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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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 송필경
  • 승인 2019.07.16 1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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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체 게바라 복합조형단지

그는 언제나 상상하면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했다.
단지 그런 순간을 살아 본 영광이 없었던 사람만
상상을 부정한다.
그의 고귀한 상상은
정의와 평등이었다.

그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Ernesto Guevara de la Serna)'이며 체 게바라(Che Guevara)라는 이름으로 사랑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 혁명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위대한 혁명은 오로지
위대한 사랑의 감정에서만 태어날 수 있다.“

우리 쿠바 기행단은 체 게바라 흔적의 마지막 장소인 산타클라라의 혁명 광장(Plaza de la Revolution)에 있는 ‘사령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복합조형단지(Conjunto Escultorico Comannte Ernesto Che Guevara)’를 찾았다. 드넓은 광장과 우뚝 솟은 체 게바라 청동상과 기념비와 박물관 그리고 체 게바라 영묘가 어울려 있는 곳이다.

(제공 = 송필경)

산타클라라에 있는 드넓은 혁명 광장을 맞닥뜨리는 순간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바딘 광장이 떠올랐다. 이 혁명 광장의 주인공인 체 게바라는 바딘 광장의 주인공인 호찌민을 가장 존경했다고 한다. 호찌민의 삶은 1890년에 시작했고 체 게바라의 삶은 1928년에 시작했다. 체 게바라의 삶은 1967년 끝났고, 호찌민의 삶은 1969년 끝났다. 두 사람의 시작은 38년 차이지만 끝은 불과 2년 차이였다.

베트남 하노이의 바딘 광장과 쿠바 산타클라라 혁명 광장 (제공 = 송필경)

이 2년 사이 중간인 1968년은 세계사적인 의미를 간직한 ‘68혁명’이 전 지구촌을 뒤흔들었다.

1968년 1월 31일 새벽, 사이공(현 호찌민 시)에 있는 베트남 미국 대사관을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사 19명이 점거했다.

전 세계 모든 민중은 물론 지성인까지 거대한 골리앗에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맞장 뜬 가냘픈 다윗의 용가에 경악을 하면서 영감을 얻었다.

“도전하지 못 할 권위란 없다!‘”

프랑스는 혁명의 나라답게 베트남이 내뿜은 영감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1968년 5월 초 파리대학 분교 낭테르 대학 당국의 억압적 처사에 항거한 학생 시위가 모든 권위에 저항한 ‘68혁명’을 촉발했다. 이 반항의 물결이 전 세계적으로 휩쓸었다. 심지어 미국과 일본도 거센 ‘68혁명’의 불길에 비켜나지 못했다.

남성에게 차별과 억압 받는 여성도 저항했다. 여성해방 다시 말해 진정한 ‘페미니즘’이 비로소 세상에 묻기 시작했다.

“왜 여성은 안 된다는 말인가?”

그때까지 프랑스 여성은 낙태는 물론 심지어 피임약 사용도 금지 당할 정도로 여성은 일상조차 억압받았다.

(제공 = 송필경)

유럽인들은 시위하면서 호찌민의 피켓을 들고 외쳤다.
“호, 호, 호찌민! 민족해방전선은 승리하리라!”
유럽 시내에는 체 게바라의 명언을 낙서한 담벼락이 넘쳐났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제공 = 송필경)

가냘픈 나라 베트남과 쿠바의 상징 인물인 호찌민과 체 게바라가 1968년 그 당시 유럽 지성인의 심성을 사로잡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쿠바는 전광석화 같은 1959년 혁명으로 미국 자본을 쿠바에서 추방했다.
베트남은 ‘핵과 첨단 무기’에만 허약하게 의존하는 미국 무력에 끈질기게 저항했다.
쿠바와 베트남은 미국에 저항함으로써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추악한 모습을 전 세계에 폭로했다.

“쿠바와 베트남은 왜 투쟁했는가?
미국 제국주의 침략자와 미국 괴뢰 압제자들이 억압하고 착취했기 때문이다!”

호찌민은 스스로 깨우쳤고, 호찌민이란 이름은 베트남 혁명에서 알파요 오메가인 그 모든 것을 의미했다.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면서 막연히 생각했던 혁명을 깨우쳤고, 쿠바 혁명에서 대배우 피델 카스트로에 비해 조연급 배우에 불과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인 체 게바라란 이름이 어떻게 쿠바 혁명의 상징이 되었을까?
쿠바 전역에 어딜 가나 체 게바라의 형상이 즐비할까?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 지휘를 받으며 2년간 게릴라 활동을 했고, 쿠바 혁명 정부가 들어서자 피델 아래서 약 6년간 고위직을 지내다 쿠바를 떠났다.

아프리카 콩고에서, 남아메리카 볼리비아에서 자신이 주도한 혁명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 처참하게 생을 마쳤다.

(제공 = 송필경)

피델은 반란을 주도하다 실패해 2년간 수감 생활을 했고, 감옥에서 풀려난 뒤 멕시코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치밀하게 군사 반란을 준비해서 결국 쿠바 혁명을 이룩했다. 그리고는 49년 동안 최고 권력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피델의 형상은 쿠바 어디에도 없다. 벽보나 역사 장소에 입간판 정도만 있을 뿐!
유일한 조형물이란 자신의 무덤으로 사용한 두 평 정도 넓이의 바위뿐이다.

레닌 영묘, 터키의 국부 아타튀루크 영묘, 호찌민 영묘, 마오쩌둥 영묘 등은 혁명 주인공의 흔적이다.

그러나 여기 산타클라라 혁명 광장의 거대한 체 게바라 기념 복합단지는 혁명의 조연 흔적이다.

절대 권력자 피델은 자신에 대한 어떠한 우상도 금지했다. 조연 역할을 한 외국인 동료를 혁명의 상징으로 내세운 것은 피델 카스트로의 독특한 위대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피델은 현실 권력자로서 꿈을 꿀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대신 무한한 이상을 꿈꾼 동료를 진정 존중함으로써 미래 세대에게 꿈의 소중함을 웅변조로 보여주었다.

피델은 혁명 권력을 쟁취한 리얼리스트였지만 집권한 처지에서는 불가능을 꿈꿀 수는 없었다.
체는 현실 권력에 안주할 수 있었지만 꿈을 꿀 수 없는 현실을 박차고 불가능을 꿈꿨다.
이런 이질적인 두 사람은 어떻게 조화했을까?

1955년 7월, 29살 청년 피델 카스트로는 망명지 멕시코에서 27살 청년 체 게바라를 만났다.

혁명 정부 시절 정다웠던 피델과 체 (제공 = 송필경)

피델은 2003년 무렵 한 인터뷰에서 “나는 정말이지 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고 말을 한 뒤 체 게바라와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체가 아르헨티나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의 여행 일정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체는 모터 사이클을 타고 자기 나라의 내륙 지방(아르헨티나에서 베네수엘라까지)을 여행하고,
… 이후 볼리비아를 비롯한 여려 라틴아메리카 국가를 여행했습니다.
…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1951년의 군사 쿠데타 이후 1952년에는 강력한 노동자· 농민 운동이 일어나 볼리비아에서 투쟁했으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입니다.
체가 의대 졸업을 앞두고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한 여행은 유명하죠. 그들은 여러 병원을 방문했고, 아마존의 나환자 병원에서 의사로서 일했습니다. 당시 그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칠레의 추키카마타 구리 광산에도 있었고, 이타카마 사막을 횡단했으며, 페루의 마추픽추 유적을 방문했고, 티티카카 호수를 항해하면서 원주민을 알고 그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에도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주제에 관심을 가졌죠. 그는 학생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접했습니다.
그는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여행 중에 아마존에 있는 나환자 병원에서 의사로서 일했고, 그 후에는 과테말라에 갔습니다. 하코보 아르벤스(Jacobo Arbenz;1913-1971) 시절이었습니다. 아르벤스는 군 장교로서 1944년 10월 혁명을 주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 민중반란은 14년 간 군부 통치를 한 호르헤 우비코 장군의 독재를 무너뜨렸습니다.
아르벤스는 1951년 과테말라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아르벤스 정부는 농업개혁법을 공포했는데, 이 법안은 많은 토지를 소유한 미국의 대기업, 특히 유나이티드프루트 회사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미국 CIA는 아르벤스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아이젠아워 대통령의 승인과 중앙아메리카의 몇몇 독재자의 도움을 받아 아르벤스를 실각시키기 위한 군사쿠데타를 조직했습니다. 아르벤스는 1954년 6월에 실각했습니다.
당시 아르벤스 대통령은 과테말라에서 매우 진보적인 개혁을 시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곳에서는 무척 흥미롭고 훌륭한 농업개혁이 진행됐는데, 그 개혁은 미국의 거대 초국적 기업이 수탈하고 착취한 커다란 바나나 공장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 그러자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 농업개혁은 즉시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그 시기에 농업개혁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입 밖에 꺼내는 것은 일종의 범죄와 같았습니다.
… 우리가 몬카다 병영을 습격한 1953년 7월 26일 이후, 많은 동료들이 쿠바에서 과테말라로 갔습니다. 체는 이미 그곳에 있었고, 아르벤스의 실각을 쓰라리게 목격하고 멕시코로 갔습니다.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쿠바에서 멕시코로 간 최초 대원입니다. 그곳에서 이미 가 있던 우리 동료들의 중재로 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체는 피델을 처음 만날 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밤새 피델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새벽녘에 이미 피델이 미래에 조직할 원정대의 군의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쿠바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를 알게 된 것은 일대 정치적 사건이었습니다. 피델은 젊고 똑똑했으며, 자신감 있었고 놀라울 정도로 용감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친밀감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피델은 체의 첫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체는 많은 경험을 했고 혁명적 소신을 지녔으며, 투쟁정신을 가졌고 제국주의를 깊이 경멸했습니다. 무엇이 우리 사상인지 인식했기 때문에 우리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또한 우리의 운동에는 소부르주아를 비롯해 모든 유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로써 체는 민족해방혁명과 반제국주의혁명을 보았지만, 사회주의혁명까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체는 기뻐하면서 즉시 우리의 운동에 가입하고 입대했습니다.”

피델은 이상을 꿈꾼 체를 선지자로서 평생 존중하고 그에 대한 기억을 여기 혁명 광장에 한꺼번에 모아 놓았다. 그래서 이곳을 ‘체 게바라 복합 조형 단지’라 했다.

산타클라라 혁명광장은 드넓었다. 광장 가장 자리 중심에는 체 게바라의 동상이 있다.
1987년,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살해된 지 20년이 지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동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기념비가 있다. 쿠바 최고 조각가와 건축가와 숙련 장인들이 봉사하여 조성했다고 한다.

체 게바라 청동상, 아래에는 쿠바의 영원한 표어 『영원한 승리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가 있다. 체 게바라의 형상과 체가 쿠바를 떠날 때 피델에게 보낸 편지 전문이 쓰여있다. (제공 = 송필경)
체 게바라의 어록과 생전 활동 당시를 조각한 부조 (제공 = 송필경)

여러 문헌을 보면 약 7m(22ft) 높이의 청동상과 기념비에 쓴 글들과 조형 부조들은 체 게바라 삶의 여러 측면을 나타냈다고 한다. 스페인으로 쓴 글은 내가 읽을 수 없었고,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짧아 사진만 대충 찍었다.

기념비에 쓰여 있는 글과 조각 형상은 여러 문헌을 참조하여 대충 정리했다.

『예를 들어, 과테말라와 유엔에서 활동은 조각하였고 쿠바를 떠나면서 피델에게 보낸 작별 편지는 글로 새겨 있다. 장식용 벽에는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와 피델과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있다. 산업 자원부 장관시절 집무 모습이 새겨져 있다.
쿠바 어린이들이 매일 아침 ‘우리는 체 같이 될 것’이라고 낭송하며 수업을 시작하는 장면도 있다.
광장의 끝 부분에는 피델이 ‘체, 모든 사람들이 체와 같아지기를 원한다’고 선언한 대형 광고판이 있다.
‘아르벤스의 과테말라에서 내가 배웠던 한 가지는 혁명적인 의사가 되거나 혁명적인 사람이라면 먼저 혁명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라는 체의 유명한 선언이 동상 아래에 새겨 있다.
청동상을 얹은 대리석 기단에는 체의 모토인 ‘영원한 승리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가 쓰여 있다.』

솟은 동상과 기념비 아래층에는 체의 여러 유품과 사진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체 게바라가 치아를 발치할 때 사용했던 몇 가지 기구였다. 박물관에는 사진기를 가지고 갈 수 없고 핸드폰으로도 찍을 수 없다. 그래서 손바닥 반에 불과한 소형 카메라를 숨겨 들고 갔지만 감시의 눈이 워낙 심했다. 내 딴에는 최대한 순간적으로 이 기구들을 몰래 찍었지만 실패했다.

박물관 바로 옆에는 체와 볼리비아에서 사망한 동료의 유해를 모신 엄숙한 분위기의 영묘가 있다. 묘에는 실패한 1967년 볼리비아 혁명에서 목숨을 잃은 동료 게릴라 군을 새긴 38개의 벽감이 있다. 어두운 조명에 아주 엄숙한 공간이었다. 벽감 중앙에는 불꽃이 활활했는 데 영원히 꺼지지 않게 했다고 한다.

기념물 뒤편으로 가면 왼쪽이 체 게바라 영묘이고 오른쪽이 박물관이다. (제공 = 송필경)

1965년 초부터 쿠바 혁명정부 2인자였던 체가 공식석상에 돌연 나타나지 않았다. 국제 언론은 체가 피델과 정치적으로 중대한 다른 의견을 보여 감옥에 갇혀 있거나 심지어 죽었다는 말이 떠돌았다.

사실 3월 말에 체는 아프리카 콩고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쿠바를 떠났다. 떠나면서 피델에게 작별 편지를 남겼다.

피델은 그런 소문과 음모가 가라앉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1965년 10월 3일에 피델은 체의 작별 편지를 새로운 쿠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구성을 알리는 행사에서 공개했다. 중앙위원회에 왜 참석하지 않았는지 설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피델
지금 이 시간 이런저런 상념들이 떠오릅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
나는 쿠바 땅에 국한된 쿠바 혁명에서 내 몫을 다했다는 느낌입니다. …
나는 당신의 인민들과 작별하려 합니다.…
내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건대, 나는 지금까지 정직하게 또 한결같이 혁명을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 내 잘못이라면 마에스트라 산맥에 있던 시절 처음부터 당신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고, 당신의 지도자적 자질과 혁명가적 기질을 좀더 빨리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구상의 다른 땅들이 나의 미천한 힘을 요구하는군요.…
이제 우리가 작별할 시간이 왔군요.…
우리 인민의 혁명의식과 내 의무의 가장 고결한 부분을 완수한다는 가슴 떨리는 기쁨을 간직하겠습니다.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그곳에 이들이 모두 함께하려 합니다.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뜨거운 혁명의 열기로 얼싸안으며』

이 편지의 마지막 구절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는 체 게바라의 상징일 뿐 아니라 쿠바 혁명의 표어가 되었다.

불과 수 십 명의 게릴라를 이끌고 콩고 혁명을 실현하려는 노력은 무참하게 실패했다. 1966년 7월 체는 피델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변장을 하고 쿠바로 돌아왔다.

콩고로 떠나기 전 누구도 알아볼 수 없게 변장한 체 게바라(왼쪽) (제공 = 송필경)

체는 또다시 수 십 명의 게릴라와 함께 볼리비아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1966년 10월 쿠바를 떠났다. 사실 별 대안도 없고 성공의 보장이 없이 말이다.

1967년 10월 8일 체 게바라는 미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체포되어, 다음날 9일 정오 CIA 명령에 따라 처형됐다.

볼리비아 정부군은 체의 양 손목을 자른 뒤, 그 손목을 쿠바로 보내 체의 죽음을 확인하게 했다. 체의 시체와 게릴라 동료들의 시체는 아무렇게나 묻었다.

피델의 말이다.

『체의 죽음이 확인되자 우리는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죠,
그래서 체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날 나는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되길 바랍니까?”'라고 묻고는 "우리는 체처럼 되길 원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곧 '공산주의 선봉자들이여. 우리는 체처럼 되리라'라는 선봉자들의 표어가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체의 일기가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과 그의 사상, 그의 모습과 불굴의 의지와 본보기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릅니다.
지조와 위엄을 갖춘 완전무결한 사람, 그가 바로 체이고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체 입니다. 똑똑하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죠.
체는 라틴 아메리카의 핍박 받고 억눌린 사람들의 대의명분 이외의 다른 명분이나 이익을 수호하다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 지구상에서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체의 대의명분은 승리할 것이고 지금도 승리하고 있습니다.
체는 전 세계의 본보기이며, 그것이 바로 체입니다. 그 무엇도 파괴할 수 없는 도덕적 힘이 있습니다. 체의 대의명분과 사상은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이 시간에도 승리하고 있습니다. 1997년 체의 시체와 다른 9명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정말로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체의 시체를 발견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그것을 찾아낸 사람들뿐만 아니라, 볼리비아 민중과 볼리비아 당국에도 감사합니다. 그들은 서로 협력해 전력을 다했고 도왔습니다.

체가 남긴 위대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남겼을까요?
가장 위대한 것은 도덕적 가치와 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체는 가장 고귀한 인간적 가치를 상징하며, 정말로 훌륭한 본보기 입니다.
체는 큰 영광과 신비를 창조했습니다. 나는 체를 무척 존경하며 높게 평가합니다.
체는 항상 그런 사랑, 즉 존경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체는 우리에게 많은 기억을 남겨주었습니다. 체는 내가 알았던 사람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특별하며 사심이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수 백 만 명, 아니 수 천 만 명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매우 특별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기와 똑같은 싹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그런 자질을 얻을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혁명은 문명퇴치 운동이나 교육개발 같은 투쟁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모두 체와 같은 사람이 되도록 …  』

1966년 아바나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연대 기구 회의 모습. 혁명의 표어와 함께 체 게바라의 대형 사진이 회의장 배경이다. (제공 = 송필경)

체 게바라 유해는 1997년 10월 17일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30년간의 침묵을 깨고 혁명의 조국인 쿠바로 돌아왔다. 수많은 추도객의 조문 속에 쿠바의 산타클라라에 안장되었다. 일주일간 계속된 장례식의 마지막 날 산타클라라에는 약 50만 명의 추도객이 몰려들었다.
피델은 영묘에 영원한 불꽃을 만들어 체를 언제나 기억하게 했다.

1997년 7월 13일에 체 게바라의 유해가 쿠바로 왔다. 피델을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시신을 응시하고 있다. 피델의 오른쪽에는 체 게바라의 딸 알레이다가 연설하고 있다.

다음은 체가 죽기 전 무렵에 쓴 메모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것은 네가 별에서 왔기 때문이 아니다.
너는 나에게
“인간은 눈물과 고뇌를 가지고 있으며,
빛을 비추고,
또 빛을 가려주는 문을 열고 닫기 위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이 메모에서 체 게바라가 인류에게 품은 애정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있다.

“민중에 대한 사랑이나 인류에 대한 사랑, 정의감과 관대함이 없는 혁명가는 진정한 혁명가일 수 없다.”

인간에게 쏟는 뜨거운 애정이 체의 혁명 동기였다.

혁명이 성공하자 전 세계 좌파 선각자들이 ‘자유 쿠바’로 몰려와 체 게바라를 만났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역시 철학자이자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한 시몬느 드 보부아르 두 사람은 1960년 산업부 장관인 체 게바라의 사무실을 찾았다.
자정 무렵 만난 세 사람은 새벽 네 시까지 대화를 했다.
체 게바라가 죽자 사르트르는 체를 ‘우리시대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극찬했다.

내면적으로 성숙했던 체 게바라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위한 투쟁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에 20세기 가장 의미 있는 철학자에게 극찬을 들었을 것이다.

(제공 = 송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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