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약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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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약과 나
  • 김현주
  • 승인 2019.10.25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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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약 30주년 특별기고]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울산지부 김현주 회원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전국을 민주화 열기로 달아 올리던 그 때, 보수적이라고만 치부됐던 약사사회에서도 호헌철폐를 위한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이후 서명을 주도했던 약사들은 자신의 지역 곳곳에 뜻 있는 약사들을 규합해 단체를 만들었다. 부산의 '약사의 소리', 서울의 '건강사회실현약사회', 대전의 '타래', 광주·전남지역의 '건강사회실현약사회', 대구의 '청년약사회' 등이었다. 이들 지역 약사 조직들은 지난 1988년부터 서로 교류해 오다 지난 1990년 1월 21일 전국 단일 조직인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이하 건약)'를 창립했다.

이보다 앞서 1987년 겨울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1989년 4월엔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사회가 창립됐고, 이어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노동건강연대 등이 건약과 함께 연달아 창립되면서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이란 이름으로 또한 보건·의료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연대활동을 펼치고 있다.

건약은 보다 건강하고 인간다운 사회 건설을 위해, 혹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건강이 구현되는 총체보건 실현을 위해 약사로서, 지식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사회적 실천에 임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이 국민의 건강을 지켜줄 수 있음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것을 이념으로 삼고 있다.

이에 따라 건약은 노동자 건강 문제에 대한 '산업재해 활동', 도시 빈민을 위한 진료소 활동, 의료보장제도의 연구와 실현을 위한 실천활동을 펼쳐왔으며 현재는 전반적 보건의료체계 변화와 의료 영리화 저지를 위한 역할을 실천하고 있다.

본지는 내년 창립 30주년을 맞는 건약의 역사와 활동을 돌아보고 기념하기 위해 기획연재를 진행키로 했다. 그 세번째로 건약 울산지부 김현주 회원의 기고글을 게재한다.

- 편집자

 

건약 울산지부 김현주 회원(제공=김현주)

건약 30주년을 맞아 글을 쓰려고 하니 갖가지 생각들이 떠오르고, 그동안 함께 했던 사람들과 활동들이 되살아나면서 아련한 감상에 젖어든다.

내가 처음으로 건약의 문을 두드린 것은 1992년이었다.

건약 부산경남지부 산업보건분과에 들어가서 산업재해, 직업병과 관련한 공부도 하고, 인의협과 건약이 함께 운영했던 노동상담소에서 산재 상담, 작업장 실태 조사 등도 했다.

돌이켜보니 건약 새내기 때는 약사라고 불리는 것이 참 어색하고 또 불편하기도 했었다. 약사 면허증만 있을 뿐 약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약사로서 사명감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약국 업무 보다는 사회활동에 더 관심이 많았기에 약국 근무가 끝나기 바쁘게 건약 사무실로 달려갔었다. 그 곳에는 뜻을 같이 하는 선배, 동기들이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건약 모임 후에는 술잔을 기울이며 직업 현장(약국, 병원 등)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 건약 활동 등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열심히 활동했던 부산 건약을 떠나게 됐다. 내가 울산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송별회 자리에서 눈물바람 했던 기억에 다시 코끝이 찡해온다.

울산에서 약국을 하면서부터 약사 직능에 대해서 고민하게 됐다. 약 가격 때문에 손님(?)들과 실랑이를 하고, 나의 조언보다 전문 카운터의 말빨이 더 먹히는 현실이 답답했다. 게다가 한약분쟁이 일어나서 밥그릇 싸움이나 하는 한심한 집단으로 비춰지는 것이 속상하기도 했다. 내 기억으로는 한약분쟁을 기점으로 전국 건약이 올바른 약사 직능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건약의 활동이 일반 약사들과 함께 하는 사업에 더 집중할 것인가, 소위 말하는 사회변혁 운동에 더 매진할 것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이 계속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건약 부경지부 울산 분회를 창립하였다.(그때는 울산이 광역시 되기 전이어서 부산경남지부 산하에 있는 울산 분회로 창립했고, 이후 1997년에 울산지부가 됐다.)

때는 1995년. 고작 일곱 명의 약사들이 모여서 그 동안 약국을 하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 문제들(카운터 문제, 지역에서 약사의 역할, 약사의 근무 환경 등)을 조금씩 바꾸고자 또 한편으로는 약사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임상공부도 열심히 하고자 의기투합했다.

매주 모여서 공부하고 토론한 것을 바탕으로 ‘약, 제대로 알고 먹읍시다!’라는 꼭지를 맡아서 현대자동차 노보에 회원들이 번갈아가면서 매월 한 편씩 글을 적었다. 학교약사를 맡아서 학생들에게 직접 약물 교육을 하고, 주민들에게 ‘약의 올바른 복용법’에 대해 강의도 하면서 약에 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활동을 했다. 또 ‘건강공동체’에 요청해 울산시 전체 약사들과 함께 하는 ‘임상공부’, ‘만성질환 강좌’를 열어서 관행적으로 써오던 약물 요법을 좀 더 객관적이고 신중하게 바라보려는 노력을 했다.

1995년 1월 열린 약사의 미래를 밝히는 약사교실 (제공=건약)

1990년대 후반쯤에 전국적으로 의약분업에 대한 논의가 불붙기 시작했다. 약국이 무려 40여 년 동안이나 담당 해왔던 1차 의료기관으로서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음에도 심각한 약물 오남용을 줄일 수 있고, 약의 전문가로서 약사의 역할을 높일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하면서 우리들은 의약분업 논의에 동참했다.

의약분업 후 약사사회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문전약국으로 처방전이 쏠리면서 약국의 개·폐업이 늘어나고 울산을 떠나가는 건약 회원들이 생겨났고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특구내 영리병원 설립 허용’으로 시작된 ‘의료민영화 정책’에 반대하면서 나의 고민은 약사 직능을 넘어 보건의료제도 전반으로 확대됐다. 또 글리벡 싸움과 푸제온 싸움을 바라보면서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약은 더 이상 약이 아니다!’ ‘약은 단지 상품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한미 FTA 반대 싸움을 하면서 의약품 특허, 의약품 접근권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고 PPA 사건을 계기로 의약품 안전성 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이렇게 나는 건약의 활동을 통해서 보건의료와 의약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어지고 생각이 자라났다. 또 건약을 통해서 만났던 많은 분들 덕분에 내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우리 건약이 이제 서른 살이 되었다.

‘건강한 사회, 건강한 약사, 건강한 주민’이 한 데 어우러지는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우리들에게 힘찬 박수를! 앞으로도 계속 잘 살아가자고 열띤 응원을!!

 
김현주(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울산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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