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연 20기 진료단은 이번에도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과 마주했다.
지난 17일 오전에는 뇨(Nho) 할아버지 방공호 학살 사건 피해자 유가족 응우옌 떤 꾸이와 함께 주이쑤옌현 통합위령비와 학살 피해자를 모신 사당을 찾아 향을 피우고 사죄했다.
오후에는 퐁니마을 위령비를 찾아 참배한 후, 퐁니‧퐁넛 민간인 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탄의 목소리를 통해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들었다.
또한 평연 20기 진료단은 ‘베트남과 한국에서 진실을 찾는 여정, 그리고 만남의 기억 말하기’ 좌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하미학살 사건 생존자 응우옌 티 탄이 자리를 함께했다.
민간인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떤 꾸이와 두 마을의 응우엔 티 탄은 힘겹게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당시의 기억을 평연 20기 진료단에게 전해줬다.
“그날의 진실과 역사를 알려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굳은 믿음 아래, 그들은 탄식과 눈물로, 때론 숨을 삼키며 사랑하는 이들을 눈 앞에서 잃은 기억을 다시금 되새겼다. 수백만 번도 더 잊고자 했을 그 날의 기억과 고통을 다시금 찢고 헤집어내 토해냈다.
이번에는 지난 17일 오후, 평연 20기 진료단이 만난 퐁니‧퐁넛 학살사건 생존자 응우옌 티 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편집자 주-
“사건이 벌어진 날은 1968년 2월 12일이다. 나는 1960년생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당시 15살인 오빠, 11살배기 언니, 5살된 남동생과 같이 살고 있었다. 사건이 있던 날은 장사를 하던 어머니는 시장에 가서 집에 안계셨고 우리를 돌봐주던 이모와 사촌동생이 같이 있었다. 그날 아침, 총소리가 들려오자 이모는 우리를 방공호로 들여보내고 같이 숨었다. 방공호 안에서 바깥의 총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한국군은 우리집으로 들어왔고, 이내 방공호를 찾아냈다. 한국군은 수류탄을 꺼내들며 우리에게 나오라고 협박했다. 이모는 나가면 죽을 것 같다며 거부했으나, 결국 우리는 방공호 바깥으로 끌려나왔다”
“한국군은 방공호 밖으로 나온 우리를 다 죽였다. 집에 잠시 놀러온 이웃집 오빠는 총에 맞아 바로 숨졌다. 친오빠는 배와 엉덩이가 날라가는 중상을 입었고, 나는 배에 총상을 입고 기절했다, 깨어나보니 남동생은 입에 총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살아있던 이모는 집을 불태우려는 한국군을 막으려다 죽었다. 한국군이 떠난 뒤, 나와 오빠는 중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피신하러 움직였다. 나는 창자가 튀어나와 남동생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업을 수도, 끌고갈 수도 없었다. 결국 동생을 버려둔 채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우리가 피신한 옆집은 엄청 큰 물소가 지켜줬다. 한국군이 아무리 총을 쏴도 물소는 자리를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집에 있던 10명의 사람은 목숨을 건졌다. 그 후 오빠와 나는 이집 저집을 떠돌았다. 그러던 중에 나는 물을 발견하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빠도 물을 달라했지만 혼자 다 마셔 나눠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출혈이 심한 오빠가 물을 마셨다면 못 살아남았을 거다”
“마을 여기저기 떠돌면서 이웃집 아주머니들에게 어머니가 다낭에 있는 시장에 안갔다는 사실을 말해줬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어머니를 찾아 밖으로 나섰다. 들판을 달리며 엄마, 엄마, 울면서 찾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정신없이 어머니를 찾던 도중 오빠가 미군헬기에 수송 중인 모습을 봤다. 그곳에 가자, 작은 아버지가 둘 다 헬기를 타고 병원으로 가라고 일러줬고, 나는 다낭의 병원으로 이송됐다”
“다낭의 병원에는 1년간 있었는데 너무 무서웠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작은 아버지가 가끔 오시긴 했지만, 아는 사람도 없이 오빠와 둘이서 힘겨운 나날을 견뎠다. 나는 병원에서도 어머니가 살아계시는지 여기저기에 물어봤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병원에서 지낸지 3개월 즈음, 그제서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됐다”
응우옌 티 탄은 울음을 참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너무 살기 힘들었다. 작은 아버지는 남베트남 병사였기에 전쟁 후 사상교육 수용소에 끌려갔다. 우리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돌아가신 어머니께 날마다 외쳤다. ‘어머니 저는 왜 안데리고 혼자 가셨어요. 저랑 왜 같이 안갔어요. 너무 힘들어요.’ 그뒤로 일이란 일은 다했다. 밭일 논일 가리지 않고, 밤에도 불을 켜고 집 짓는 일을 했다. 그렇게 살았다”
힘겹게 이야기를 끝맺은 응우옌 티 탄은 “전쟁이 일어나면 억울한 이들이 생긴다. 우리 가족은 여자와 아이들밖에 없었는데도 야만적으로 비참하게 죽었다”면서 “젊은 세대들이 이러한 일을 절대 겪게 해서는 안 된다”며 반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함께해줘 감사드린다”라며 “평연의 활동을 계속 잘 이끌어나가고, 건강하길 바란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당신은 자기 가족이 안 죽었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권 팀장 "피해자와 유가족의 마음이 중요해"
『1968. 2. 12 꽝낭섬 야유나무. 74명의 주민들이 학살 당했다』
평연 20기 진료단이 응우옌 티 탄을 만나기 전 찾은 퐁니마을 위령비 앞에선 권현우 팀장은 위령비의 의미와 문구를 소개하며, 2000년대 초반에 일어난 응우옌 티 탄의 일화를 소개했다.
2000년대 초반 쯤 한국에서 온 어느 교수가 주민들에게 퐁니퐁넛 민간인학살 사건을 청취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했다. 교수는 마지막 질문으로 74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끔찍한 학살에 대해 한국 정부의 사과를 원하시는지? 어떤 것을 바라시는지? 따위를 물었다
그러자 주민 한 명이 일어나 "우리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는 것이 우리의 방침이니 미래로 가는 측면에서 이해해줄 수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때 탄아주머니가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안합니다. 당신은 자기 가족이 안죽었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지. 나는 엄마가 죽고, 이모가 언니가 남동생이 죽었고, 남동생이 피 철철 흘리는 데 내가 데려가지 못해서 죽은 걸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한국군이 너무나 증오스럽다"
권현우 팀장은 "거칠게 쏟아낸 응우옌 티 탄의 말에 옆에서 듣던 유가족들이 펑펑 눈물을 흘렸다. 참아왔던 마음이 한 번에 터진 것"이라며 "과거를 닫고 미래를 가는 것이 베트남 정부의 지침은 맞다. 그러나 피해당사자와 유가족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한국 정부는 단 한번도 공무원을 파견해 유가족에게 직접 사과 받고 싶으신지? 물어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이어 그는 "한일관계, 위안부 문제에 우리는 어떻게 답하나? 박근혜 정부가 인정한 것을 우리 할머니들이 인정했다고 생각는가?"라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