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맹가리 소설,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상태바
[행복한 책읽기]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맹가리 소설,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 이주연
  • 승인 2003.09.0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동고속도로를 활주해 한적해진 동해안을 거닐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연이은 집중호우로 늦여름의 휴가계획은 접어야 했다. 방콕한 채 침대에 누워 페루 해변 한 까페 테라스에 서 있는 주인공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페루 해변은 새들이 먼거리를 날아와 떨어져 죽는 부드럽고 따뜻한 모래사장이다. 쿠바 혁명을 끝으로 더 이상의 고매한 명분도 이성간의 사랑도 기대할 것이 없어진 주인공은 마흔 일곱의 나이에 이 곳 까페의 주인이 되어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다.

사육제가 끝나던 날, 주인공은 바닷속에 뛰어들어 자살 직전의 그녀를 구해낸다. 해변가에서 여흥을 즐기던 세명의 배우들이 그녀를 겁탈했던 것이다. 그녀는 주인공에게 그곳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간절한 키스로 애원한다.

순간 주인공은 그 동안 잃어버렸던 환상을 되찾는다. 세상의 끝에서 그녀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은 충동으로 얼굴 표정이 맑아진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내젖는다. 자기 안에 숨어있던 젊음과 어리석게도 솟아오르는 희망이 절망적으로 여겨지기도 하면서….

때마침 그녀의 남편인 듯한 오십대의 영국인과 운전수, 투우사 복장의 청년이 찾아온다.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심리치료를 받으러 가자는 영국인 남편을 따라나선 그녀가 뒤돌아 보았을 때, 까페는 비어있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이전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에는 상처받은 인간의 마음속에 간직하고픈 환상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하는 비장함이 가장 큰 여운으로 남았다. 하지만 지금은 환상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을 되살리고 싶은 욕망이 나를 더 사로잡는다.

환상이란 자고로 현실 속에는 없는 둣한 상상력이다. 상상력이란 생각이나 마음의 힘에서 나온다. 사랑이나 이상, 행복에 대한 환상만큼 연약한 인간에게 상처를 입히면서도 죽기전까지 집착하게 하는 것은 없는 것같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쿨(cool)’할 것이 요구된다. 차가운 경쟁사회에서 생존하려면, 각자 알아서 환상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면역력을 길러야 하지 않겠는가. 바쁘고 피곤한 일상속에, 아니면 불경기나 실업의 불안속에 사람들의 마음은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기 힘들어진다. 환상은 점점 멀어져가고, 마음은 고독속에 짓눌리면서도, 가까운 사람들을 챙기는 것조차 피곤해진다.

언제부턴가 새들처럼 페루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쉬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죽은 듯이 쉬면서, 정작 되살려야 할 것은 환상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싶다. 나를 이제까지 살게해준 즐겁고도 아픈 추억은 바닷속에 던져버리고, 그러고도 살고 싶은 욕망이 파도처럼 밀려오면 난 기도할 것이다. 나에게 마음속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이주연(세브란스 치과, 연세 치대 91 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