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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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 송필경
  • 승인 2019.05.0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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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우정의 극치: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그리고 우리의 전태일과 조영래

전날 역사 탐방을 일찍 마치고 오후 내내 푹 쉰 덕분에 밤새 두 눈이 말똥했다. 2018년 7월 9일 새벽, 룸메이트가 곤히 잠들어 억지로 누워 잠을 청했으나 캄캄한 어둠에도 눈이 감기지 않아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들고 식당으로 갔다.

식당 소파에는 개가 편히 잠자고 있고, 잔디 마당에는 돼지가 코로 땅을 흥흥거리며 훑고 있다. 여기 돼지들은 우리에 갇혀 있지 않고 마당이고 거리를 마구 쏘다녔다. 돼지에 목줄을 걸고 개처럼 거리에서 끌고 다니는 모습도 보았다. 그래서인지 돼지들이 몸집이 작고 날씬했다.

개는 곤히 잠들고 돼지만 두리번거리는 한 밤중에 식당 형광등 아래서 노트북을 열고 답사의 의미를 저장했다.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혁명의 길’을 걸어 혁명의 산실인 게릴라 사령부를 답사한 것은 일생에 소중한 경험이었고, 이로써 ‘쿠바 혁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중요한 한 실마리를 찾았다.

멕시코에서 출발한 게릴라 82명이 탄 배는 계획과 달리 쿠바 해안 엉뚱한 곳에 좌초했고 바닷물에 푹 젖은 무기와 의약품을 육지로 나를 수 없어 대원들은 자신을 지킬 총 한 두 자루만 들고 가까스로 뭍으로 기어 올라왔다.

상륙하자 곧이어 정부군의 공격을 받은 게릴라는 혼비백산한 채 16명만이 목숨을 부지해 산세가 험악한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들어가 정부군 4만여 명을 상대로 전투를 시작했다. 겨우 16명이!

역사에서 투쟁 성패를 숫자의 힘으로만 단순 예측할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었다.

감옥에서 풀려나와 곧바로 왜군 수백 척을 상대해야만 했던 이순신께서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고 하신 기개 있는 말씀은 당신의 지략에 대한 확신이 아니었을까.

1934년 미국의 현대식 무기를 지원 받은 장제스의 국민당군 수백만 명이 마오쩌둥의 넝마주의 같은 홍군을 총공격하자, 홍군 8만여 명은 18개 산맥을 넘고 17개 강을 건너 1만2천5백km나 도망갔다. 1년 뒤 1935년에 목적지에 도착한 대원은 8천 명에 불과했다. 결국 홍군은 1949년 최종 승리를 거두는데, 승리의 가장 큰 요인은 홍군이 5천 년 봉건지배 아래 토지 노예로 신음하던 민중에게 토지 혁명의 꿈을 불어넣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는 미국의 현대식 무기를 공급 받아 다시 베트남을 침공했다. 베트남 인민이 지닌 무기라곤 겨우 프랑스군에게 빼앗은 총과 겨우 셀 수 있는 총알뿐이었고 삽, 곡괭이 심지어 돌맹이와 나뭇가지마저 들고 저항했다. 서방 기자가 물었다. 넝마주의 모습으로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서구 침략자들을 어떻게 이기겠냐고. 호찌민은 답은 간단했다. “인간의 정신은 인간이 가진 무기보다 강하다.”

넝마주의 같은 호찌민 군대는 30년 뒤 세계 최강 군대인 미군을 물리쳤다.

다시 말해, 역사 투쟁하는 지도력에는 지략, 민중의 요구에 부합하는 절실한 꿈 그리고 꿈을 실행하려는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그러한 지략과 꿈과 정신력을 지닌 반항아들이었다. 피델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한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16명 스파르타쿠스들은 민중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2년 1개월 뒤 4만 명의 병력을 지닌 친미 괴뢰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1959년 1월 1일, 남루한 게릴라 부대가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 것은 자본주의 제국 미국의 콧등에서 자본주의 질서를 거부한 현대 인류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날이 밝으면 일찍 식사하고 내륙 도시 카마구에이를 거쳐 해변 도시 트리니다드로 약 400km를 가야 했다. 여기 산타도밍고까지 타고 온 SUV 차량을 미니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다시 바르똘로메 메소로 갔다. 차를 바꾸어 타고 조금 지나니 산악 지대를 벗어났다. 미니버스는 광활한 평원 사이 도로를 달렸고 말로만 듣던 끝없는 사탕수수 밭이 목초지와 함께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 있다.

우리나라 도로에 비하면 낡고 좁은 데, 차량보다는 우마차가 더 많이 보였다. 낡은 차와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심심찮게 공존하고 있다.

평원을 3시간 정도 달렸을까, 로터리가 있는 도로 옆에 야자 잎 지붕을 한 널찍한 휴게소에 들렀다. 음료와 책자와 사진엽서를 팔고 있었다. 책과 사진엽서의 대부분은 체 게바라의 것이다.

화장실에 다녀 온 후 휴게소 앞에 서서 기지개를 켜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로터리 저편 가장 자리에 체 게바라의 간판이 크게 걸려 있고 구호가 적혀 있다.

가이드에게 저 구호가 뭐냐고 물었다. 아바나의 시민 혁명광장에 있는 바로 그 구호라 했다.

“Hasta la victoria Siempre(승리할 때까지 영원히)”

쿠바에 도착한 날 공항을 빠져나와 처음 찾은 곳이 혁명광장이었다. 그 혁명광장의 상징은 호세 마르티의 기념탑이지만, 전 세계로 가장 알려진 것은 내무부 건물 외벽을 철 부조로 장식한 체 게바라의 형상과 바로 이 구호였다.

나는 감각적인 면에서 좀 아둔한 편이라 그 혁명광장의 구호를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쿠바에서 5일 밤을 지나고 나서야 쿠바 혁명이 어떤 맛인지 어렴풋이 느꼈다.

왜 쿠바에는 실질적인 권력자 피델 카스트로의 형상은 거의 없고 어딜 가나 체 게바라의 형상과 구호만 넘실거릴까?

아르헨티나 태생의 외국인 체 게바라가 왜 쿠바 혁명의 상징이 되었을까?

쿠바의 초등학생들은 왜 수업하기 전에 “나는 체 게바라처럼 될 거야”를 반복할까?

피델 자신은 독재자라고 많은 비난을 받지만 체는 민중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는 사실을 피델은 몰랐을까?

로터리 저편 체 게바라의 간판을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역사의 교과서라 일컫는 사마천의 『사기』였다.

사마천은 역사의 맛을 보기 위해 20대에 중국 천하를 주유했다. 역사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의 인정, 풍속, 지리를 관찰하며 역사 유적과 전설에 감격했다. 이때 느낀 감정을 태사공왈(太史公曰) 즉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로 표현했다.

가장 숭배한 공자의 곡부를 방문하여 묘당을 찾았을 때 공자의 모습을 상기하고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고, 만리장성 대사업에서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운 농민들의 피땀과 희생에 가슴 미어졌다고 한다.

『사기열전』의 첫째편인 ‘백이열전’에서 백이와 숙제는 이 세상을, 올바르지 못한 악의 세계인 만큼 타협할 여지조차 없는 타락한 세계로 보았다. 그런 현세에 절망한 나머지 굶어죽었다.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가 신념을 굳게 지키면서 죽은 행위를 순수한 이상주의로 숭상 했다.

『사기열전』의 마지막 편인 '화식열전'은 상공업으로 재산을 모든 인물들의 이야기다. 화식(貨殖)은 돈 버는 방법을 말한다. 이 열전에서는 물질의 중요성 즉 경제생활을 중시하는 현실주의를 논했다.

사마천은 이상주의자인 ‘백이숙제’를 가장 먼저 언급한 후, 현실주의자인 ‘돈 번 상공인’을 가장 나중에 언급했다.

사마천은 철학자가 아니라 역사학자였다. 철학의 이상과 생활 현실 사이의 틈에서 생기는 모순을 또한 역사의 엄연한 진실로 보았다.

인간 도리와 인간 이기심은 역사에서 언제나 대립했다. 명분과 이익은 때로는 정의와 불의로 변질하면서 역사는 굴러갔다. 사마천은 도덕적 이상을 존중하면서도 물질이 가진 현실적인 힘을 알았기 때문에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첫 만남에서 라틴 아메리카 약소국들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제국주의 모습에 반대하는 데에 뜻을 같이 하자 곧바로 의기투합했다. 혁명 성공 뒤 ‘탈미국 그 이후’가 문제였다. 피델은 소련의 힘을 미국의 대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으나, 체는 소련 역시 또 다른 제국주의라는 걸 알고는 크게 실망했다. 피델의 현실과 체의 이상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쿠바 혁명 정부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체는 피델을 떠났다. 피델은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며 떠난 체를 비난하지 않았다. 체는 아프리카 콩고와 남미 볼리비아에서 돈키호테 같은 이상을 추구하다 목숨을 잃었다.

최고 권력자 피델은 체의 이상을 자신의 현실 정치에서 수용하기 힘들었지만, 혁명 정신의 원천으로써 체의 이미지는 쿠바 인민에게 아주 소중한 혁명 자원이라고 강조했다.

후배지만 내가 아주 존경하는 사람이 대구에 있다. 최봉태 변호사는 일찍이 일제피해자 인권  문제에 평생 전념했다. 특히 위안부 문제를 미국 하원과 유엔에 상정하여 이 문제가 일본의 전쟁 범죄라는 인식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최봉태 변호사는 자신의 정치 신념을 자주 이렇게 말했다. “권력, 명예, 부를 한꺼번에 갖지 말자!” 우리 정치에서 권력을 가진 자가 명예나 부를 추구하지 말자는 뜻이다. 또한 명예나 부를 가지고 정치를 이용하지 말자는 뜻이다.

위안부 출신 이용수 할머니와 최봉태 변호사

청문회에서 우리 정치인을 보면 3가지를 한꺼번에 가지려고 노력하는 자가 이루 셀 수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대통령은 그 어느 직위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인데, 그 직위로 명예를 탐내고 부를 획득한 대통령이 우리에게 불행히도 흔했다. 그런 면에서 그런 대통령을 배출한 우리 사회는 아직 미개하다.

피델은 권력만 행사했지 권력 위에 명예를 덧씌우지는 않았다. 피델은 살아 있는 자에게는 어떠한 우상도 금지했는데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공한 혁명의 명예는 호세 마르티 같은 선배와 후배인 체 게바라를 위시하여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아벨 산타마리아, 후안 알메이다 같은 혁명 동지들에게 영원히 헌사 했다.

50여년 최고 자리에 있었던 권력자가 자신의 동상을 세우지 않았고, 죽어서도 아주 소박한 무덤을 만들라고 당부했고, 후계자를 사적인 인연으로 지목하지도 않았다. 이런 모습의 피델은 베트남 지도자 호찌민과 거의 흡사했다.

쿠바 사회는 모든 인간세가 그렇듯 확고한 이상 사회가 아닐 것이다. 혁명 후에도 대립과 갈등이 당연히 많았던 사회일 것이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장점이 많다면 허점도 수두룩할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자 피델이 성공한 혁명의 영예를 체와 동지들에게 고스란히 양보한 점만은 현대 정치사에서 아름다운 우정의 모범으로 남으리라.

양보야말로 진정한 우정의 으뜸 미덕이 아닐까. 『사기』의 ‘관안열전’에 나오는 ‘관포지교’는 우리가 너무나 익히 알고 있는 교과서적인 우정이다.

옛 중국 제나라에 관중과 포숙이 있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거센 세파와 어지러운 정치에 시달리면서 우정을 이어갔다. 우정의 핵심은 포숙이 관중의 위대한 재능을 발견하고  그 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관중의 결점을 감싸주고 돌봐 준 포숙의 무조건적인 양보였다. 그 덕분에 관중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재상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권력의 정상에 오른 관중은 사람들에게 친구 포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내가 가난할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나는 내 몫을 더 크게 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았다. 세상 흐름에 따라 이로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세 번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번번이 쫓겨났으나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시대를 만나지 못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싸움터에 나가 세 번 모두 패하고 도망쳤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비웃지 않았다. 내가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나는 쿠바에서 피델이 체에 베푼 우정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전태일과 조영래 사이의 우정을 떠올렸다. 두 분은 생전에 한 번도 만났지 않았지만, 조영래가 전태일 영혼에 다가가 전태일 정신을 세상에 드러낸 우정은 내 의식 형성에 무한한 영감을 주었다.

전태일은 암담한 노동현실의 근본원인은 근로기준법이 준수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태일은 비록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법대 교재인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구했다. 전문적인 법학개념과 법률용어로 된 책과 씨름했다. 전태일은 이때부터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자에게 참담한 고통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분신 사망 후 그토록 원했던 대학생 친구인 ‘위대한 청년’ 조영래가 전태일 영전에 찾아왔다.

아름다운 청년은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인간 고통의 본질을 알아냈고, 위대한 청년은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 내려와 그 고통을 이 세상에 드러내었다. 혼과 혼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을 나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격조 있는 만남’이라 부른다.

내가 산 시대에 일어난 민중의 위대한 자각, 다시 말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시대모순을 돌파한 시대정신은 노동자의 자각을 외친 전태일의 분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무지렁이 전태일의 분신만으로는 온전히 역사 의미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조영래는 고등학교 때 한일회담 반대 데모하면서도 서울대학교 수석 입학한 천재였다. 사법고시 준비하던 대학원생 조영래가 분신 사망의 소식을 듣고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전태일의 영혼에게 친구로서 다가갔다.

관중이 뜻을 실현하도록 포숙이 언제나 양보했듯이, 피델이 쿠바 혁명의 영예를 고스란히 체에게 헌사 했듯이, 조영래는 자신의 능력을 전태일 정신 부활에 최대한 쏟았다.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 모든 민주화운동은 이들 두 분-전태일과 조영래-의 영혼에 큰 빚을 안고 있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체 게바라가 남미 혁명을 꿈꾸다 볼리비아에서 젊은 생을 마감했고, 전태일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불태웠다.

죽음의 의미를 태산보다도 무겁게 여길 때도 있고, 기러기 털보다 가볍게 여길 때도 있을 것이다.

피델과 조영래는 자기희생으로 이상을 추구한 체와 전태일의 죽음이 의미하는 역사 무게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관포지교’ 이상의 우정을 보일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남은 생에서 베트남혁명, 쿠바혁명, 68혁명에 대해 공력을 더 쌓아, 이를 바탕으로 전태일과 조영래의 영혼에 다가서고 싶다.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전태일 열사의 묘와 조영래 변호사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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