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탈출, 쿠바에 필요한 단 하나의 처방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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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 탈출, 쿠바에 필요한 단 하나의 처방약
  • 김해완
  • 승인 2020.02.0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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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의료를 찾아서 13]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 김해완

'어쩌다 보니' 본지와 인연을 맺게 된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김해완 씨는 지난해 8월부터 격주로 『쿠바의 의료 실험 - 일상의 의학을 찾아서』를 연재를 시작했다.

김해완 씨는 아바나 의대를 다니면서, 의대생으로서 보고 또 경험한 쿠바 의료시스템을 '일상의 의학'이라 칭한다. 대단한 의료기술은 없지만,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병)을 해결하며, 병과 의료와 사람을 둘러싼 관계를 바꾼 쿠바의 의료시스템을 소개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까마구에이에 있는 핀래이 의과 대학. 19세기에 황열병을 발견한 쿠바 의사 까를로 핀래이의 이름을 땄다. 백신 개발로 유명한 핀래이 연구소 역시 이 의사를 기리고 있다. (제공=김해완)

“이게 다 미국의 경제 봉쇄 때문이야!” 쿠바 어디를 가든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 말을 듣게 된다. 쿠바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거나 방어해야 할 때면 무조건 등장하는 단골 대사다. 이 한마디가 가진 효력은 무적이다. 설령 대화의 맥락이 어긋나거나 논점이 흐려지더라도 상관없다.

경제 봉쇄가 풀리면 정말로 쿠바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느냐고, 어쩔 때는 심술궂게 어깃장을 놓고 싶다. 외부의 적에 시선을 쏟느라 내부의 문제를 놓치는 것 아닌가 우려도 든다. 하지만 이내 철없는 마음을 접는다. 밖에서 편하게 살다가 잠시 쿠바에 들린 외국인 주제에, 쿠바인들이 사활을 걸고 견디고 있는 국제 상황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쿠바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훨씬 더 난리를 쳤을 것이다. 작년에 일본이 삼성을 겨냥하며 (이제는 그 이름도 가물가물 해져가는) 반도체 핵심 부품 하나를 수출 규제 했을 때, 한국이 발칵 뒤집어졌던 것을 생각해보라. 한 나라의 경제를 악의적으로 말살시키는 ‘경제 봉쇄’를 당했노라며 두 주먹 불끈 쥐고 핏대를 세우지 않았는가?

글로벌 시대,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 없이는 밥벌이를 할 수 없는 거미줄 같은 세상에서  고립은 곧 죽음이다. 말 그대로다. 이 말을 쿠바보다 더 처절하게 실감하는 나라는 드물다. “근대사에서 가장 복잡하고 또 오래 지속되고 있는” (<Fifty Years of U.S. Embargo: Cuba’s Health Outcomes and Lessons>,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경제 봉쇄 대장정은 쿠바가 소련과 동행했던 30년과 소련 없이 홀로 서기를 시도하는 30년으로 나뉜다. 고립 상태에서 홀로 서기라니, 이것은 형용모순이다. 똑바로 서기는커녕 바닥에 주저앉아서 도태되지만 않아도 다행일 것이다. 물자가 똑 떨어진 상황에서 쿠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창의력을 발휘하지만, 이것들 모두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결국 처음의 한 마디가 다시 튀어나온다. 아, 미국이 경제 봉쇄만 하지 않았더라도……!

1963년, 미국도 경제 봉쇄를 감행해야 했던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혁명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미국계 회사들이 쿠바 내에서 소유하고 있었던 재산을 압수당한 것이다. 항의하는 미국인들은 물론 깔끔하게 추방당했다. 혈기 넘치는 젊은 미국이 이를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메리카, 이 땅은 사유재산 보호를 곧 자유의 참된 의미로 여기겠다는 동의하에 태어난 나라였다. 신성불가침 조약을 침범한 쿠바의 도전은 반드시 보복으로 되갚아져야만 했다.

마감 시간을 앞둔 동네 약국의 풍경.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밤 7시에 문을 닫는다. (제공=김해완)

그렇게 강산이 여섯 번 바뀌었다. 그 사이에 미국의 최대 적이자 쿠바의 우방국이었던 소련도 무너졌고, 국제 여론도 가난한 쿠바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으며, 이렇게 쿠바를 두드려 패 봤자 미국에 돌아올 이익이 없다는 비판도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백악관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키는 중이다. 마이애미 주(州)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쿠바 유권자들 때문이다. 이들은 혁명 당시 미국인들처럼 재산을 압수당했거나 카스트로의 정치 노선에 동의할 수 없어서 자발적으로 쿠바를 떠나온 사람들이다. 쿠바 혁명 정부에 강한 반감을 품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국 정치인들은 반(反)쿠바 정책을 강화해야만 이들의 표를 얻을 수 있다. 오바마가 2014년 임기 말에나 쿠바를 블랙리스트에서 제외할 수 있었던 것도, 또 트럼프가 2016년에 취임하자마자 다시 쿠바에 경제 제제를 가하는 것도 결국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 모든 정치적 상황과 역사적 맥락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경제 봉쇄가 정당화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건 바로 의약품 매매 금지다. 정치가의 입장에서는 상대 국가를 압박하는데 이처럼 효과가 좋은 방법이 없다. 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로 이보다 더 비도덕적인 파워게임은 없다. 약한 사람들의 목숨을 볼모로 잡는 인질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의약품이 없으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것은 아플 확률이 높은 노인과 아동들이다. 또, 사람들의 생활환경에 ‘위험 인자(risk factor)’가 많은 가난한 나라일수록 환자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 그런데 이에 대고 의약품 수급을 거부하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간접적으로 죽이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미국처럼 세계 최강국이 고작 쿠바를 상대로 쓰기에는, 그것도 강산이 여섯 번 바뀔 때까지 고수하는 것은 좀 많이 치사하고 비열한 방법이다.

누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쿠바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약을 구매하면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오늘날 전 세계 신약의 50%와 생명공학 생산품의 80%가 모두 미국에 적을 둔 회사에서 판매되고 있다. (<Industria Médico Farmacéutica>, Enciclopedia Cubana) 유통 경로도 문제다. 쿠바는 마이애미에서 고작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이다. 이런 지리적 조건 속에서 미국을 통과하지 않고 쿠바에 물자를 조달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그 다음 문제는 대금 처리다. 쿠바 정부가 약을 구매하려고 해도 미국과 교류하지 않는 은행으로만 계좌 이체를 할 수 있다. 이런 복잡한 상황 때문에 많은 투자자들은 쿠바에 쉽사리 무역의 문을 열지 않는다. 까딱했다간 대금을 회수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다.

대로에 있는 좀 더 큰 규모의 약국과 그 내부. 간판에는 ‘상담 서비스’, ‘약이 있는 장소’, ‘자연 전통 의학’이라고 적혀있다. (제공=김해완)
대로에 있는 좀 더 큰 규모의 약국과 그 내부. 간판에는 ‘상담 서비스’, ‘약이 있는 장소’, ‘자연 전통 의학’이라고 적혀있다. (제공=김해완)

이 고난의 화룡정점은 미국의 경제 봉쇄가 의약품뿐만 아니라 약제에 꼭 필요한 원재료의 매매까지 제한했다는 사실이다. 쿠바의 제약 산업의 발전을 처음부터 봉쇄하겠다는 의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보복 조치가 쿠바를 독하게 키웠다. 오늘날 쿠바 약학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쿠바 의료계에서 가정의학 다음으로 잠재력이 많은 영역이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경제 봉쇄 60년이라는 극한의 조건 속에서도 말이다!

쿠바의 제약 산업은 두 가지로 특징지어진다. 첫째, 철저한 의약품 국산화와 광범위한 무상 보급이다. 예를 들면 쿠바 국민들은 총 13종의 백신을 접종받는다. 그리고 이 중에서 수입산인 세 가지(MMR, BCG, Polio)를 제외하면 모두 국내에서 생산된다. 백신의 국산화는 1962년 쿠바의 국가 예방 접종 프로그램(Programa Nacional de Vacunación Cubano)의 공식적 출범과 함께 파죽지세로 진행되었고, 예방 접종은 뽈리끌리니꼬와 꼰술또리오에서 100% 무상으로 진행되었다. 60년대에 예방 접종을 범국민 차원에서 의무화한 나라가 세계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리고 결과 역시 파격적이었다. 파상풍(Tetanus), 디프테리아(Diphtheria), 풍진(Rubella)을 포함하여 과거에 흔했던 11개의 질병이 근절되었다. 짧게는 4개월, 길게는 35년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Cuban experience in immunization, 1962–2016>, Pan American Journal of the Public Health) 백신뿐만이 아니다. 화상용 연고, 빈혈약, 진통제, 항생제, 소염제, 심장마비 약 등등 진료실에서 숱하게 쓰이는 약 또한 모두 국내산을 쓰고 있다.

이런 성과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쿠바 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곳의 약국 풍경은 수입산 약, 그것도 한 두 회사가 독점하는 상품들로 일색이었다. 경제 봉쇄에 대응하여 의약품 국산화를 실천할만한 제대로 된 연구 기관조차 없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새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수많은 연구원들이 의약품 자급자족 프로젝트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었다. 이들은 경제봉쇄가 차단한 약제의 원재료들을 소련을 통해서 구매했고, 쿠바에서 자생하는 식물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가장 중요한 조치는 상표(commercial brand)를 없애고 약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반명(generic name)을 쓰는 것이었다. 이는 광고나 마케팅에 들어가는 거품 비용을 제거하여 최대한 돈을 절약하는 전략인 동시에, 약품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시장 논리에서 벗어나 오롯이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서 연구에 임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덕분에 오늘날 쿠바의 제약 산업은 완전히 풍경이 달라졌다. 핀래이 연구소(Finlay Instituto)를 비롯하여 총 8개의 기관들이 (주로 아바나에 몰려있다) 제약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고, 이들 산하로 38개의 부속 기관이 있으며, 이곳들에서 총 100가지가 넘는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이런 독특한 발전 과정은 쿠바 약학의 두 번째 특징인 창의력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오늘날 쿠바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약들을 자랑한다.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정부의 노력, 쿠바의 신토불이 식물을 재료로 쓸 수밖에 없었던 경제봉쇄의 압력, 그리고 약으로 이윤을 낼 필요가 없는 사회주의의 조건이 모두 맞물린 결과였다. 가령, B 수막염 백신(VA-MENGOC-BC®)은 1988년 쿠바에서 최초로 발명되었다. 다섯 종류의 백신을 한 번에 접종하는 오분산 백신(Pentavalent Vaccine) 역시 쿠바의 특징적인 약품인데, 오분산 백신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은 세계에서 몇 군데 없다고 한다. 2019년에는 폐암을 예방하는 백신(CIMAvax)을 최초로 출시하여 세계를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게 했다.

쿠바의 일반약 중에서 가장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PPG라는 상표로 알려진 폴리코사놀이다. 이 약은 쿠바의 대표적인 작물인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물질(폴리코사놀)로 만들어졌다. 몸에 해로운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혈소판의 응고 현상을 낮추는데 몹시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다른 약과 함께 복용했을 때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뜨거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약들은 40여개의 국가들로 수출되면서 어려운 쿠바 경제에 외화를 벌어다주고 있다. (그래서 재미있게도 왕년에 없앴던 상표가 다시 되돌아왔다.) 이제는 경제봉쇄 때문에 미국인들이 역으로 쿠바산 약을 구매할 권리를 빼앗기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SMC(Servicios Médicos Cubanos)는 쿠바 의료를 상업화하여 외국인 상대로 판매하는 일을 담당하는 국가 기관이다. 외국인 의대생부터 쿠바산 약 판매일까지 다양한 일을 한다. (제공=김해완)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런 호기가 계속될까? 쿠바가 처한 실제 상황은 낙관과 거리가 멀다. 쿠바 약학이 보여준 눈부신 비상은 무너지기 직전의 낡은 계단을 숨 가쁘게 올라온 길과 같다. 경제봉쇄의 우회로가 되어주었던 소련이 사라진 후로 쿠바 의약계는 눈에 띄게 위태로워졌다. 약을 제조하는데 최소 대여섯 가지의 핵심 물질들이 필요한데, 이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약을 아예 만들 수가 없다. 작년에는 752개의 기본 약품 중에서 10%가 부족했다. 중국과 일본의 도움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다지만, 이 역시 임시방편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심각한 환경오염  때문에 중국산 재료를 재검사하는데 많은 시간이 지연되고 있으며, 이제 막 비즈니스 관계를 맺기 시작한 일본 같은 경우는 과연 우방국인 미국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지 의심되기 때문이다.

약이 부족해지는 순간 쿠바 의료의 미래도 장담할 수가 없다. 쿠바 의료의 핵심은 예방이며, 예방의 핵심은 깊은 관심과 빠른 조치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축을 현실에서 담당하고 있는 것은 가정의학 종사자들과 약의 광범위한 보급이다. 가족주치의들이 싸움의 최전선에 나가 있는 전사라면, 약은 그들이 전투를 위해 장전한 탄환인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탄환이 점점 떨어져가고 있다.

약은 쿠바인들이 제한된 물자 속에서 발휘하는 그 특유의 창의력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집약된 결과물이다. 그러나 쿠바인들이 아무리 창의적이라고 하더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이 나라가 필요한 단 하나의 처방약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고립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경제 봉쇄를 철회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페널티 없이 교역하면서 지금까지 갈고 닦은 실력으로 경제를 재건설한다면, 식민지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정한 의미로 누려보지 못했던 자립의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쿠바의 약학은 쿠바인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건강에 또한 크게 기여할 것이다. 어서 그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아바나 비에하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맞은 편을 보면 “모로 성벽”이 있다. 예전에는 해군 방어기지로 쓰이던 곳이지만, 요즘은 아바나 비에하 풍경을 보러 오는 관광 장소다. 2014년 오바마가 경제봉쇄의 끈을 느슨히 풀었을 때 수많은 유람선이 이곳을 가로질렀다고 한다. 지금은 적막하다. (제공=김해완)

 

김해완 (아바나 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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