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사랑방 '꼰술또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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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랑방 '꼰술또리오'
  • 김해완
  • 승인 2019.09.16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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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의료를 찾아서 4]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 김해완

'어쩌다 보니' 본지와 인연을 맺게 된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김해완 씨가 올 8월부터 격주로 『쿠바의 의료 실험 - 일상의 의학을 찾아서』를 연재키로 했다.

김해완 씨는 아바나 의대를 다니면서, 의대생으로서 보고 또 경험한 쿠바 의료시스템을 '일상의 의학'이라 칭한다. 대단한 의료기술은 없지만,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병)을 해결하며, 병과 의료와 사람을 둘러싼 관계를 바꾼 쿠바의 의료시스템을 소개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지난 회에 쿠바 의료의 거시적인 시스템을 훑어보았다. 이번 회는 그 연장이자, 변주다. 쿠바의 의료 시스템에서도 가장 개성 있는 지점을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려고 한다. 바로 꼰술또리오(consultorio)다. 지난번에 간단히 설명했지만, 꼰술또리오는 마을 주치의가 근무하는 진료소로 각 동네마다 설치돼 있다. 그리고 이 꼰술또리오는 24시간 운영되는 동네 종합 병원인 뽈리끌리니꼬(Policlínico)에 속해 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수준의 정의다. 한국 독자들로서는 여전히 이 장소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타입의 의료 기관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꼰술또리오는 무슨 일을 하는 곳일까? 생생하게 체감하려면 다른 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의료’에 대한 상(想)을 버리고 한 번 ‘동네 사랑방’을 떠올려보라. 여느 사랑방이 그렇듯이 이곳에서는 노인들이 모이고, 아이들을 데려오는 젊은 엄마들도 많으며, 옆집 친구 아들이 미국으로 건너 간 이야기부터 앞집 아저씨 바람 난 이야기까지 여러 스캔들이 오고간다. 차이점이라면 이곳에는 병과 약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병증에서부터 똥 이야기, 동네 불륜 사건까지 온갖 주제로 수다를 떠는 의사와 간호사와 환자의 사랑방!

꼰술또리오의 입구 (제공=김해완)
꼰술또리오의 입구 (제공=김해완)

이 사랑방의 겉모습은 푸근하기보다는 금욕적이다. 꼰술또리오는 대부분 건물 1층에 위치해 있고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노인들을 배려해서가 아닌가 싶다) 그 앞 벽면에는 꼰술또리오가 소속된 행정구역을 알려주는 간판이 붙어 있다. 들어가 보면 환자들이 앉아 있는 대기실이 가장 먼저 나온다. 가습기가 있고, 책꽂이에는 잡지들이 꽂혀 있고, 정수기와 함께 인스턴트 커피가 준비돼 있는 한국의 쾌적한 병원 대기실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깜짝 놀라서 ‘동공 지진’이 올지도 모른다. 뭐가 없기 때문이다. 낡은 의자 몇 개와 벽에 붙어 있는 예방 포스터가 전부다. 대기실을 지나 진료실에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서류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낡은 서랍과 잘 안 돌아가는 선풍기, 의사가 사용하는 책상 하나. 이것만 보면 꼰술또리오는 문 닫기 직전인 메마른 사무실 같다. 그렇지만 외관과 상관없이 꼰술또리오는 정감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시냇물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 덕분이다.

쿠바 의대생들은 이 사랑방 풍경에 매우 익숙하다. 이들은 1학년 때부터 이곳에서 당직을 선다. 당직이라니, 고작 1학년이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다고 병원에 온단 말인가? 물론 이들이 일을 하러 가는 것은 아니다.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의사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의료-사랑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이 공부에 묘수는 따로 없다. 오로지 관찰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네 시간 동안 진료소 구석에 서 있으면 지금 내가 뭘 배우고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다리도 아프고, 귀도 아프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다. 그렇지만 의대생들은 일주일에 네 시간은 반드시 꼰술또리오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왜 가족주치의들은 수다쟁이일까? 그리고 의대생들은 이 수다 속에서 무엇을 배워야만 하는 것일까? 일차적으로 나는 이 현상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이 많은 것은 그냥 쿠바인들의 자연스러운 특징이다. 의료 부문이 아니더라도 쿠바인들은 어디서나, 언제라도 말이 많다. 버스정류장에서 모르는 사이라도 흥겹게 이야기를 나눈다. 만약 대화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날 특별히 안 좋은 일이 있었거나 마음이 병든 자라고들 생각한다. 즉, 수다는 당위가 아니라 체질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수다스러운 민족성이 예방 의학을 만나면 반전이 일어난다. 수다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배로운 자원이 된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물과 수술이 필요하지만, 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삶을 바꿔야 한다. 이미 드러나 버린 병의 싹을 어떻게 잘라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전자라면, 후자는 생활 습관 속에 잠복하고 있는 병의 맹아를 더듬는다. 예방은 간단해 보이지만 기실 더 까다로운 작업이다. 정해진 매뉴얼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방을 업으로 삼는 의사는 우선 환자의 생활부터 파악해야 한다. 의료 기계가 자동적으로 도출해내는 건강 수치가 아니라, 환자 자신도 잘 모를 습관의 윤곽을 포착해야 한다. 환자와 24시간 붙어 있을 수 없는 의사가 이런 귀중한 자료를 얻는 방법은 바로 환자의 수다를 통해서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기를 좋아한다. 특히나 상대방이 나에게 진심으로 귀기울여주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신뢰가 한 번 쌓이면, 내 삶의 아픈 부분을 들어보고 싶고 또 치료해주고 싶다는 의사에게 하지 못할 이야기는 없다.

꼰술또리오 내부 (제공=김해완)
꼰술또리오 내부 (제공=김해완)
꼰술또리오 내부의 모습. 의사와 간호사가 상의를 하고 있다.(제공=김해완)

수다와 예방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시를 들어보겠다. 어느 날 가족주치의는 페르난도 아저씨가 성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페르난도의 아내 또한 성병 검사를 해야만 한다. 성병은 성생활을 통해 옮는데다가,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사태가 악화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환자는 쭈뼛거리면서 말을 꺼낸다. 자기 아내보다는 건너 집 로사 아주머니를 검사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아하, 의사는 곧장 이해한다. 페르난도 아저씨는 숨겨놓은 애인이 있구나! 이렇게 가족주치의는 동네 사람들의 숨겨진 불륜 관계를 얼추 다 파악하게 되고, 덕분에 성병이 발병하면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예시다. 마리 할머니가 찾아왔다. 그녀는 최근에 기억력이 급격하게 감퇴했다. 그 날도 신분증 대신 여권을 가져와서 처방전을 받아가려다가 간호사와 한창 실랑이를 벌였다. 할머니의 가족들은 그녀가 단순히 늙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의사는 할머니가 최근에 이 동네에 사는 딸의 집으로 이사를 왔고, 원래 살던 집은 세를 주려고 준비 중이라는 사정을 들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그 집에서 그녀의 남편과 둘째 아들이 생을 마쳤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적응력이 떨어지는 노인들로서는, 과거의 소중한 기억을 가까이에 두는 것이 심신 안정을 위해 더 낫다. 결국 의사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서 조언한다. 두 집 중 하나를 꼭 비워서 세를 줘야 한다면, 차라리 딸이 할머니의 집으로 이사를 가라는 것이다.

의대생들이 배워야 하는 수다의 기예는 바로 이런 것들이다. 평범한 수다 속에 얼마나 값진 삶의 조각들이 숨어 있는지, 어떻게 해야 환자의 삶에 밀착할 수 있고 또 개입할 수 있는지, 그리고 환자의 속마음을 듣기 위해서는 무슨 신뢰가 쌓여야 하는지 말이다. 쿠바인들이 어떤 의대생에게 ‘너는 미래에 좋은 의사가 될 거야’라고 칭찬해줄 때, 거기에는 그가 좋은 머리와 좋은 손뿐만 아니라 ‘좋은 귀’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꼰술또리오에 점검을 받으러 온 아이들과 엄마들. 가족주치의는 동네의 아이들을 전부 다 알고 있다. (제공=김해완)
꼰술또리오에 점검을 받으러 온 아이들과 엄마들. 가족주치의는 동네의 아이들을 전부 다 알고 있다. (제공=김해완)
꼰술또리오에 점검을 받으러 온 아이들과 엄마들. 가족주치의는 동네의 아이들을 전부 다 알고 있다. (제공=김해완)

자, 좋은 귀를 가진 가족주치의는 꼰술또리오에서 어떤 업무를 볼까? 가족주치의가 주력하는 의료 부문은 촉진(Promoción)과 예방(Prevención)이다. 촉진의 대상자는 모든 동네 주민들이다. 아프든 건강하든, 청년이든 노년이든, 다들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할 의무와 최근 유행하는 병을 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 (모든 의료가 세금으로 이루어지는 쿠바에서는 ‘의무’가 빈 말이 아니다. 의료가 무료라고 해서 돈이 안 드는 것은 아니라는 협박성 포스터가 병원마다 붙어 있다.) 따라서, 주치의는 사람들과 수다를 떨 때마다 중요한 건강 정보를 수집할 뿐만 아니라 또 제공한다. 잔소리의 형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예방을 위해서는 더 섬세한 전략이 필요하다. 예방의 대상자는 발병 확률이 높거나 건강을 해칠 리스크에 노출된 주민들로 제한된다. 이때 간호사는 훌륭한 조력자가 될 수 있다. 프로페셔널한 쿠바 간호사는 구글 뺨치는 검색 엔진이다. 이름만 대도 그 사람의 집 주소, 방 개수, 냉장고 상태, 월급 상황, 최근에 싸운 이웃집까지 다 정보가 나온다. 한국 같았으면 사생활 침해라고 펄쩍 뛸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주거 환경과 삶의 전반을 파악하는 것이 예방 전략을 세우는 기본이다.

촉진과 예방이 주치의가 가슴 속에 새긴 진료의 방향성이라면, 주치의의 실제 현실은 종이와의 전쟁이다. 주치의가 하루 중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쓰는 일’이다. 처방전을 써주는 것이다. 혹은 처방전을 써달라고 떼를 쓰는 환자와 싸우고 또 달래는 것이다. 그렇게 아침 여덟 시부터 정오까지 진료소에서 업무를 끝낸 의사는 점심시간을 거친 후, 오후에는 오전에 진료한 환자들의 임상 기록을 또 두 부씩 일일이 필기한다. 그리고 진료소 문을 닫은 후에는 거동이 불가능한 환자나 임산부를 방문하러 간다. 이들에 대한 임상 기록은 또 집에서 써야 한다. 그렇게 의사의 하루는 사람들로 꽉 찬다.

누구는 이 정신없는 상황을 보고 혀를 차며 반문한다. 간호사도 할 수 있는 이런 기본적인 업무를 보려고 10년씩이나 의사 공부를 할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이 업무는 간단하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토대가 된다는 의미로서 기본이다. 이것이 쿠바 의료가 믿고 있는 ‘의학의 기본’이며, 실제로 쿠바 의료를 떠받들고 있는 대들보다. 꼰술또리오가 기본을 튼튼히 다져줘야 뽈리끌리니꼬 또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뽈리끌리니꼬 정도로 규모가 커지면 벌써 의사와 환자 사이에 삑사리가 나기 시작한다. 의사들이 환자의 임상 기록을 제대로 보지 않고, 먹어서는 안 되는 약을 처방해주는 사고가 종종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실수를 잡아내는 것 역시 가족주치의다. 결국 모든 것은 기준의 문제다. 기술과 자본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더 큰 전문병원에서 일하는 게 의사에게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꼰술또리오는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최소의 것들만 갖춰진 꼰술또리오에서 쿠바 최대의 재산인 예방의학이 실천되고 있다. 간호사들은 페트병을 약통으로 재활용하고, 의사들은 수다 떠는 입과 찾아가는 발로 약을 대체하고, 환자들은 각자 재량껏 부족한 용품들을 채워다준다. 개선돼야 할 점이 수두룩한 꼰술또리오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발길과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 한 이곳은 ‘동네 사랑방’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에 유토피아가 없다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어려움 속에서만 우리는 우리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병과 아픔의 경험 속에서만, 우리는 타인과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뽈리끌리니꼬(policlínico)의 내부 모습이다. 환자들이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고, 벽에는 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제공=김해완)
뽈리끌리니꼬(policlínico)의 내부 모습이다. 환자들이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고, 벽에는 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제공=김해완)

 

김해완(쿠바 아바나대학 의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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