기 묘에는 여러 역사적 거물들이 잠들어 있는데 호세 마르티를 비롯해 초대 대통령 토마스 에스트라다 팔마, 유명한 럼주 일가의 에밀리오 카르디 모레아우, 독립 영웅 안토니오 마세오의 미망인이자 마리아나 그라할레스 마세오의 어머니인 마리아 그라할데스, 독립투사 장성 31인 가운데 11인, 로마 산 후안과 카네이 전투에서 전사한 스페인 병사들, 1953년 몬카다 병영 공격 때 사망한 이른바 ‘순교자’들, 7월 26일 운동의 투사였던 파이스 형제, 쿠바 독립의 아버지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 부에나 비스타 사교 클럽의 자랑이자 국제적 인사 겸 유명 음악가 콤파이 세군도 등이 있다.

무엇보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국가적 영웅 호세 마르티의 묘에 행하는 종교에 가까운 의식이라 할 수 있다. 1951년 바티스타 시절에 만든 이 묘에는 인상적인 육각형 구조물이 있어 매일 이 통로로 (쿠바 국기만을 걸친) 마르티의 목관에 햇살이 비친다. 이는 반역자로서 어둠 속이 아닌 해를 마주하며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쓴 그의 시에 대한 화답이다. 그의 묘를 24시간 지키는 경비원은 30분 간격으로 화려한 의식을 치르며 교대한다.

콤파이 세군도는 쿠바 음악의 거장이자 만인의 연인이었다. 호세 마르티는 쿠바 혁명 영웅이자 시인으로 아직도 쿠바인의 가슴에 깊이 살아있다. 에밀리오 바카디는 바카디 럼을 만들어 성공했고 산티아고의 시장을 지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이곳 산타 이피헤니아에 묻혔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조각 공원을 연상케 한다. 1979년 국가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입구 왼쪽에 특별히 마련된 호세 마르티의 무덤이다. 그의 묘지 위엔 쿠바가 그에게 보내는 애정과 경이가 잘 표현되어 있다.

정면에서 본 호세 마르티 기념탑 (제공 = 송필경)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의 설명에서 내가 가장 기묘하게 느낀 점은 호세 마르티의 기념탑을 친미괴뢰 앞잡이인 바티스타가 만들었다는 점이다. 19세기 인물 호세 마르티는 20세기가 되면 미국이 라틴아메리카를 집어 삼킬 제국주의 괴물이 되리라는 것을 가장 먼저 그리고 정확히 예측했다. 미국제국주의의 앞잡이 독재자가 미국제국주의 척결을 주장한 호세 마르티를 기념물을 세웠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잘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우리 처지에서 친일파 이승만이 동학혁명의 주인공으로 일본의 총칼에 스러져 간 녹두장군 전봉준을 진심으로 기리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20세기 초 중국의 혁명가 쑨원(孫文; 1866년 1925)은 이념적 철천지원수인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뚱 양쪽 모두에게 국부로서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남북 베트남에서 이념적으로 치열하게 다투는 거대한 전쟁에 휩싸였으면서도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은 남베트남의 일반 인민은 물론 정치인들에게서까지 존경을 받았다.

극단적 이념에 치우친 한반도는 남에서 존경받는 인물은 북에서는 죽일 놈이 되었고, 북에서 추앙하는 인물은 남에서는 역시 죽일 놈이다. 우리 남과 북은 굴절률이 극단적으로 다른 렌즈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분단이 낳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 가운데서 가장 부끄러운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를 번개에 콩 볶듯 구경하고 나오는데 묘역 입구에 다음과 같은 구호가 적혀 있었다.

PATRIA ES HUMANIDAD

쿠바 혁명의 품격을 느끼게 하는 구호. (제공 = 송필경)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단어 뜻이 이렇다.
patria=조국, es=…이다, humanidad=인류

스페인어 해석 방법 순서를 몰라 ‘조국이 인류’인지, ‘인류가 조국’인지는 그렇다 치고, 이런 표어를 내 걸 수 있다는 게 쿠바혁명의 품격을 말해주는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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