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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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 송필경
  • 승인 2019.04.0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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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유레카!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를 코끼리 발톱 만지기 식으로 곁눈질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떠났다. 유서 깊은 혁명의 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에 머문 시간이 고작 오전 나절이었다. 이 아쉬움 때문에 쿠바에 꼭 다시 오고 싶어졌고, 온다면 ‘산티아고 데 쿠바’에만  최소 3박을 해야만 코끼리 발등이라도 만져볼 것 같다.

점심 먹으러 시내를 빠져 나와 교외 해변으로 갔다. 절벽이 있는 아름다운 해안 마을이다.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었다. 길 양쪽에는 기념품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기념 상품 거의 대부분 체 게바라 형상이 있는 물건이고 카스트로 형상 물건도 가끔 구색을 맞추었다.

기념품 가게에 있는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 형상 (제공 = 송필경)

5분 쯤 걸었을까? 해안 절벽 끝에 멋진 성이 보였다. '산 페드로 데 라 로카 모로 요새(Castillo de San Pedro de la Roca del Morro)'라 했다.

요새의 전경 (제공 = 송필경)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 요새는 도시 남서쪽으로 10km 떨어진 산티아고 항구 어귀에 있는 높이 60m인 곶 꼭대기에 견고하게 서 있다. 위층 테라스에서 보면 띠 모양의 거친 산티아고 서쪽 해안선과 마에스트라 산맥의 부드러운 선이 장관을 이룬다.

1554년 해적이 도시를 약탈하자 방어를 위해 유명한 이탈리아 공병 후안 바우티스타 안토네이가 1587년 이 요새를 설계했다. 자금이 부족했던 까닭에 안토네이가 사망하고 17년이 지난 1633년에 이르러서야 건설을 시작했고, 그 후 60년에 걸쳐 간간이 진행했다.

170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마침내 엘 모로 요새의 대형 포대와 보루, 무기고, 담이 제 역할을 했다. 해적의 기세가 약해지면서 요새는 1800년대부터 1960년대 후반쿠바 건축가 프란시스코 프라트 푸이그가 보수 계획을 수립할 때까지 감옥으로 사용했다.

현재는 해적박물관과 1898년 미국-스페인 해상전을 소개하는 전시실이 있다.

요새의 외부 (제공 = 송필경)
요새의 내부 (제공 = 송필경)

아름답고 튼튼해 보이는 성이었다. 구경을 마치고 성이 잘 보이는 해안 절벽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카리브 해의 밝은 태양아래 흰 구름, 푸른 하늘, 흰 파도, 푸른 바다 모두 눈 부셨다. 저 먼 배경에는 마에스트라 산맥이 푸른 하늘의 도화지에 아름다운 녹색 곡선을 긋고 있었다. 절경에 어울리게 해산물 요리도 흡족했다. 게다가 쿠바에서는 빠질 수 없는 조미료인 식당 악단의 훌륭한 연주도 곁들였다.

(제공 = 송필경)

요즘 TV 교양 세계 여행기를 보면 아름다운 자연 풍광, 지역 풍습 그리고 특유의 음식 맛 소개가 주로 많다. 이런 여행 정보는 매우 유익하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이런 소개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내 관심이 있다. 바로 ‘혁명’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으로 사회는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

다음날 행선지는 이번 쿠바 여행의 핵심 방문지인 마에스트라 산맥에 있는 혁명 기지다. 이 산맥이 자리 잡은 그란마(Granma) 주의 주도이며 마에스트라 산맥의 거점 도시인 바야모(Bayamo)로 일단 가야했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서북쪽으로 약 130km 거리에 있다. 약 2시간 반이 걸렸다.

할머니란 뜻의 '그란마'은 요트의 이름이다. 카스트로와 혁명군은 1956년 12월 초, 그란마 호를 타고 이곳 연안에 도착해서는 바로 게릴라 전쟁을 시작했다.

그란마 주는 한적한 시골 지역이면서 쿠바에서 가장 구석진 지역이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지역 특성은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했다. 쿠바의 영원한 사도 호세 마르티가 눈을 감은 땅이자, 그란마 주 출신 카르로스 마누엘 데 세스피데스가 1968년 최초로 노예 해방과 쿠바 독립을 선언한 곳이다. 그래서 이 지역 '혁명 정신(Viva la Revolucion)'의 열기는 어느 곳보다 더 뜨겁다.

바야모 혁명 광장에 있는 세스페데스 동상 (제공 = 송필경)

1868년 10월 10일에 그란마에는 위대한 저항이 있었다. 설탕 농장주 카를로스 마누엘 세스페데스가 노예폐지를 주장하면서 그 본보기로 만시니요에서 가까운 그의 데마하과 설탕농장에 속했던 노예를 해방하고, 스페인 식민지배를 거부하기 위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1869년 1월 12일, 카우토강(Rio Cauto) 부근에서 스페인 군대에 패배했다. 스페인 군대가 다시 들어오려 하자 바야모 주민들이 스페인의 지배를 받느니 차라리 도시를 없애기로 작정하고 도시에 불을 질렀다.

약 30년 뒤인 1895년에 쿠바혁명당 을 창립한 호세 마르티가 막시모 고메스와 함께 관타나모 해변에 상륙하여 스페인-쿠바-미국 전쟁을 일으킨 지 한 달 만에 그란마주 도스 리오스(Dos Rios)에서 전쟁 중에 사망했다.

그란만 주의 열대림이 무성한 높은 마에스트라 산맥의 지형은  피델 카스트로가 1950년대 이곳에서 2년 동안 게릴라 근거지로 삼아 들키지 않고 활동 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1956년 12월 2일 피델 카스트로와 혁명군 동지 81명이 '그란마'라는 요트를 타고 라스 클로라다스 해변(Pay Las Coloradas;)에 상륙했다. 정보가 새 상륙하자마자 바티스타군에게 공격을 받았고 겨우 살아남은 대원 16명이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도주했다.

주도인 바야모는 쿠바 섬에서 가장 조용하고 깨끗한 도시다. 쿠바 국가를 작곡한 페루초 피게레도(Perucho Figueredo)의 고향이기도 하다. 쿠바 국가는 "바야모인이여, 전투장으로 진격하자"라는 애국적인 가사로 시작한다.

페루초 피게레도의 흉상과 쿠바 애국가 악보와 가사(제공 = 송필경)

2006년에 피델은 건강 악화로 권력을 사임하면서 바야모의 '조국 광장(Plaza de la Patria)'에서 마지막 공식 연설을 했다.

바야모 시내 구경 역시 대충 샤워 하는 정도 시간을 보내고 약 60km 거리인 바르똘로메 마소(Bartolome Maso)로 갔다. 마에스트로 산맥으로 들어가지 위해선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하는 데 미니 버스로서는 힘이 부치기 때문에  SUV 차량으로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타고 보니 우리 쌍용차 로디우스여서 반가웠다. 쿠바와 우리는 국교를 맺고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경제 교류는 있는가 보다.

바르똘로메 마소에서 쌍용 로디우스로 갈아타고 마에스트라 산맥 초입에 있는 산토 도임고로 갔다 (제공 = 송필경)

4명씩 한조로 로디우스를 타고 숙소가 자리 잡고 있는 약 25km 거리 남쪽에 있는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마을로 갔다. 이 작은 마을은 아주 깨끗한 야라 강 옆, 깊고 녹음이 우거진 협곡에 자리를 잡고 있다. 평화롭고 근면하고 소박한 '캄페시노(Campesino; 시골사람)'의 삶을 잘 보여주는 이 마을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주변을 배회하던 1950년대 이후로 거의 변한 것이 없고 한다.

우리 반역의 땅 지리산으로 치면 피아골이 있는 토지면 내동리, 뱀사골이 있는  산내면 또는 한신 계곡이 있는 백무동 마을 같은 곳이다.

우리는 산토 도밍고 빌라(Villa Santo Domingo)에 숙소를 잡았다. 침대 2개 있는 단층인 독립된 객실이 수십 개가 있다. 단층 펜션과 다름없다. 깔끔한 목조 건물도 있고 좀 더 저렴한 콘크리트객실도 있다. 우리는 콘크리트 객실에 묵었다.

산토 도밍고 빌라(Villa Santo Domingo) (제공 = 송필경)
객실 (제공 = 송필경)

짐을 풀고 숙소 옆에 흐르는 야라 강으로 모이기로 했다. 이는 강이라기보다 개울이라 불러야 했다. 먼저 온 선배님들이 개울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거친 돌밭을 살금살금 걸어가 계곡물에 첫 발을 담구는 순간 어떤 느낌이 확 다가왔다.

속으로 “유레카!”를 크게 외쳤다.

몇 년 전, ‘파리의 택시 운전수’ 홍세화 선생님과 저녁을 먹고 한담을 할 때였다. 홍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베트남에서는 게릴라전이 승리하고 왜 우리는 실패했는가? 라고. 질문의 의도를 몰라 머뭇거리니 답을 하셨다. 거기는 겨울이 없었고, 우리는 혹독한 겨울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셨다. 역사의 성패를 사실 기후 탓으로 돌리기에 나는 잘 납득할 수 없었고, 속으로 그럴 리가 하는 반발심이 있었다.

야라강 계곡 물은 따뜻했다. 우리 지리산은 아주 뜨거운 여름에도 발을 오래 담그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데 말이다.

야라강 계곡 물은 따듯했다 (제공 = 송필경)

2018년 10월 3일, 대구 지인들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숨진 지리산 빗점골을 방문했다. 혹독한 겨울을 품은 지리산을 언제나 따뜻한 마에스트라 산맥과 비교하기 위해 찾아 쓴 글이다.

오도재에서 바라 본 천왕봉을 정점으로 한 지리산맥 (제공 = 송필경)

내가 다른 사회나 나라의 역사, 철학, 문화, 문학 같은 인문학적인 가치관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결국 우리와 우리사회를 알기 위해서고 궁극적으로는 나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다.

우리는 일제 식민지를 맞으면서 순식간에 역사의 연속성이 단절되어 전통 가치관이 다 깨졌다. 남의 힘으로 해방을 맞자 분단을 당하고 지구상에서 가장 천박한 냉전 이데올로기에 휩싸였다. 사회 가치관이 극단적으로 갈라져 현재는 봉합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지금 이런 한반도의 남쪽에서 살고 있는 ‘나’라는 인간은 어떤 가치관을 세워야 할 지 고민이다.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가치관이었던 불교나 유학의 범위 안에서 가치관을 선택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해방 이후 물밀 듯이 들어온 미국식 가치관만으로도 정립할 수 없음이 참으로 고민이다.

미국식 가치관이란 해방 후 미국식 민주주의와 함께 들어온 서양의 두 줄기 전통 가치관을 말한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을 뒤이은 서양의 합리적인 사상과 예수님 말씀에 따르는 서양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 영향력을 행사해 온 기독교 사상이다.

또한 칸트 이후 유럽의 사회주의 근현대 철학 사상 특히 마르크스·레닌에서 비롯한 사회주의 정치 경제 사상을 외면한다면 내가 선택해야 할 가치관의 폭은 너무나 협소해 버리고 만다.

정서면에서도 그렇다. 이태백과 두보가 꿰뚫은 인생의 아름다움과 슬픔도 인류의 아주 귀중한 유산이지만 셰익스피어를 앎으로써 더 폭넓은 아름다움과 슬픔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끌려온 아프리카계 인민들이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남긴 한 맺힌 문학과 미술과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고 나는 단정한다.

다시 말해 다른 사회와 다른 나라의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일 수가 있으며 나아가 때로는 나의 핵심 문제의식이 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식민지 의식과 냉전 이데올로기 사고를 극복하지 못한 우리 사회와 그런 사회적 질곡 속에서 허우대는 '나'는 그런 유사한 질곡을 겪고 나름대로 극복한 베트남과 쿠바의 혁명에 유달리 관심이 많다.

나는 2008년 9월 13일 14일 2일간 베트남 혁명의 성지인 까오방을 탐방했다.

중국과 국경을 맞댄 베트남 최북부 산악 지대인 까오방은 호찌민이 1941년 말에 30년 해외 독립 활동을 끝내고 민족해방을 위해 조국 땅에 둥지 튼 첫 장소다.

깊은 산속 동굴과 눈에 띄지 않는 밀림 속 오두막집에서 민족해방 전사를 모으고 당을 정비해서 힘을 축적한 다음 1945년 봄에 일본과 무력투쟁을 시작했다. 1945년 8월 11일 일본군을 총공격하여 연합국이 베트남에 들어오기 훨씬 전에 일본군을 무장해제하여 8월 23일 수도 하노이를 장악했다. 9월2일에 사회주의 국가로써 독립선언을 하였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 국가가 스스로 독립선언을 한 최초의 일이며, 1917년 소련 성립 이후 베트남은 스스로 사회주의 국가임을 선언한 최초의 국가였다.

이에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베트남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약 30년 동안을 베트남 독립을 훼방하고 간섭하다가 기어코 직접 침략까지 하였다. 베트남은 미국과 직접적인 무력투쟁을 통해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1975년 민족해방의 기쁨을 맛봤다.

나는 2018년 7월 6일과 7일 2일간 쿠바 혁명의 성지인 시에라 마에스트라(마에스트라 산맥)를 탐방했다.

1956년 12월 피델 카스트로는 멕시코에서 체 게바라를 비롯한 82명의 동지를 규합해 작은 배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 동부 지역에 상륙했다. 상륙하자마자 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도망쳤다. 그 때 살아남은 동지는 겨우 16명이었다.

험준한 산맥에서 16명이 시작한 무장투쟁은 승승장구하며 쿠바 전역을 서서히 장악하며 약 2년 만에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였다.

1959년 1월 1일에 쿠바 혁명 세력이 아바나를 장악한 의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강요한 자본주의 질서를 전광석화 같이 뒤집고 사회주의 국가를 세운 첫 사례다.

나는 2018년 10월 3일 대구의 뜻있는 13분들과 해방 공간에서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이 산화한 지리산 빗점골을 탐방했다.

1948년 3월 제주도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일단의 세력이 무장투쟁을 하자, 점령군인 미군과 이승만의 친일 극우 세력은 이 무장대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민을 대량학살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순천에서 제주도로 떠나려는 정부군 내의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무고한 제주 도민을 죽일 수 없다고 반란을 했다. 이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순천에서 여수까지 장악했다. 이른바 “여순 사건”이다.

이 반란은 미군과 정부군의 반격을 받아 1주일도 안 돼 거의 진압되고 패잔병은 인근 지리산으로 도망쳤다. 남로당 지도부의 한 사람인 이현상은 여순사건 패잔병을 수습하여 유격대를 조직하기 위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 지리산에서 한국전쟁을 겪으며 ‘세계혁명사에 남을 유격전’을 벌였다. 한국전쟁 정전한지 약 2달 후인 1953년 9월 17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국군에게 사살 당했다.

이현상의 남부군 활동을 내가 ‘세계혁명사에 남을 유격전’이라고 한데 대해 과장이 심하다거나 사회주의 역사를 터무니없이 미화 또는 왜곡한다고 지적하거나 질책하실 분이 무지 많다고 나는 각오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세계혁명사에 남을 유격전’이라는 수사를 결코 양보하지 않을 작정이다.

문제 본질을 재빨리 파악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느끼고 있을 때가 있다. 어떤 사소한 일을 겪다가 문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는 깨달음이 갑자기 오는 경우가 더러 있다.
무엇을 갑자기 깨달았을 때 “유레카!(알아냈다!)”라는 말을 흔히 쓴다.

BC 250년 경, 그리스 과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왕에게 새로 만든 왕관이 순금인지 아닌 지를 판정하라고 명령을 받았다. 다시 녹이지 않는 한 이 왕관이 순금인지 다른 금속을 섞었는지에 대해 당시에는 알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이 문제만 골똘히 생각한 아르키메데스는 어느 날 목욕탕 욕조에 들어갔다가 욕조 물이 넘치자 갑자기 “유레카”하며 알몸으로 목욕탕에서 뛰어나와 왕에게 달려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모든 물체는 같은 부피라도 무게는 다르다는 비중(밀도)을 그때 발견했다. 부피가 작아도 무거운 게 있고 부피가 커도 가벼운 게 있다. 그 당시 부피를 재는 척도는 물이다. 같은 무게의 쇠와 금을 물이 가득 찬 컵에 넣었을 때 쇠가 금보다 물이 더 많이 넘친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마에스트라 산맥 약 1천 미터 고지에 게릴라 본부를 차렸다. 이곳을 탐방하기 아침 일찍 산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전날 오후 하류 계곡에 있는 로지(lodge)를 숙소로 잡았다.

짐을 풀어 대충 던져놓고 물에 들어가기 쉬운 복장으로 갈아입고 계곡으로 갔다. 지리산 뱀사골 같은 계곡이었다. 벌써 몇 분이 흐르는 계곡물에 온 몸을 담그고 계셨다. 계곡물에 발목을 담갔다. 물이 미지근하게 따끈했다.

이 따끈함을 느끼자마자 나는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쿠바의 이런 지역 산맥 밀림에는 차가움이 없구나, 겨울이나 밤에는 어느 정도 추위가 있는지는 몰라도 영하 이하의 혹독한 추위는 있을 수가 없겠구나란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햇빛이 쨍쨍한 여름날에도 지리산 계곡물은 차갑다. 발을 담그려면 살금살금 담가야 하고 담구더라도 오래 있을 수 없다.

지리산 유격대가 산 전체가 꽁꽁 얼어붙는 그 긴 겨울을 어떻게 지냈을까.

낙엽이 지면 산에서 인간의 움직임을 정찰 비행기는 쉽게 찾아낸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이 오면 흔적 없이 이동하는 게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다.

밥 짓거나 몸 녹이기 위해 불을 지필 때 웬만히 조심하지 않으면 연기 때문에 거주 장소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 겨울에 꽉 죄여 오는 토벌대를 피해 이리저리 몸을 숨길 때, 제대로 된 은폐 장소를 찾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눈을 파헤쳐 낙엽을 긁어모아 눈을 치운 돌 위에 깔아 누워야 한다. 피곤해서 그냥 잠이 들면 동상이 걸린다. 밤새 손가락과 발가락을 끊임없이 꼼지락 거려 손발의 모세 혈관의 피를 멈추지 않게 해야 동상을 막는다.

깊고 높은 지리 산맥은 평야보다 봄이 늦은데다 봄도 어느 정도 익어야 그런대로 은신하기 좋은 잎이 돋아난다. 유격대의 겨울 지리산은 얼음 나라였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바로 그 지옥이었다. 유격대장 이현상은 그런 지리산의 겨울을 5번이나 보냈다.

고상한 이상과 강철 같이 단단한 의지를 지닌 이현상이었더라도 긴 겨울을 지리산에서 보내야 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엄혹한 시련이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압제자에 저항해서 분단을 극복하고, 그가 그토록 바랐던 계급해방을 민중에 전파하기에는 남은 힘이 전혀 없었다. 겨울이란 엄혹한 시련과 마주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의 도전에 슬기롭게 응전했을 때 문화를 생산한다고 했다. 북극의 에스키모처럼 도전하기 엄청난 자연 조건 아래서는 생존하기에 급급할 뿐 문명을 생산할 수 없다고 했다.

이현상은 일제에 저항하고 계급해방을 전파하다가 혹독한 고문이 뒤따른 투옥을 4번이나 당해 12년간 옥살이 했다. 그토록 바랐던 해방을 맞이했지만 기쁨은 곧 사라졌다.

친일세력은 반성은커녕 친미세력으로 둔갑하여 미국을 등에 업고 다시 동족을 수탈하고 착취하는 데 앞장서며 개인의 영욕을 채웠다.

점령군 미군은 사회주의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 앞잡이 조무래기들에게 경찰 권력을 쥐어줬다. 이 앞잡이들은 민족 분단을 고착화하는 친미 세력에 저항하는 항일민족 세력을 일제 보다 더 심하게 탄압했다. 이현상도 일제 형사 조무래기 출신 노덕술에게 불려가 심하게 고문을 당했다.

이런 주객전도의 역사를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현상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제 총 드는 일뿐이었다. 이현상은 지리산에 들어갔고 혹독한 조건 속에서도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벌였다. 남한의 친미 지배세력은 유격전을 벌이는 이현상을 비현실적인 이념에 치우친 인물로 단정했다. 이들에게 끈질기게 저항한 이현상은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이현상이 활약한 5년 동안에 그에게 증오가 사무치도록 치를 떨었다.

나는 이미 이현상을 ‘세계혁명사에 남을 유격전’을 펼친 인물로 단정했다.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승리한 일본 도고 해군 제독에게 ‘당신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의 넬슨보다 위대한 제독이다’라고 칭찬하자, 도고 제독은 ‘나는 넬슨보다 위대할지는 몰라도 이순신 보다는 못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나 사실 여부는 명확치 않다. 그럼에도 이 말의 의미를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넬슨과 도고는 영국과 일본이라는 막강한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지휘 능력을 발휘해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국가 지원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박해를 받아가면서 싸웠다. 이순신은 오로지 개인 능력만으로 오랫동안 침략을 준비한 막강한 일본 함대를 전멸시켰다.

이현상처럼 외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 개인 능력만으로 장기간 유격전을 펼친 사례가 ‘세계혁명사’에 있었던가? ‘세계해전사’에 길이 남을 이순신처럼 말이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남한에서 아마 김일성 주석 다음으로 증오의 대상이 아닐까 한다. 이현상의 어머니는 전북(지금은 충북) 금산 지방에서 첫 번째 가는 대부호의 마님이었다. 아들 때문에 집안은 풍비박산 나서 말년에 90세 넘은 나이로 옛 머슴의 행랑채 구석에서 사시다가 1975년 사망했다. 시신을 대충 묻은 지 사흘 만에 누군가가 묘를 파헤쳐 시신을 토막 냈다고 한다. 이현상에 대한 증오가 그의 어머니에게까지 미쳤다.

증오도 이쯤이면 할 말을 잃게 한다.

나는 이현상의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증오의 역사로 바라보지 않는다. 엄청난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고 머리가 뛰어났지만 개인 영달을 포기하고 지성인답게 역사의 의무에 최선을 다하려고 마지막 한 방울 피까지 꽉 짜내어 지리산에 뿌렸다.

식민지 잔재 청산과 분단의 질곡에서 벗어나 민중의 삶에 희망을 주려고 한 이현상의 노력과 희생을 나는 긍정의 역사로 바라본다. 그게 후세가 지녀야 할 올바른 가치 판단이라 나는 믿는다.

체 게바라는 사회주의 투쟁가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20세기 혁명의 아이돌이었다. 21세기인 지금도 전 세계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그 때문에 내가 체 게바라에 대해 공부하는 게 아니다.

이현상의 문제의식이 곧 체 게바라의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비참하게 일생을 마쳤듯이 체 게바라도 볼리비아 산골에서 CIA 앞잡이에게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체 게바라가 살아 있을 때 그렇게 증오했던 미국에서 사후부터 지금까지 체 게바라에 대한 긍정의 역사가 끊임없이 책으로 나온다.

우리의 이현상은 그가 지닌 시대정신의 무게나 투쟁 경력은 물론 개인적 지성 능력까지 체 게바라에 비해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인물이라 해도 한 치도 틀리지 않는 말이다.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체 게바라에 비해 이현상은 우리 사회에서 왜 아직도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어야만 하는가?

이현상이 마지막 숨을 거둔 지리산 빗점골. 이현상과 체 게바라의 최후 모습 (제공 = 송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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