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이 함께 하는
상태바
천국과 지옥이 함께 하는
  • 김해완
  • 승인 2020.04.03 15: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상의 의학을 찾아서 후기]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 김해완

'어쩌다 보니' 본지와 인연을 맺게 된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김해완 씨는 지난해 8월부터 격주로 『쿠바의 의료 실험 - 일상의 의학을 찾아서』를 연재를 시작했다.

김해완 씨는 아바나 의대를 다니면서, 의대생으로서 보고 또 경험한 쿠바 의료시스템을 '일상의 의학'이라 칭한다. 대단한 의료기술은 없지만,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병)을 해결하며, 병과 의료와 사람을 둘러싼 관계를 바꾼 쿠바의 의료시스템을 소개했다.

- 편집자 주

 

해부학 시간에 즐겁게 수업받는 의대생들. (제공=김해완)
해부학 시간에 즐겁게 수업받는 의대생들. (제공=김해완)

처음 쿠바에 왔을 때, 나는 이곳 사람들이 조울증에 걸린 게 아닌가 의심했었다. 사람들은 기쁠 때는 소리 지르고, 화낼 때도 소리 지르고, 슬플 때도 소리 내어 울었다. 쿠바인들이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들었지만 이건 좀……. 감정 절제를 미덕으로 여기는 한국 출신을 숨길 수 없었던 건지, 내 눈에는 이런 풍경이 과해보였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했다. 삼 년이 지난 현재 나는 조금씩 쿠바인들을 닮아가고 있다. 쿠바의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예측할 수 없는 온정이 내 감정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덕분이다. 물탱크가 고장 나서 이틀 째 물 없는 ‘난민 생활’을 하다 보면 집을 부숴버리고 싶은 기분에 씩씩거리다가, 이웃이 건네는 물 한 동이에 마음이 금세 따뜻해진다. 관록이 느껴지는 교수의 강의에 전율하다가도, 관료주의의 끝을 보이는 학교를 보면 교문을 들어가기 싫어진다. 한 달 째 실종되었던 우유가 가게에 들어왔을 때는 뛸 듯이 기쁘다가도, 장 본 후 무거운 가방을 멘 채 한 시간 동안 마을버스를 기다려야 할 때는 또 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쿠바를 완전히 좋아하려다가도 또 좋아할 수가 없고, 싫어하려고 해도 또 싫어할 수가 없다! 이렇게 나의 생활은 작은 천국과 작은 지옥을 끊임없이 오간다.

꼰술또리오에 점검을 받으러 온 아이들과 엄마들. 가족주치의는 동네의 아이들을 전부 다 알고 있다. (제공=김해완)
꼰술또리오에 점검을 받으러 온 아이들과 엄마들. 가족주치의는 동네의 아이들을 전부 다 알고 있다. (제공=김해완)

연재 첫 회에서 쿠바 의료는 천국도 지옥도 아니라고 썼었다. 그때 나는 쿠바 의료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 녹아드는 경계를 스케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쿠바 의료 전체를 ‘천국’ 혹은 ‘지옥’으로 규정하려는 이데올로기에 눈이 쏠리는 순간, 정작 현장의 풍경은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재가 끝나고 다시 생각해보니, 이 말을 정정해야 할 것 같다.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천국과 지옥이 뒤섞여 있는 현장이다.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 억장이 무너지는 영화와 기적이 벌어지는 드라마가 계속 벌어진다. 한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는데 의약품이 없어서 처치 부족으로 숨을 거두었다. 가족에게는 지옥의 순간이다. 그들은 선진국에서 더 나은 의료 환경 속에서 치료 받았더라면 그가 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애가 끓을 것이다. 또, 어떤 환자가 가족주치의에게 유방암 조기 진단을 받고 수술 후 무사히 완치되었다. 천국의 순간이다. 그는 돈에 구애 받지 않고 만인을 평등하게 치료하는 쿠바 의료에 가슴 깊이 감사할 것이다. 이처럼 천국과 지옥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정의하기 어려운 형태로 왔다가 지나간다. 이 양극 모두가 우리가 사는 현실의 일부다. 의학은 현실에 영향을 끼치지만, 현실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공네 길거리에서 노는 쿠바 아이들. 무료의료의 혜택은 특히 산모와 아이들에게 집중된다. (제공=김해완)
공네 길거리에서 노는 쿠바 아이들. 무료의료의 혜택은 특히 산모와 아이들에게 집중된다. (제공=김해완)

쿠바에서 하는 의학 공부는 내가 지금까지 한 어떤 공부보다 더 단단하게 나를 현실에 발붙인다. 의료는 생사가 갈리고 고통과 극복이 중첩되는 현장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감정도, 판단도, 발언도 목숨만큼의 무게가 나간다. 내가 만난 의사들은 이 무게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또 휘둘리지도 않고 그 안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알았다. 내가 본 환자들은 병 때문에 겪는 일상의 변화와 감정들을 감추지 않고 표현했고, 그렇게 어느 정도 스스로를 치유했다. 그리고 내가 사는 환경은 자잘한 육체노동을 끝없이 요구하며 ‘몸’의 존재감을 일깨웠다. 일상의 육체노동이 건강을 지키는데 (운동 이상의 의미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쿠바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을 것이다! 90년대 생으로서 숨 쉬는 것만큼 익숙한 디지털기기와 함께, 존재감이 희미한 신체를 떠안고 살았을 것이다.

쿠바 의학은 최고도 아니고 완벽하지도 않다. 이곳의 의학이 좋다고 설득하는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난 유학원을 운영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쿠바는 나를 공부하고 싶게 만든다. 이곳에는 사람이 사람을 치료한다는 단순한 진정성이 있다. 물론 진정성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이것이 문제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역이용될 때는 신뢰만 깎아내린다. 그렇지만 몸을 곧 돈으로 보는 세상에서 이런 마음을 보고 또 배울 수 있는 기회는 귀하다. 생명이 신체를 가진 것은 보여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것이듯, 의학 또한 남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것이다. 쿠바 의료는 외부의 평가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쿠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11월 29일, 매년 의대생들은 아바나 시가지를 행진한다. 19세기 말 스페인 정부에게 살해당했던 쿠바 의대생 1학년들을 기리기 위해서이며, 현 쿠바의 의료체제를 다시 한 번 자랑스럽게 여기기 위해서다. (제공=김해완)
11월 29일, 매년 의대생들은 아바나 시가지를 행진한다. 19세기 말 스페인 정부에게 살해당했던 쿠바 의대생 1학년들을 기리기 위해서이며, 현 쿠바의 의료체제를 다시 한 번 자랑스럽게 여기기 위해서다. (제공=김해완)

16회의 연재가 진행되는 동안 이런 문제의식과 경험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디테일한 현장을 스케치하는 게 내 관심사였지만 쿠바 의료 체계를 전혀 모르는 독자들로서는 이런 내용이 생뚱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미시적인 경험과 거시적인 시스템 사이를 왕복했다. 매끄럽지 않은 전환에 비약이라고 느끼는 독자들도 있었으리라. 더 많은 자료 수집을 토대로 폭 넓게 글을 구성했더라면 더 나은 연재가 되었겠지만, 의대생으로 공부를 병행하는 입장에서 내가 학교 및 병원에서 보고 듣고 읽는 것 외에 탐사의 영역을 넓히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쿠바 의료 현장과 가까이 있는 한국인이 소수라는 이유로 그 동안 나의 글이 과분한 관심을 받았다. 쿠바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 중 하나로 여겨주시면 좋겠다.

멕시코에서 건너온 교수가 르네상스 시대의 해부학 교재 판본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쿠바는 의료 미션 뿐만 아니라 의학계와 관련해서도 해외 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제공=김해완)
멕시코에서 건너온 교수가 르네상스 시대의 해부학 교재 판본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쿠바는 의료 미션 뿐만 아니라 의학계와 관련해서도 해외 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제공=김해완)

마지막으로 쿠바를 비롯하여 수많은 나라들이 무사히 코로나바이러스를 극복하기를 마음으로 기도해달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쿠바는 현재 코로나바이러스로 가장 큰 피해를 겪고 있는 이탈리아에 쿠바 의료진을 파견했고, 국내 상황도 재정비하고 있다. 3월 24일자로 쿠바는 관광객들에 한해서 국경을 폐쇄했고, 휴교령을 내린 후 가족주치의와 의대생들 중심으로 커뮤니티의 확진자들을 점검 중이다. 쿠바는 전염병을 퇴치한 경험이 풍부하지만, 이 신종 바이러스가 워낙 전파력이 강한지라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생필품과 식품의 부족에서 오는 불안은 또 다른 문제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의학적으로 폐렴을 야기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고립을 야기한다. 이는 쿠바처럼 생활 기반이 취약한 사회에서 더 고통스러운 시간을 안겨준다. 이 코로나 타임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지금으로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특별시기를 통과한 저력으로, 쿠바가 이번에도 버텨내기를 바랄 뿐이다.

김해완
김해완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