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 끝 아냐…“해고는 살인” 명제는 유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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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 끝 아냐…“해고는 살인” 명제는 유효
  • 안은선 기자
  • 승인 2020.06.1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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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득중 지부장‧건치 정성훈 전 공동대표…그리고 신순희 회원

2009년 4월 8일 쌍용자동차는 경영악화를 이유로 2,646명을 해고했다. 그로부터 11년 하고도 1개월 만인 지난 5월 4일, 마지막 복직 대상자 35명이 경기도 평택 공장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2달 간의 직무교육을 거쳐 7월 1일부터 현장에 투입된다. 당초 47명이 출근키로 돼 있었으나 12명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휴직을 연장했다.

쌍용차 사태는 사측의 정리해고에 반발해 같은 해 5월 21일 옥쇄파업에 돌입하며 촉발됐다. 77일간 이어진 파업과정에서 당시 쌍용차지부 한상균 지부장 등 46명이 구속됐다. 사측은 옥쇄파업을 벌인 900여 명을 상대로 무급휴직과 희망퇴직 등을 신청받았고, 그 중 454명이 무급휴직을 선택했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버틴 165명은 해고자가 됐다.

무급휴직을 택한 454명은 지난 2013년 전원 복직됐지만 해고자 165명은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쌍용차 노사, 금속노조 쌍용차지부는 해고자와 희망퇴직자 복직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여왔으며, 지난 2015년 남은 해고자들을 단계적으로 복직시키는 데 합의했다. 이후 세 차례에 걸쳐 해고자 등이 단계적으로 복직했으며, 119명의 해고자의 복직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이어 지난 2018년 9월 21일에 드디어, 쌍용차, 쌍용차노동조합, 금속노조쌍용차지부, 대통령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등 노‧노‧사‧정 4자 합의를 통해 정리해고자 119명을 차례로 복직시키기로 했다. 먼저 지난 2019년 1월 1일 71명이 복직한 데 이어 남은 48명의 노동자도 올 1월 부서배치될 예정이었으나 바로 직전인 2019년 12월 24일 쌍용차 측이 경영난을 이유로 48명을 통상임금의 70%를 받는 유급휴직으로 전환했다가 지난 5월 4일 마지막 해고자들이 공장으로 돌아가게 된 것.

전원 복지까지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옥쇄 파업 당시 국가는 폭력진압을 자행했고, 그것도 모자라 경찰은 진압에 동원된 제반비용, 파손 비용, 위자료 등 24억 원의 손해배상을 노동자들에게 청구했다. 사측이 청구한 손해배상까지 합치면 그 액수만 100억 원에 이른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노조의 구호처럼 장기간에 걸친 투쟁으로 심신이, 생활이 파괴된 해고노동자와 가족 등 30명이 9년 사이에 유명을 달리하는 등 후유증이 남았다.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이하 건치)는 노조의 투쟁이 장기화 국면에 들어선 지난 2012년 7월부터 와락센터에서 해고노동자들과 그 가족을 위한 치과진료를 시작했고, 전원 복직 합의가 이뤄지자 지난 2019년 6월 30일, 7년 동안 이어 온 진료를 공식적으로 마무리했다. 그간 와락치과진료소를 찾은 쌍차 해고노동자들과 가족들의 수는 모두 1,532명, 진료에 참여한 치과의사 수는 건치회원 381명을 포함해 총 644명에 이른다.

건치로서도 ‘무기한’ 연대 투쟁은 처음이었고, 해고노동자 전원 복직이라는 큰 결실을 함께 보게 된 것도 처음이다.

이에 본지는 쌍차 해고노동자의 복직을 축하하고, 앞으로 남은 과제를 짚고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닌 이 싸움을 지지하기 위한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날 인터뷰에는 해고자 전원 복직을 촉구하며 지난 10년 간 100일이 넘는 4번의 단식을 단행하며 이 싸움을 이끌어 온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득중 지부장과, 7년 간 와락치과진료를 묵묵히 이끌어 온 건치 정성훈 전 대표가 참석했다. 아울러 해고노동자 복직기념으로 시원하게, 즉흥적으로 ‘티볼리’를 구매하며 누구보다 복직을 기뻐한 건치 신순희 회원이 인터뷰 진행을 맡았다.

- 편집자

(왼쪽부터) 건치 정성훈 전 공동대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득중 지부장, 건치 신순희 회원
(왼쪽부터) 건치 정성훈 전 공동대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득중 지부장, 건치 신순희 회원

먼 시간 돌아왔지만…공장, 돌아와야할 곳
가족‧동료, 지난한 투쟁 견디게 해 준 힘
강정‧밀양‧용산과 연대한 11년 ‘소중한 보물’

신순희(이하 신) : 다시 한 번 전원 복직을 축하드려요! 정말 저도 너무 기뻤는데 지부장님은 어떠셨을지 그 소감이 궁금해요.

김득중(이하 김) : 2019년 6월 30일에 마지막 진료를 받았어요. 당시엔 7월 1일부터 복직되는 걸로 합의해 그렇게 날을 잡았었는데, 사측의 약속 불이행으로 복직이 계속 밀렸죠. 안 그랬으면 오늘 이 자리가 좀 더 빨리 왔을 텐데 말입니다.

지난해 12월부터 올 1월까지 한 달 사이에 정말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봤어요. 10년 만의 복직이라 전국에 흩어진 분들이 사표내고 평택으로 다시 이사도 했는데, 부서배치 1주일 남겨놓고, 사측이 무기한으로 휴직을 연장시켰죠. 이를 묵과할 수 없어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기자회견을 하고, 본관 대기실을 점거해 두 달 반 가량 시위를 했어요. 여담이지만 그때가 좋았어요. 같이 식당 앞에서 구호 외치고 하는….

신 : 회사에서는 막지 않았나요? 다른 충돌이 있거나….

김 : 회사에서는 막을 명분이 없죠. 지난해 7월 1일부로 신분회복이 됐으니 말이에요. 출근 투쟁과 더불어 무기한 휴직 연장이 부당하다는 취지의 구제신청을 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무기한 무급휴직 상태였을 걸요? 최근 코로나19 등 상황이 악화된 것을 보면, 그 때 그렇게 안했으면 영영 돌아가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정말 아찔했어요.

마지막 복직자 중 조합원이 아닌 분들을 제외하면 30명 정도인데, 이분들이 지난 1월, 2월 중순까지 출근투쟁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면서 이 분들이 아니었으면 이 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 : 정말 마지막까지 눈물의 투쟁이네요.

김 : 5월~6월 사내 교육 시스템을 거쳐서 최종 배치가 돼요. 5월에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6월부터는 현장 업무를 나가고 있어요. 오전 오후 2교대로 출근 하고 있죠. 가족들이나 주변 지인들, 현장에서 오랫동안 못 본 동료들한테 계속 축하한다고, 기쁘다, 고생했다는 말을 아직도 듣고 있어요. 정말 좋아요.

5월 4일, 복직 날 기자회견에서도 말했지만, ‘제가 마지막으로 복직하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이걸 지킬 수 있게 해 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해요. 많은 분들에게 기쁨을 드릴 수 있게 돼서 정말 기뻐요. 신순희 선생님도 티볼리 충동구매하셨다고 하고 많은 분들이 함께 기뻐해 주셔서, 감사하게 하루하루 보내고 있어요.

신 : 정성훈 선생님은 복직된다는 뉴스 보시고 어땠어요?

정성훈(이하 정) ; 울었어요(웃음). 그런데 지부장님과 약속 못 지켜서 민망해서 전화 한 통 못했어요.

신 : 그 약속이 뭔데요?

정 : 지부장님이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진료한다고 했는데, 지난해 6월 30일에 마무리 짓게 됐죠. 결국. 사실은 복직하고 첫 월급 받았을 때 그만둬야 했는데 일찍 접어서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어요. 복직된다는 뉴스보고, 페이스북에 ‘좋아요’만 누르고…. 전화도 못하고….

김 : 이제는 정말 미안해 하지 않으셔도 돼요. 마음에도, 기억에도 없는데요 (웃음). 저도 정신이 없어서 전화 못 드려 죄송해요.

신 : 그래요. 이제 그만 내려놓으세요.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지부장으로서 소감 말고, 개인의 삶에서 복직은 어떤 의미인가요?

김 : 그것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은 안 해봤어요. 당연한 일이니까요. 2009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래요. 파업 당시에도 간부였거든요. 조직실장. 현장 이야기하고도 이어지는데, 당시 조합원들과 약속한 게 있어요. 조합원 대상 교육에서도, 어디 나가서 사회 볼 때도 빼놓지 않고 한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 개개인은 할 수 없어도 단결하면 승리한다”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 다녔어요. 그리고 그걸 만들어 내보이겠다는 생각을, 2009년부터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잊지 않았어요. 조합원들과의 약속이기도 했지만, 제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으니까요. 그 약속을 지키게 돼서 정말 뿌듯하고, 스스로에게 잘했다. 대견하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신 : 오랜만의 출근인데 낯설거나 어렵거나 한 건 없으신가요?

김 : 먼 시간 돌았지만, 다시, 당연히 돌아갈 곳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뭔가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 고향같은 느낌? 11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낯설지 않았어요. 공장의 곳곳을 다닐 때면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편안하더라구요.

신 : 투쟁 이외의 지부장님의 삶도 궁금해요. 장단점이 있었겠지만 11년 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김 : 요새 그걸 고민하고 있어요. 갱년기인지 뭔지 모르겠지만(웃음). 지난 11년의 인생 가운데 지부장 김득중을 뺀 인간 김득중은 뭘까 하구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찾을 수가 없네요. 다른 조합원들은 다른 일도 하고 했는데, 저는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네요.

2009년 파업 말미에 구속돼서, 1년 뒤에 출소해서 1주일 쉬고 바로 복직투쟁을 시작했거든요. 정말 11년 동안 개인적인 일을 해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별로 이야기할 게 없어요. 그래도 그 과정이 좋았어요.

11년 동안 투쟁하면서 얻게 된 소중한 보물같은 것이 있다면, 내가 보지 못했던 곳곳을 보고, 경험했다는 거에요. 인간 김득중이 노동문제를 넘어서 밀양 송전탑 문제, 강정마을 사태, 용산 참사에서 투쟁하시는 분들을 각별하게 알게 되고, 그분들의 삶을 듣고, 들여다 보면서 다른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깨닫게 되는 성숙의 시기였어요. 사실 그런 분들을 접할 기회가 없잖아요?

단점이라고 하면 사실 가족이나 주변 지인들을 많이 놓친 게 아쉽죠.

신 : 약간 슬프네요. 가족들에게 많이 미안하시겠네요.

김 : 특히 아이들에게 미안해요. 벌써 첫째가 대학교 3학년이고, 작은 애가 중학교 2학년이에요. 11년 동안 다 커버렸어요. 파업 당시 둘째가 4살이고, 큰 애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말이에요. 사춘기 때 아빠 역할, 또 남편 역할을 못했죠. 사실 가족들이 절 이해하진 않았고, 절 포기했죠 (웃음).

지난해부터 아내에게 물어봤거든요. 그랬더니 제가 구속당했을 때 ‘저 남자를 포기해야겠구나’하고 생각했대요. 왜 그랬냐고 하니까. ‘나랑 애들이랑 살려고.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뭘 제대로 할 것이란 기대를 하면 계속 싸우게 되고 그러니까, 내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 남자를 포기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하더라구요.

신 : 포기라고 했지만, 사실 허용했다는 걸로 들리는데요?

김 : 본인이 그렇게 표현하긴 했지만, 제가 봐도 허용이에요 (웃음). 요즘은 둘째 아이에게 점수 따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데…. 까칠한 사춘기라서 어렵네요. 그래도 요즘은 안으려고 하면 피하진 않더라구요. 전에는 손만 잡아도 뿌리쳤었는데(웃음).

신 : 축하드립니다! 11년의 투쟁을 끌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역시 사모님의 ‘허용’이려나요?

김 : 가족의 힘이 있었죠. 물론. 또 동료들의 힘도 있었구요. 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어려운 조건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동료들이 있었고, 연대는 말할 것도 없구요. 그분둘이 계시기에 이대로 끝내면 안되겠구나 생각했어요. 한분 한분 떠올려보면 더욱요. 그래서 코로나19가 좀 잠잠해지면 서울에서 축하자리를 마련하고 싶어요.

30명의 죽음‧30명의 이름‧30개의 이야기
“해고는 죽음이다” 연대 불러낸 구호
치과진료, 치아뿐 아닌 마음까지 치료해

신 : 고마운 이름들은 꼭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구식이지만 일일 호프 같은 것도 괜찮을 거 같아요. 11년 간 좋았던 것도 많았지만, 워낙 힘든 싸움이었잖아요? 가장 힘들었던 일이나 맺힌 일이 있을 거 같은데….

김 : 죽음이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요. 2011년 하반기 어느 달에는 두 번의 장례를 치렀어요. 가서 유가족들 만나고 노제를 지내고…. 연이은 죽음에 너무 힘들었어요. 누가 또 극단적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하는 걱정도 계속 들고요.

또 누가 송전탑, 굴뚝 올라가면 그것도 힘들었어요. 정말 아차하는 순간 일이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중압감, 부담, 두려움이 계속 올라왔고, 서로 통신하다가 불협화음이 생기면 어쩌나. 자칫 불상사가 나지 않을까하며 노심초사하면서 보낸 시간들, 올라간 사람들이 내려올 때가지 계속 심적으로 힘든 시간들이었어요.

김득중 지부장
김득중 지부장

신 : 대한문 분향소 지날 때마다 저도 힘들었어요. 그런 죽음들을 지켜보는 게 마음이 아팠죠.

김 : 옥쇄파업 당시에 밤마다 전 공장을 돌아다녔어요. 조직실장이니까, 조합원들이 부서별로 위치를 잡으면 가곤 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들이 2명 있어요. 부서에서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친구들이었는데, 그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말수가 없는 친구들이었는데…. 이야기를 하면서 파업 끝나면 꼭 같이 소주 한잔 하면서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는데, 그 두 친구 모두 극단적 선택을 했어요. 결국 싸움도 끝나지 않았는데, 영정으로 다시 만났죠.

그 중 한 친구는 22번째 죽음이었어요. 이윤영이란 친구인데, 그 친구가 정말 마음에 걸렸어요. 당시엔 몰랐는데, 그가 죽고 나서 알고 보니 가족이 없는 친구였어요. 오래 전에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이복형이 있지만 남처럼 지내고. 학교 다닐 때도 혼자였더라구요. 해고되고 평택에서는 취업이 안되니까 2년~3년 떠돌았죠. 한번은 인천 강화쪽으로 취업을 하러 갔는데, 그곳에서도 쌍차 다녔다고 하면 금방 짤리니까 숨기고 다녔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다가 노조에서 2011년에 『당신과 나의 전쟁』이란 다큐를 제작했어요. 그걸 보고 그 친구가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주기도 했고, 그 친구가 밤만 되면 술 마시고 전화도 많이 했어요. ‘주변에서 쌍차다녔다고 하니까 빨갱이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좋냐’라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적응 못하고 지내더라구요.

2012년 1월인가 2월에 평택으로 오라고 했어요. 그때 와락도 만들어졌고, 충분한 공간도 생겼으니까 한 번 오라구요. 꼭 오라고 할 때는 안 오다가 어느 날 왔는데, 지인이 쌍차 부품 하청 업체를 소개시켜줘서 면접 보러 간다고 왔더라구요. 그날 저랑 소주 마시고 갔어요. 며칠 있다가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했는데…. 그렇게 방황하다가 며칠 안돼서 극단적 선택을 했어요.

또 다른 친구는, 한쪽 다리에 의족을 한 친구였어요. 장애인 고용 안정으로 고용된 친구였는데도 해고대상이 됐죠. 그것도 참….

의족 소독을 잘 해줘야 하는데, 그 뜨거운 여름에 투쟁하면서는 제대로 소독도 못해서 진물이 생기고 그러더라구요. 옥쇄파업이 8월 6일에 끝났는데, 도저히 못 보겠어서 7월 말 정도에 할 만큼 했으니까 나가서 치료하고 와라.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가 나가면서 희망퇴직을 써버렸더라구요. 그리고 나서 주변 이야기 들어보면 열심히 살려고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따고 했다는데…. 제가 출소한지 얼마 안 된 시점에 극단적 선택을 했더라구요. 소식이 궁금했는데 영정사진으로 만났어요.

파업하면서 만난, 친구들, 이런 하나하나의 사연들, 죽음들이 되게, 굉장히,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어요. 자꾸 뭔가 오기를 자아내는 그런 것이 됐죠.

신 : 저희도 그랬어요. 대한문 들리고, 와락에도 가고. 치과진료를 하면서, 나름대로 제 시간의 많은 부분을 쌍차 해고노동자 분들을 위해 썼던 건 많은 분들이 돌아가신 게 너무 슬프고 마음 아파서였어요.

김 : 그래서 ‘더 이상 죽지 않게, 해고는 죽음이다’라는 구호를 외쳤고,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함께 하자고 오셨죠.

신 : 조금 민망하지만, 건치의 치과진료는 어땠나요? 건치와의 연대는 어떤 의미였나요?

김 : 제가 이야기 해야 하나요? (웃음) 농담이고. 저 사람들은 뭘까?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치과의사들이 내려오나? 생각했어요.

와락이 생기고 처음에는 평택보다는 전국구로 다녔죠. 초반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어느 순간 가니까 건치가 와 있더라구요. 다음에 또 가보면 또 와 있고, 버스도 오고…. 한 두 번 오다 말겠지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치과치료가 워낙 고가인데다가, 막 80명 되는 사람들이 진료 받으러 가고 하니까 저 비용을 감당할 수 있나? 하는 생각에 그랬죠. 그런데 한 달, 또 한 해 지나도 계속 오시니까. 저 양반들은 뭘까? 생각하게 돼죠.

사실 해고자들에게 정신적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 문제가 현실적으로 크죠. 다 긴축재정으로 해서 사는데, 치과치료는 정말 큰 부담이죠. 한 번 가면 비용이 많이 드니까요. 그런데 오셔서 다 치료해 주셔서 경제적 부담도 덜어지니, 심리적으로도 안정이 되고. 그렇게 보면 치아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치료하는, 그런 극복의 과정을 함께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이해가 되더라구요. 처음의 한 달, 일 년, 그렇게 7년이 흘렀네요.

정성훈, 22번째 해고자의 죽음…달려갈 수밖에
건치회원 50명의 ‘묵묵한’ 6년의 후원 ‘큰 힘’

신 : 그렇다면, 정성훈 선생님께도 묻지 않을 수 없네요. 왜 쌍차에 가신거에요? 쌍차가 유독 특별했던 이유가 있어요?

정 : 쌍차와 처음 연결된 건, 진압 당시 경찰이 테이저 건을 쏜 날 인의협 선생님이 공장에 들어갔다가 잡혀서, 전체 비상이 걸렸었어요. ‘다들 가운 갖고 공장 앞으로 모여!’라고 해서 부랴부랴 갔을 때였죠. 그 때 그 수많은 가운입은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다가 뭐 좀 잊어버리고, 뉴스나 신문이나 잠깐잠깐 봤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항상 라디오를 들으면서 출근을 하는데, ‘쌍차에서 22번째 희생자가 나왔다’는 뉴스를 듣는데, 정말 머리를 도끼로 꽝 하고 찍는 것 같았어요. 단일 회사 파업에 22명의 노동자가 죽다니, 명색이 민주화 운동권 학생이었는데, 그 동안 내가 뭘 했나. 충격이었죠.

그래서 노동운동하는 선배에게 전화해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니까, 와락을 알아봐줬어요. 와락이랑 같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다. 그 때 문득 생각난게, 당시 전교조가 파업하고 흩어졌을 때 건치 회원들과 연결해서 치과진료를 했거든요. 그런 방식을 생각하다가, 혼자서는 답이 안나와서 건치 집행부에 연락했어요. 건치가 가만 있으면 되겠느냐. 하니까 건치에서도 이미 고민하고 있었고, 역시나 진료를 하자는 결론이 나왔죠. 그래서 와락이랑 이야기를 해서 체어 놓고, 1년 동안 하기로 했어요.

처음엔 1년이면 다 복직 되겠지라고 생각해서 시작했는데…. 처음 진료할 때는 건치 7개 지부가 돌아가면서 했어요. 많을 때는 50명 씩도 봤던 거 같은데…. 2013년도에 일부가 복직이 되고 나니까 환자가 3분의 1로 확 줄더라구요. 와락도 조용해지고.

근데 건치 지부에서는 사람들 잔뜩 와 있고…. 한 번은 부산지부에서 오셨는데, 그날 최저였어요. 치료 받으러 7분 오셨더라구요. 그렇게 1년 하고 접었죠.

그랬는데, 정리하는데, 와락 식구들 눈빛이 잊혀지지 않더라구요. 실망한 그 표정들…. 그래서 접으면 안되겠다 생각했는데,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건치 이상훈 선생님에게 연락했어요. 복직도 다 안됐는데 진료 접기엔 너무 미안하고, 진료 다시 하고 싶은데 방법을 같이 찾아달라면서 ‘형이 장비 좀 설치 해 줘’라고 부탁했죠. 그리고 혼자서라도 하려고 알아보니 이동치과버스 한 번 사용하는데, 평균 50만 원 정도 들더라구요. 그래서 건치에 1인 1만원 후원회원 50명만 만들어 달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래서 1년만 더, 더 하다 보니 6년이 됐더라구요.

건치 정성훈 전 공동대표
건치 정성훈 전 공동대표

신 : 나중엔 조직적으로 동원이 잘 안됐죠.

정 : 건치 집행부, 건치신문, 서경건치, 정책연구회에 부탁해서 계속 돌아가면서 했죠. 그리고 김희진 선생님도 자주 참여해 주셨어요. 사람 못 구하면 직속 후배인 정정헌 선생님 끌고 갔어요. 어느 날은 정 선생님이 일 때문에 안된다고 해서 혼자 내려가게 됐어요.

오늘 와락진료 혼자 내려간다고 페이스북에 딱 그냥 올리고 내려갔어요. 막상 가니까 좀 깜깜했어요. 접수하고 차트쓰고, 치료하는 걸 모두 혼자 하려니까 버겁더라구요. 그래서 차트 싸들고 버스에서 막 하고 있는데, 제 페이스북 포스팅을 보고 한명 두명 나타나더라구요. 숙취가 이만큼 올라간 치과위생사 선생님 오고, 이상훈 선생님도 오고 해서 그날 절 포함해서 치과의사 4명, 치과위생사 2명이서 했어요. 평소보다 더 많이 온거더라구요 (웃음).

신 : 그런 또 에피소드가…. 건치의 와락진료는 어땠는지? 평가해 보자면?

정 : 저는 그 후원금 내 준 50명, 그 분들에게 너무 감사해요. 1년만 도와달라고 했는데, 복직이 계속 안되고 하는데도 아무 말 없이 6년 간 내주셨죠. 그 후원금을 아직도 끊지 않으셨고, 그 후원금은 이제 꿀잠치과진료소로 가고 있어요.

신 : 건치가 정성훈 선생님에게 고마워해야할 거 같은데요? (웃음)

정 : 그렇지 않아요….

국가 손배 ‘파기환송’ 시급…사내 ‘민주노조 복원’ 장기과제
노동자 착복, 위기 해결책 아냐…“해고는 살인” 유효한 명제

신 : 자책은 오늘까지만! 다시 김득중 지부장님에게 질문할께요. 사측과 경찰이 청구한 손배가압류 금액이 100억이 넘는다면서요? 앞으로 풀어나갈 일이 남았는데…. 앞으로의 과제는 뭐가 있나요?

김 : 세부적인 것을 빼고 말하자면, 국가가 금속노조에 청구한 것과 사측이 청구한 게 이자 포함해서 100억 원이에요. 둘 다 아직, 3년 째 대법원에서 계류 중이에요. 어제(9일) 변호사님과 만나 확인을 했는데, 아직 재판일정은 잡히지 않은 상태구요.

국가 손해배상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민갑룡 경찰청장 만나서 사과는 받았지만, 손해배상 문제는 이미 대법원에 올라가서 판결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그쪽도 없더라구요. 법의 판결에 따라 이후에 긍정적 입장을 가지고 노력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또 유리하게 선고를 받아내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했어요. 법학 교수님들의 의견서, 국가 인권위에서 전체의견서를 받아 냈어요. 사실 단일 사업장 문제를 갖고 인권위가 전체 입장을 낸 건 처음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경찰이 손해배상을 철회해야한다는 경찰 인권침해조사위 보고서도 제출한 상태구요. 아, 또 올 봄에 21대 국회의원 79명에게도 탄원서를 받아서 제출 했어요. 일단은 파기 환송이 시급한 목표죠. 워낙 비중이 커서 다른 걸 들여다 보기 쉽지 않아요.

중장기적으로는 민주노조, 금속노조 쌍차지부를 복원하는 게 과제에요. 기존의 기업노조가 있고, 또 복직을 하니 자동으로 가입이 되더라구요. 지난 1월부터 유급화 되면서 임금이 나오는데, 조합비를 떼더라구요. 저희는 아직 소수라서 부서 배치 받기 전까지는 한발 물러서는 의미에서 냈습니다. 그러다가 5월 4일에 복직 결정이 되고, 지난 4월에 저를 포함한 임원들은 탈퇴서를 냈어요.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공장 안에 두 개의 노조가 있는 셈이 됐죠. 공장 안에서 지부 체계를 구성하는 문제를 포함해서 장기적으로 민주 노조 복원에 힘쓸 생각입니다.

신 : 두 가지 큰 과제가 있네요.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회사 경기도 어려워졌고, 인터넷 댓글 보면 젊은 애들은 짤리는데 나이든 사람들 복직하면 다냐? 그런 말들도 많더라구요. 결국 다시 위기가 오면 누가 해고되고 그럴 수도 있는데, 회사와 노조가 함께 해쳐나갈 방안 같은 게 있을까요? 복직이 개인에게도 회사에게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잘 몰라서 그렇지. 아무튼, 그런 걸 만들어 볼 수 있을까요? 연대단체들이 뭐 지지해 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김 : 지난해 하반기랑 올 초에 기업 노조 위원장님이나, 회사 측 하고도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회사가 다시 어려운데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서. 기업노조의 장점이라고 하면 마힌드라와의 관계성도 있고 조합원도 많고. 금속노조는 지난 11년 간의 사회적 연대의 힘이 있으니 각자 장점을 잘 살려서 돌파한 후에 각자 진영논리를 펼쳐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기업노조나 사측엔 잘 전달이 안되는 거 같아요.

지금까지 모두 다 쥐고 왔는데, 자칫 하다간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엿보이는 것도 같고, 마냥 금속노조가 싫은 걸지도 모르구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기업에게 위기는 언제든 올 수 있는 것이고, 위기 시에 노사가 어떻게 할 것인지, 정부는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죠. 특히 중간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명박 정권 당시엔 대화는 단절되고, 무력진압을 강행했다면, 이번 정권에서는 노‧노‧사‧정 합의를 했고, 그때의 합의 정신을 보면 지금도 가능해 보여요. 쌍차 문제에서 노사가 합의안을 만들고 부족한 부분을 정부가 채워주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복수노조 시대에 금속노조 쌍차지부는 소수다보니, 교섭권도 없고 파업한다고 해서 쟁의권 효력이 생기는 구조도 아니라서 금속노조에도 요청을 하고 있어요. 금속노조에는 18만의 조합원이 있어서 노사정 포럼도 가능하고, 산자부나 고용노동부를 만날 힘이 있으니까 쌍차 문제를 함께 풀어가자구요. 쌍차지부가 기업노조와 합의하고, 금속노조가 정상화를 위한 방안, 대안을 가지고 대안을 가지고 언론과 정부를 상대로 이야기할 필요성이 있어요.

신 : 교묘한 해고가 문제인 것 같아요. 차라리 전에는 대놓고 해고를 했다면, 이제는 결국 해고나 마찬가지인 여러 형태의 해고들이 자행되고 있어요.

김 : 쌍차지부나 금속노조도, 이미 해고를 경험했고 정리해고는 더 이상 대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충분히 생각해 대안을 만들고, 장기적 전망을 그리고 있어요.

신 : 그렇다면 정성훈 선생님 보시기엔, 건치의 연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쌍차와 했듯이 이런 식의 연대가 또 가능하리라 보시나요?

정 : 30대 대기업의 사내 보유금이 957조억 원으로 추정된다고 하더라구요. 지금 사회가 특히 코로나19로 위기고, 기업들도 위기라고 하면서 공적자금만 받으려고 하지 사내 유보금을 쓸 생각을 하지 않더라구요. 오직 해결법을 공적자금과 노동자 임금삭감으로 방향을 잡는데, 정말 없는 사람들은 코로나19 위기에 더더욱 힘들어지게 생겼어요. 그런 의미에서 건치가 할 일은 점점 더 많아질 거 같은데요?

신 : 건치 괜찮을까요? 지금의 조직역량으로?

정 : 일요일에 할 일도 없는데…. 눈 침침한 할아버지들이 나와서 진료해야죠(웃음).

신 : 연대사업의 초고령화인가요?

죽음 외에 다른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국가의 역할
정규‧비정규
‧하청 넘어 ‘함께 사는’ 연대 펼쳐나갈 것

건치 신순희 회원
건치 신순희 회원

신 :노동운동 역사에서 쌍차의 이번 성과는 참으로 큰 사건인데, 동화 속에서처럼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하고 해피앤딩까지만 보여주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건치를 비롯해 시민사회가 역사 속에서 쌍차가 어떻게 남을지 예의 주시하고 있어요. 선례라는 게 무척 중요하잖아요? 역사에서 쌍차가 어떻게 쓰여졌으면 하는지?

김 : 아직 진행형이라고 생각해요. 지난해 하반기부터 백서 작업을 본격화 했어요. 사무실도 옮기고, 투쟁하면서 서울 생활이 길어지면서 축적된 자료들이 많이 없어서 최대한 모으고 있어요. 그리고 사안별로 중요한 역할을 한 분들의 구술자료, 언론보도, 각 범대위, 건치의 자료까지 최대한 모아서, 지난해 말부터 초고를 쓰고 있어요.

처음엔 읽혀지기 쉽게 당사자들이 직접 쓰자는 이야기도 나왔는데, 우리 내부에서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고 자기주장이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까, 논의 끝에 자료집 중심으로 내자고 결론 지었어요. 이달 말에 초고가 나올 예정입니다.

신 : 그 속에 담겨질 내용들이 궁금한데요?

김 : 너무 길게 왔지만, 2009년부터 우리는 ‘해고는 살인이다’, ‘함께 살자’고 외쳐왔고, 지금도 외치고 있다. 여전히 해고는 살인이다. 함께 살자고 하는 폭을 쌍차 정규직만 아니라 당장 사내 하청, 부품사까지 포괄해서, 지금까지 해온 일에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까 말하기도 했지만, 노사는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찾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계약해지로 해고에 내몰리는 노동자들을 위해 국가가 역할을 해야해요. 노동자가 삶을 유지하고, 죽음 이외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쌍차 11년의 싸움이라고, ‘함께 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것은 당사자들과 논의를 해나갈 생각이에요.

신 : ‘함께 살자’를 제목으로 영상 제작도 하시면 좋을 거 같아요.

김 : 백서에 담길 쌍차의 투쟁이, 투쟁 중이거나 투쟁을 앞둔 동지들에게 ‘이렇게 싸우라’는 가이드가 됐으면 해요. 치트키 같은?

신 : 그럼, 정성훈 선생님에게 시민사회의 과제랄지, 전망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네요.

정 : 저는 쌍차가 장기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준 결실을 거뒀다고 생각해요. 쌍차의 10년 이상의 장기투쟁, 복직투쟁 승리는 노동운동사에, 세계사적으로도 길이 남을 큰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전에 한번 진료 갔을 때 일본철도노조에서 두 어르신이 자기네들은 아직 복직 못했다면서도 후원금을 주고 가신 적이 있어요. 쌍차 노조의 투쟁에 쌍차노조만 있었으면, 이런 승리가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주변에서 도와주는 시민사회의 후원과 연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요.

코로나19 이후 어려운 사람들은 더 어려워 질 수도 있어요. 지식인 단체나 시민단체들이 해야할 일, 찾아가야 할 곳이 더 많아질 것 같아요. 그리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은 연대의 힘이 되겠죠.

신 : 요즘 운동하는 사람들이 줄어서….

정 : 새로운 방식을 모색할 때인 거죠.

김 : 정리해고의 아픔을 많은 분들이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해서, 정말 상상치도 못한 다양한 분들이 많이 연대해 주셨죠. 시민사회뿐 아니라 문화‧예술가, 연예인들까지도요, 기적같은 일들도 많이 만났죠. 이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다 전할 수 없지만, 연대와 나눔을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고, 저희끼리도 얘기하곤 해요. 최소한 정년퇴직할 때까지는 해야지 하면서요.

건치 선생님들께도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사회 어두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해 주셔서요.

신 : 체어 설치할 곳이 아직 많을까요?

김 : 작년에 일본에 가서 연대해 주신 노조분들을 만났어요. 갔더니 하루에 돌아야 할 사업장이 8군데나 되더라구요. 최고로 짧게 해고 싸움을 한 곳이 19년이었어요. 최장기 싸움을 하는 곳은 어떤 출판사노조였는데, 41년차라고 하시더라구요. 거기 조합원분이 일흔이 넘으셨어요. 뒤풀이 가면 다 할아버지들이 조합원이시고…. 정말 빡(?)세게 운동하시더라구요. 뭔가 굉장히 암울한 미래를 보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일본 사회연대도 망가졌는지, 연대도 많이 없고, 50명이 넘는 집회 대오를 만나기도 힘들었어요. 조직이 살아있는 곳은 괜찮지만…. 전투적으로 하시는 분들을 보면 나름의 자부심이랄지 자존감이 굉장했어요. 그걸 지키기 위해 다 내려놓고 하고 계시더라구요.

신 : 아…. 우리나라의 미래일까요?

정 : 유럽의 노동운동은 머리만 남았지만, 우리는 머리와 몸 다 남았어요.

신 : 오~. 우리의 레벨이 올라간 건가요?

쌍차에 대한 이미지가 정말 많이 바뀌고 좋아졌어요. 나는 차도 막 사고 싶고 소개시켜주고 싶고 그래요. 인터넷 보면 악플뿐인 것 같지만 열성팬도 많고, 긴 시간 이어온 사회 문제가 잘 해결된 것에 기뻐하는 국민도 많아요.

모두 쌍차 이미지에 큰 이득이 되는데, 회사가 그걸 깨달아야해요. 안되면 깨닫도록 만들어야 해요. 앞으로도 저처럼 복직기념 티볼리 구매자들을 많이 만들어볼께요. 그러니 복직 노동자분들도 절대 기죽지 마시고 당당하게 회사 잘 다니시길 바라요.

쌍차회사, 복직 노동자, 연대한 시민사회 우리 모두 참 잘했고, 앞으로도 계속 잘한 일로 남도록 네버엔딩 화이팅해요!

늦은 시간까지 인터뷰 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정 :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왼쪽) 정성훈 공동대표, (가운데) 신순희 회원, (오른쪽) 김득중 지부장은 신순희 회원이 '쌍차 복직기념'으로 구입한 티볼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왼쪽) 정성훈 공동대표, (가운데) 신순희 회원, (오른쪽) 김득중 지부장은 신순희 회원이 '쌍차 복직기념'으로 구입한 티볼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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