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와 가족 사랑의 상관관계?
상태바
비누와 가족 사랑의 상관관계?
  • 김해완
  • 승인 2020.01.21 1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상의 의료를 찾아서 12]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 김해완

'어쩌다 보니' 본지와 인연을 맺게 된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김해완 씨는 지난해 8월부터 격주로 『쿠바의 의료 실험 - 일상의 의학을 찾아서』를 연재를 시작했다.

김해완 씨는 아바나 의대를 다니면서, 의대생으로서 보고 또 경험한 쿠바 의료시스템을 '일상의 의학'이라 칭한다. 대단한 의료기술은 없지만,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병)을 해결하며, 병과 의료와 사람을 둘러싼 관계를 바꾼 쿠바의 의료시스템을 소개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아바나의 고층 건물에서 찍은 풍경사진. 이 건물은 20세기 초에 지어졌다. 당시 쿠바의 발전 수준을 짐작케한다. (제공 = 김해완)

몇 년 전, 캐나다의 한 제약회사가 쿠바를 배경으로 설사약 광고를 찍었다. 자국의 추운 겨울을 피해서 쿠바로 휴가를 떠나는 캐나다인들을 겨냥한 광고였다. 쿠바의 바닷가에서 설사약 없이 음식을 시켜먹었다가는, 그 누구도 당신을 구해줄 수 없으리라!

참으로 진솔한 광고가 아닐 수 없다. 위장이 약하지 않은 나 또한 쿠바에서 ‘토사곽란’ 수준의 배탈을 세 번은 겪었다. 어디 설사약뿐이랴? 쿠바를 주제로 만들 수 있는 광고는 무궁무진하다. 여행객들이 가져가야 할 것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휴지는 물론 물티슈도 가져가야 하고, 비누도 챙겨야 하고, 생리대도 가방 곳곳에 끼워 넣어야 한다.

외부인이 쿠바에 대한 뜬소문만 듣고 유난을 떠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들은 모두 쿠바에서 120% 유용하며, 외지인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늘 다급하게 구하는 물건들이다. 쿠바의 얼굴인 수도 아바나의 풍경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깨끗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길거리에는 쓰레기가 굴러다닌다.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센트로 아바나의 골목길에서는 오줌 지린내가 난다. 청소를 언제 했는지 알 길 없는 낡은 버스에는 손잡이와 의자에 찌든 때가 묻어 있다. 로컬 식당에서 판매하는 음식은 관광객은 물론 현지인에게도 종종 식중독을 선물한다. 냄새 나는 물이 길거리를 흘러다니고, 공공 화장실은 물이 안 나오는 경우가 태반이어서 여러 사람들의 용변이 그대로 쌓여 있는 변기에서 형용할 수 없는 냄새가 올라온다. 

가장 큰 문제는 위생용품이 너무나 귀하고 또 비싸다는 것이다. 정부가 운영하는 세제 가게인 ‘물과 비누(Agua y Jabón)’ 밖에는 늘 기다란 줄이 있다. 제품의 가격은 한국과 동일하거나 심지어 더 비싸다. 위생용품의 가격상승은 2011년에 쿠바 정부가 이 품목에 대한 정부 보조를 철회하면서 시작되었다. 국산품이 거의 없다시피 한 쿠바이니 모든 게 다 수입품인 셈인데, 미국의 경제봉쇄 속에서 그 수입조차 원활할 리가 없다. 이 상황에서는 여행객뿐만 아니라 여행 나온 쿠바인들도 비누를 싸들고 돌아가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해서 쿠바에 일방적으로 ‘더럽다’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을까? ‘개발이 덜 된 여느 제3세계 국가’ 중 하나로 치부할 수 있을까? 쿠바의 의료 정책에 대한 안팎의 평가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위생을 ‘병인(病因)을 멀리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라고 정의한다. 모든 생명은 외부와의 소통이 끊기는 순간 그 생(生)도 멈추도록 설계되어 있으니, 외부 환경이 호의적일수록 생명 또한 건강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달리 말하면, 위생은 쿠바가 그토록 강조하는 예방의학과 일차 진료의 핵심 키워드다. 세계보건기구가 80년대에 일차 진료를 권장하자마자 곧바로 실천에 돌입해서 5년 만에 성과를 냈던 쿠바 의료가 이를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지난 반세기 동안 확연히 낮아진 유아사망률과 늘어난 평균수명은 위생의 중요성이 무시되었다면 불가능했을 업적이다.

쿠바 정부 소속 기구인 ‘위생과 전염병(Higiene y Epidemiología)’은 분명하게 공언한다. 깨끗한 물, 맑은 공기, 조직적인 쓰레기 처리를 통해 전염병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지는 행동을 통해서 증명된다. 사실 객관적인 통계는 크게 나쁘지 않다. 쿠바에서는 전 국민의 95%에게 깨끗한 물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러한 쿠바의 상·하수도 접근율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과 카리브해를 통틀어서 선두 2위에 해당한다.

또, 쓰레기가 방치되는 것은 의지 부족이 아니라 석유 부족과 차량 부족 탓이 크다. 작년에 일본에서 100대 가량의 쓰레기차를 기부 받은 후 아바나에서는 일주일에 세 번씩 정기적으로 동네 쓰레기가 수거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충분하다 말할 수 없는 조치이지만, 재작년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동네 위생 상태는 개선되었다. 이는 쿠바가 더 많은 자원을 활용할 수만 있다면 더 폭 넓은 개혁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밖의 구멍들은 인력으로 메워진다. (돈은 없으나 사람은 많은 쿠바답다.) 보건부에서는 수시로 동네마다 위생 관리자들을 보낸다. 회갈색의 유니폼과 모자를 쓴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물탱크의 관리상태를 물어본다. 전염병을 옮기는 모기가 고인 물에 알을 까기 때문이다. 만약 아무 생각 없이 바가지를 마당에 내놓았다가 빗물이 며칠씩 고이게 된다면 이 또한 위생관리자들의 처벌 대상이 된다. 뎅게(뎅기열)가 발생한 마을에 가서 소독약을 뿌리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이쯤 되면 헷갈린다. 쿠바의 위생 수준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눈앞에 보이는 풍경과 객관적으로 공표된 정보가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이럴 때는 참/거짓을 따지기 이전에 시선을 틀어야 한다.

우선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더러움이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신체적 반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비위생적인 환경을 역하게 느끼는 이유는 면역계가 긴급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는 병인들이 득실거리니 어서 피하라는 것. 그런데 면역계란 사람의 성격만큼이나 가지각색이다. 척추동물은 선천성 면역계뿐만 아니라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발달하는 후천성 면역계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항원과 더 많은 접촉을 할수록 면역계는 더 풍부해진다. 따라서 자연과 단절된 채 사방에 콘크리트를 깔고, 또 그곳의 먼지를 매일 쓸어낼 청소부들을 고용할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은 나라들은 역설적으로 면역계가 약한 인간들을 키워낸다. 거꾸로 쿠바처럼 위생 상태에 군데군데 구멍이 난 곳에서는 면역계도 강하게 훈련받는다. (위생 관리가 더 미흡한 인도에서 살다 온 사람들은 쿠바의 위생 수준이 아주 높다고 평가한다.) 결국 쿠바에서 ‘더럽다’고 여겨지는 기준은 철저히 쿠바인들의 신체에 맞춰져야 한다.

두 번째 포인트는 쿠바의 위생 관리의 실패가 발전의 부진이 아니라, 발전의 몰락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쿠바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단지 쿠바가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발전을 ‘아직 이루지 못한’ 저개발국가로 인식한다. 그러나 쿠바는 콜럼버스 개척 시절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근대의 선두까지는 아니어도 2군에는 들어가던 땅이었다. 20세기 초반에 아바나에 세워졌다는 고층 건물들을 보면 대단하다. 혁명 이후로 소련의 지원을 받고 세운 인프라 역시 수준이 높다. 즉, 오늘날 아바나의 생활 배치는 최신식은 아닐지언정 분명 근대도시의 문법을 따라가고 있다.

문제는 지금 쿠바가 이 도시 생활을 안정적으로 굴릴 만큼 충분한 자원을 끌어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민들의 손으로 직접 생활환경을 관리할 수 있는 시골이나 소도시들은 위생 상태가 아바나보다 낫다. 달리 말하면, 아바나의 문제는 ‘대도시’라는 생태계가 얼마나 쉽게 비위생적인 상태에 빠질 수 있는 허약한 환경인지를 증명한다. 수입의 감소에 발 맞춰서 아바나의 규모를 축소할 수 없다는 게 현재 쿠바의 딜레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위생 수준을 높이겠다는 의지만으로 간단히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위생 상태가 아바나 비에하 다음으로 심각한 센트로 아바나의 풍경. (제공 = 김해완)

세 번째 포인트는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시스템이 굴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회에서 말했던 것처럼 쿠바는 낙후된 상수도 시설 때문에 운반 과정에서 절반가량의 물을 잃는다. 하지만 각 마을마다 물 나오는 시간을 조절함으로써 어쨌든 95%의 인구가 물을 쓸 수 있게 한다. 패인 구멍마다 물이 고여서 모기의 번식을 유발하는 도로를 당장 수리하지는 못하지만, 가정집의 고인 물은 관리함으로써 가장 가까이에서 발생하는 위험은 막아낸다. 쓰레기를 그때그때 치울 역량은 부족하지만, 자동차처럼 운용가능한 자원이 들어오면 우선적으로 처리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뿌리 뽑히지 않는다. 그러나 가능한 모든 보조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이것이 암이 되어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은 막는다.

결국 이번에도 쿠바를 한 마디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더러운 것 같으면서도 마냥 더럽지 않고, 병인이 사방에 퍼져있을 것 같은데 또 사람들은 건강하게 살고 있다. 피카소의 그림처럼 이곳의 현실은 한 눈에 파악되지 않고 울퉁불퉁하게 패이거나 도드라진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참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건강한 삶을 보장하는 실질적 보호막이 바로 집, 더 정확히 말하면 가족이라는 것이다. 아바네로(Habanero : 아바나에 사는 사람들)들은 모두 자기가 사는 도시의 위생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유일한 안식처이자 ‘핫플레이스’는 자기 집이다. 깨끗한 화장실이 있고, 깨끗한 밥이 있으며, 청결을 유지하는 노동을 함께 나누는 가족이 있는 장소다. 물론 낙후된 주거 환경 때문에 집에서도 늘 문제가 끊이질 않지만, 그럼에도 쿠바인들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집을 쓸고 닦는다. 청빈(淸貧)의 살아있는 예시인 셈이다.

남부 소도시인 시엔푸에고스의 풍경. 아바나보다 훨씬 더 깨끗하게 관리된다. (제공 = 김해완)
남부 소도시인 시엔푸에고스의 풍경. 아바나보다 훨씬 더 깨끗하게 관리된다. (제공 = 김해완)

그리고 이 청빈을 만들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어머니는 언제나 집안의 중심이자 마을의 중심이다. 사람들이 친구를 불러서 술 마시는 술집도 집이요, 가족끼리 식사하는 밥집도 집이며, 커피를 마시면서 공부하는 카페도 곧 집이기 때문이다. 쿠바인들은 특별시기에 물이 똑 떨어졌을 때, 양동이 두 개로 현명하게 집안을 청소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여전히 아련하게 기억한다. 비누가 귀해질수록 사랑이 진해지는 가족, 재미있는 상관관계가 아닌가.

그래서 다시 한 번, 가정의학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쿠바에서 가족은 참된 의미로 건강을 지키는 기본 단위이기 때문이다. 80년대에 쿠바가 가정의학을 처음 도입했을 때 이런 결과를 예측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쿠바의 가정집은 실제로 오늘날 쉽게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경제 상황에 대항하여 가족구성원들의 건강을 지켜내고 있다.

그리고 이 장소에는 위생뿐만 아니라 관계가 깃든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커뮤니티의 거점으로서, 가정집은 안팎으로 오염 물질을 여과하는 막(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오늘날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은 낡음을 더러움의 동의어로, 그리고 위생을 돈과 비례하는 조건으로 만드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아바나의 청빈한 가정집에서 이 상관관계는 와해된다. 깨끗하게 세탁된 옷을 입고 더러운 길거리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는 끊이질 않는 가족의 관심이 함께 하고 있다.

최근 이탈리아로 이사를 간 쿠바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들 친절하지만 결국 자기들만의 깨끗한 ‘거품’ 속에서만 살아간다고. 이 거품 속에서는 설사약을 상시적으로 구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거품에 씻겨져 내려간 것들도 분명 있다. 튼튼한 면역계라던가, 집에 스며드는 사랑스러운 감정 같은 것들 말이다.

완벽하게 깨끗한 말레꼰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와 동시에 쿠바다운 분위기고 사라질 것이다. (제공 = 김해완)

 

김해완 (아바나 의대)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