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이 아는 건치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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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민이 아는 건치가 됐으면 한다”
  • 문혁 기자
  • 승인 2019.04.24 1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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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치를 일궈온 사람들]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서울・경기지부 전성원 회원(두리치과)
1989년 4월 26일 첫발을 낸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이하 건치)가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이합니다. 사람으로 치면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립(而立)입니다. 설립 이래 국민 건강권 쟁취와 의료모순 극복을 위해 노력해 온 건치의 30년 한 길,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본지는 그 길에 함께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연재 기사들은 건치 30주년 기념 특별판 지면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 편집자 주
 
전성원 회원

“정치적 활동 내지는 사회적 활동 참여를 ‘함께하자’라고 제안하면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던 분위기? 그런게 있었다. 학창시절 나는 겁도 많고, 돌 던지고 싸우는 걸 잘 못했다. 그저 누가 부탁하면 할 수 있는 한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과격하게 돌 던지고 그런건 아니지 않나? 이런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운동하던 사람들, 건치 사람들은 순수해서 그들과 있는 자체로 내가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그들과 같이 있으면 좋고 즐거웠다. 그래서 그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판단하면 그게 맞겠지! 하고 같이 갔다”

 
‘같이 가는 사람’, 전성원 회원은 그렇게 건치에 발을 들였다. 1990년,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건치행사나 사업이 있을 때마다 ‘얼굴 마담’으로 부스에 앉아있거나, 일을 돕는 일을 하던 중 건치신문 전민용 대표이사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건치에 뛰어들었다.
 
“어느날 (전)민용이 형이 나한테 너는 아는 사람도 많고, 친구들하고 잘 지내니, 건치 사무국에 나와서 회원 사업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 권유하더라. 그래서 ‘그러죠 뭐’ 하고 나갔다.”
 
신자유주의 물결이 거세게 일던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사이, 그는 건치 사무국장과 집행위원장 그리고 건치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의료시장화’을 막고 ‘의료공공성 강화’를 위한 연대활동을 비롯한 ▲구강보건전담부서 폐지반대 ▲남북치과계 학술대회 ▲치과계 직선제 논의 등 굵직한 사안의 선두에 섰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과 심혈을 기울인 사업을 묻는 질문에 전성원 전 공동대표 10년 넘게 진행한 건치 서울・경기지부 임상강좌와 건치 영상을 만들던 일을 꼽았다.
 
“6.9제 행사나 구강보건 연극제 등 행사때 잔심부름하고 연락했던 것들, 엠티 준비하면서 정옥 후배와 먹거리 씻고, 그런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추억이고, 기억에 남는다.
 
대학 시절, 사진동아리를 다니면서 사진을 배웠다. 그런대 마스터 피스다! 이렇게 와닿는 작품이 별로 없었다. 스틸 사진에는 별 재능이 없나 보다 하며, 소니캠코더를 사서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건치 활동을 많이 찍었다. 실무에서 떨어지기 전까지 건치 영상의 대부분을 만들었다. 이번에 건치 30주년 다큐멘터리에도 많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 품질이 안 좋아 안 들어 갈 수도 있겠다(웃음)”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건치 사람을 묻는 질문에 ‘1990년대 말 건치의 중심’이었다며, 배강원 전 공동대표를 꼽았다.
 
“개인적으로, 내가 일하던 당시 건치의 중심은 배강원 선생님이라고 생각한다. 배강원 선생님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과하지 않은 분이었다. 리즈너블한. 원칙이 확고해 어떤 지점을 허락치 않던 분들과 그래도 좀 대충 어떻게 잘해보지 이런 사람들, 그리고 그런 생각도 없는 회원들 사이를 아우르며 함께 나눌 수 있는 공통부분을 만드려 했던 분이다.
 
어떤 면에서는 나랑 비슷한 성향이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올바른 방향이어도 원칙이 너무나 확고하고 강하게 밀어붙이면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 않은가? 그에 반해 배강원 선생님은 말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답을 주시는 분이었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셨던 분이다. 지금도 건치를 생각하면 제일 생각이 많이 난다. 그런데 선생님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때 메시지를 너무 늦게봐서 못 갔어요. 죄송스럽죠.”
 
“건치가 내 인생...더욱 활발해지길”
“구강보건 운동의 플랫폼이 됐으면”
 
그는 건치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건치가 내 인생”이라고 했다.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아무도 모르는 삶 속에 ‘이 길을 걸어왔구나’, ‘이것이 내 생이구나’ 하는 그것이 그에겐 건치였다.
 
“한편으로는 '내가 살아온 게 이런 것이다'하는 건치가 사라져버리고 헛되지 않은 뭔가로 남았으면 한다. 그래서 더욱 확장하고 활발히 활동을 전개해 모든 국민이 아는 건치가 되길 바란다”
 
전성원 회원은 건치가 치과계 대중 사업이나 운동의 플랫폼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건치라는 이름하에 느슨한 네트워크를 많이 만드는 것이 건치의 활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건치에서 파생된 사업은 많다. 건치 선배들은 활동적이어서 현안에 필요한 것들을 순간순간 만들었다. 수불사업 시민단체도 만들고, 치과 경영이 한창 화두가 될땐 경영 연구팀도 만들었다. 북한 치과진료사업, 베트남 진료인 평연, 부산건치에서는 캄보디아 진료도 한다.
 
그런데 사업을 접기도 하지만, 궤도에 오르고 지속할 필요가 있을 때는 단체를 만들고 분가를 시켰다. 평연이나 산업구강보건원이 대표적이다. 건치에서 만들었으나 사단법인으로 독립했고, 지금은 별개의 단체로 활동한다. 나는 그런 개별의 단체 소속원들이 나는 건치 소속이야 하는 유대감은 없을지언정, 나는 건치 계열이다 하는 느슨한 연대와 네트워크로 하나로 연결해 가는 모습이 건치의 미래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건치 사람들이 너무 순진하다 보니 자기 것을 챙겨서 내 것이라고 말을 못한다"며 속상함을 내비치는 그는, 경기도치과의사회 부회장을 하며 느낀 점을 말하며 건치가 조금이라도 더 유연해지길 바랐다.
 
“건치 활동에서 잠시 나와 놀려하다, 선배의 꼬임에 빠져 주류 치과계 회무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속에는 치과계를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발을 들인 사람과 다른 한편으로는 완장과 명예욕 때문에 회무에 나선 이들도 있다. 그런데 명예욕이 있는 사람 특징이 자신이 목표하고 있는 길에서는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는 정치력이 있다.
 
건치가 같은 지향점을 갖고 있는 사람, 같이 할 수 있는 방향성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손을 잡고 어떨때는 이 친구와 열걸음을 가고, 다른 친구와 또 열걸음을 가는 식으로 같이 어우를 수 있으면 좋겠다. 건치는 가치관과 지향점이 뚜렷한만큼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변하더라도 크게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설령 중간 어떻게 쟤랑 같이 하지? 쟤랑 손을 잡았어? 이런 식의 오해를 살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활동을 햇으면 좋겠다
 
독고다이 같은, 뭔가 지사처럼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끌고가는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주변에는 그것을 엮어주는 정치력 있는 사람도 필요하다. 건치에는 지향점을 유지하면서 모더레이터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이 활력을 잃지 말고 무언가를 계속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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