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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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그 이후
  • 송필경
  • 승인 2020.06.23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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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태일인가?』- 일곱 번째 이야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올해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50주기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열사가 살던 옛집이 남아 있는 대구에서는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대경지부 등 대구시민사회단체들이 오는 11월 13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대구전태일기념관 개관을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본지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의 첫 출발점이자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 중의 한 분인 전태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그의 삶이 우리 역사에 남긴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대경건치 회원으로 오래 전부터 열사의 삶의 족적을 쫒아온 송필경 논설위원의 『왜 전태일인가?』를 연재한다. 송필경 논설위원의 『왜 전태일인가?』는 오는 8월까지 1달에 2-3회 연재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깃털보다 가벼운 죽음이 있고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 있다. 전태일의 장엄한 죽음은 민주화의 밑그림이 되었고 비로소 남한 사회의 자생적 진보가 의미 있는 첫걸음을 디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태일의 분신은 어떤 거대한 담론보다 더 큰 울림이요, 헐벗은 민중의 실존을 자각한 사자후였다.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 ‘바보’ 전태일은 잔인한 현실에서 누구보다 맑은 눈으로 자본주의 사회 모순의 근본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잘 사육된 개의 순종적인 눈이 아닌 자유로운 들판에서 자란 늑대의 맑은 눈으로 말이다.

‘임금님은 벌거숭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비비 꼬고 빙빙 둘러말하는 먹물 이론가를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두툼한 렌즈로 보는 먹물들의 눈에는 직관의 맑은 진실이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진보란 기존 질서의 ‘질적인 변화’를 가로 막는 보수적인 행태를 바꾸자는 의미가 아닐까. 오직 물질의 ‘양적인 팽창’에만 매몰하는 천박한 보수 가치를 거부하는, 다시 말해 현실 모순을 직시하고 개선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의식과 행위를 진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진보라는 말에 고귀하다는 의미를 포함한다면 자신의 몸을 불사른 ‘바보’의 진보보다 더 고귀한 진보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선방이나 토굴 또는 수도원에서 혹은 강단에서 얻는 관념적 깨달음보다 더 위대한 깨달음을 ‘바보’는 청계천 평화시장의 잔인한 노동판에서 얻었다. 이 ‘바보’가 스스로 몸을 불태움으로써 남한의 자생적 진보는 횃불을 올릴 수 있었다.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 받았을 것!’
‘전태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모두 지극히 옳은 말씀이다.

전태일의 단순해 보이는 외침인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남한 사회의 지식인과 기득권층에게 산업사회로 진입하고 있던 남한 사회의 맹목적인 저돌성에 근원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순종해야 할 무지렁이가 내뱉는 정당한 외침, 이 듣기 싫은 불편한 진실에 대해 자본주와 압제자들은 경종을 느끼기보다 분노에 찬 짜증을 내었다.

장례를 치루기 전에 장례식장에 목사와 목회자들이 찾아왔다. “이 집사님(이소선 어머니), 우리가 아무려면 집사님을 나쁜 길로 인도하겠습니까? 당국에서는 합의금 액수를 더 늘릴 수가 있답니다. 이만한 돈을 받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이라니까요. 이제는 더 이상 버티지 마시고 합의를 보세요. 장례를 치룬 다음에 요구해도 늦지 않습니다. 어차피 장례는 치룰 거 아닙니까?“

이소선 어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이들은 돈으로 이 사태를 흐지부지하려는 정부와 업주의 끄나풀이었다.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무리들은 끈질겼다. 어머니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분노를 터뜨렸다. 흰 고무신을 벗어서 높이 쳐들고 목사에게 뺨을 내리 칠 기세로 달려들었다.

“야, 이 양심도 없는 목사야. 너도 목사냐? 만약에 예수를 믿는 어느 여집사가 남편도 없는 상태에서 장남마저 죽어 버리고 자신의 처지가 딱해지자 돈에 욕심을 부리고 죽은 자식 시체를 팔은 값으로 합의금을 받으려고 하면 목사인 당신들이 오히려 뜯어 말리며 자식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며 바른 길로 인도를 해야 진짜 목사이지, 안 그렇소. 당신 같은 엉터리 목사가 영혼을 구한다고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면서 교인을 가르치니 교인들이 불쌍하다. 이 한심한 목사야. 모가지를 빼내기 전에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마라. 내가 이 고무신짝으로 네 뺨 때기를 때리고 싶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종이라니까 하나님 입장을 봐서 내가 참아 주는 것이니 어서 꺼져 버려. 이 돼먹지 못한 목사야. 감히 어디다 대고 지금 합의를 보라고 지껄이는 거야.”

아, 이소선 어머니의 꼿꼿한 신념이 없었다면 우리 노동운동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거액에 눈이 멀어 합의를 했다면, 그 순간 전태일 정신은 우리 역사에서 하룻밤의 연기가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전태일과 이소선 어머니는 평소에 자신들이 다니던 창현감리교회를 설립한 대한수도원의 원장이며 동시에 임마누엘수도원의 원장인 여성 목사와 신앙적으로 두터운 관계였다. 이소선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신앙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목자(牧者)였다.

그러나 막상 아들의 분신사건이 발생해 온 나라 안팎이 떠들썩한데도 원장 목사는 단 한 번도 병원으로 위로 차 조문이나 심방을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몹시 섭섭했다.

원장 목사는 동생을 조문 보내 이렇게 말하라고 했다. “태일이가 분신했으니 빨갱이 놈들이 좋아서 춤추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목회자에게도 이렇게 지시했다고 한다.

“전태일은 자살해서 죽었기 때문에 절대로 장례식에 동조하거나 관여하지 말고 가족들을 도와주거나 협력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한국의 대부분 기독교는 이처럼 착실한 신도였던 전태일의 죽음을 비난하며 왜곡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한국 기독교의 이러한 성향에 대하여 전태일은 이미 예견했다. 전태일은 교회에 암세포처럼 침투한 물질만능주의 성향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죽어가면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앞으로 두고 보세요. 많은 목사님들이 내가 죽으면 분명히 내 죽음을 자살이라고 말할 거예요. 그리고 자살했으니 지옥에 갔다고 말할 거예요. 그렇지만 성경책 요한복음 15장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평화시장의 친구들과 수만 명의 불쌍한 여공들을 위해서 죽은 것이니 주님의 말씀에 어긋난 것이 절대 아니에요”

전태일의 분신소식에 청와대는 처음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언론을 통해 이 사건의 파장이 무섭게 번지자, 11월 16일 청와대는 긴급대책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는 노동청장을 대책 실무 책임자로 앉혔다. 노동청장에게 돈으로 회유해 더 이상 논란이 확산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그런 돈다발을 단호히 거절했다.

11월 23일 전태일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쓴 펀지가 비로소 전달됐다. 비서실장 김정렴이 이 편지를 박대통령에게 읽어줬다. 다 듣고 난 박대통령은 “아, 그 친구, 젊은 사람이 그래도 예절 하나는 바르구만, 데모하는 문제들이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더 자세히 알아보고 빨리 조치를 취하도록 해”라고 하면서 전태일의 정중한 글에는 나름 흡족해 했다.

박대통령은 사태 해결을 비서실장과 정보기관에 일임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5개월을 앞둔 시점이어서 사태 논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자 중앙정보부가 깊숙이 개입해 온갖 회유와 동시에 정치적인 협박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태풍에도 항구의 안전을 꿋꿋이 지켜내는 방파제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겨우 이긴 박정희는 1972년 유신으로 선거를 없앴다. 온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유신의 권력으로 사회 구석구석을 감시했다. 그럼에도 시멘트 바닥에서 잡초가 올라오듯 미약하나마 곳곳에서 민주적인 노동조합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스스로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1970년대 초부터 청계피복노조를 시작으로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타, 반도상사, 원풍모방, YH무역 등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탄생해 노동자 권리를 위한 운동이 불붙었다. 공단 지역의 영세 노동집약적 사업장에서 남성에 비해 취업 유지가 불안정했던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었다.

동일방직 노조는 1972년 국내 최초로 여성을 노조지부장으로 선출했다. 동일방직 노조는 강경 노조 운동을 선도했다.

역사의 흐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노동 투쟁이 있었다. 1979년 4월, 가발 수출업체인 YH 무역 노동자들이 회사의 무책임한 폐업에 항의하기 위해 장기 투쟁을 벌였다. 대부분 여성 노동자였다. 회사와 정부가 계속 무관심하자 8월 9일에 노동자들은 도시산업선교회의 주선으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했다. 8월 11일 경찰이 강제 해산하면서 여공 1명이 추락사했다.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이들을 적극 위로하고 변호했다. 유신 국회는 노조를 보호하고 유신 체제를 비난한 김영삼 의원을 국회에서 제명했다. 이를 빌미로 유신에 대한 저항이 끝내 폭발했다. 10월 16일에 부산 마산 지역에서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결국 10.26으로 이어져 유신의 심장에 총알이 박히면서 18년간 군홧발로 통치한 박정희 체제는 무너졌다. 한 노동자의 각성이 노동자의 집단 저항으로 이어져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유신 정국을 와해시킨 셈이다.

1979년 10.26 사태는 전태일의 정신이 이어진 사건으로 우리나라 민주화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YH 여공들의 투쟁은 전태일 정신의 총화였고 캄캄한 유신을 끝장낸 도화선이었다. 22년밖에 살지 않은 무지렁이 전태일, 이 미약한 사람의 진실한 힘이 역사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우리는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흐름은 1987년 6월 항쟁의 영향으로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 현대그룹, 대우그룹 등 대기업 남성 노동자 중심의 사업장에서 대규모 노조를 세울 때까지 한국 노동운동의 주도적인 흐름을 이루었다.

한편 순수한 영혼의 외침에 경종을 받고 청계천에서 계속되는 닭장 속 같은 삶의 고통에 동감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먼저 젊은 지식인과 양심적인 종교인들이 모였다.

“대학생 친구 한 사람 있었으면…”은 전태일이 생전 입버릇처럼 되뇌던 말이었는데, 사후에 전태일에게 가장 먼저 다가간 사람은 서울대 법대생인 장기표였다.

장기표는 법대 이념서클인 ‘사회법학회(社會法學會)’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 멤버들은 사회변혁을 꿈꾸었고, 그 출발점을 노동문제로 잡았다. 이 서클은 1970년 10월 3일 주간 소식지 자유의 종을 창간했다.

경향신문 10월 7일자에 전태일의 노력으로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한 기사가 나왔는데 사흘 후 10월 10일 자유의 종은 이 기사를 그대로 실었다.

장기표는 평화시장의 노동 실태를 특집으로 다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전태일 분신 보도를 접하고 크게 당혹했다. 뉴스와 신문을 통해 전태일의 어머니가 ‘아들의 요구를 이루기 전에는 장례를 치룰 수 없다’며 사체 인수를 거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장기표는 명동성모병원으로 찾아 이소선 어머니를 만났다. 장기표는 어머니에게 학생으로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의논하기 위해서 찾아 왔다고 말했다. 당시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보상과 장례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나섰으나 어머니는 대학생인 장기표만을 신뢰했다.

장기표는 정치적인 좌표가 이리저리 많이 흔들려 노동 운동의 정체성을 잃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전태일의 친구로 남아있다.

신학대와 교회들을 중심으로 기독청년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영락교회 청년대학부 회장을 맡고 있던 서울대 법대 대학원 재학생 최종고를 비롯한 몇몇 학생들이 주축이 돼 유력한 교회에서 장례식을 하려고 교회들을 찾아 다녔으나 거절당했다. 자살해서 죽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전태일의 장례식을 마친 며칠 후인 11월 25일에는 연동교회당에서 신구교 합동으로 전태일 추모예배를 개최했다. 이 예배에서 전태일의 죽음을 우리의 속죄의 제물로 받고 모든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싸움에 몸 바칠 것을 고백하는 헌신고백문을 발표함으로써 기독교의 체면을 그나마 살렸다.

일요일인 15일, 광화문 사거리에 위치한 새문안교회당에서는 ‘정치와 신학’이라는 주제로 연세대학교 신학대가 주최한 공개강좌가 있었다. 서남동 학장이 사회를 봤다.

강사로 나선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사무총장 오재식 목사는 ‘오늘의 정치신학의 동향’이라는 강연제목으로 시국을 빗대어 격정적인 내용의 강연을 통해서 참석자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받았다.

이 강좌에 참석한 최종고를 비롯한 몇몇은 큰 자극을 받았으며 그 강연 내용을 훗날 회고했다. 최종고가 강연에 참석한 후 기록한 그날의 일기를 살펴보면 이날 오재식의 강연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 길로 새문안교회에서 열리는 연세대 신과대가 주최하는 공개강좌 ‘정치와 신학’에 갔더니 서남동 학장의 사회로 오재식선생의 ‘오늘의 정치신학의 동향’이 시작되고 있었다. 오선생 강연은 정말 내가 들어본 강연 중에 제일 시원한 얘기였다…

오 선생 자신도 자기 얘기에 감동한 듯 설교하듯이 힘주어 내리 퍼부었다…

나중에 들으니 전군(전태일)에 관한 보도를 읽고 몇 개월 준비한 아카데믹한 강연준비를 다 버리고 새로 전부 현실적인 문제를 추려 오늘 강연을 했던 것이라 한다.

- 1970.11.15

이날 새문안교회 강연을 마친 오재식은 서남동 학장을 비롯한 몇몇과 함께 최종고 청년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명동성모병원 영안실로 찾아와서 조문을 하고 이소선 어머니를 만났다. 그들은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 큰 위로를 전하려 했으나 오히려 어머니에게 큰 자극을 받았다.

11월 16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는 학생 100여 명이 모임을 갖고 가칭 ‘민권수호 학생연맹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전태일의 시신을 인수해서 서울법대 학생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한다고 발표를 했다. 선봉장은 장기표였다. 그 정보를 얻은 경찰은 장례식장의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경찰들의 팔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며 “학생들을 내 놓아라 이놈들아. 안 그러면 내가 죽어도 절대 장례식을 치루지 않을테다. 이놈들아!”하면서 소리를 지르며 대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어머니는 대학생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장례식을 치룰 수 없다며 기자들과 업주들에게 항변했다.

영안실에는 많은 서울대 법대생들이 돌아가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이날 한국기독학생회의 지도교수들과 기독학생회 대표들이 전태일의 주검 앞에서 서울법대 학생들을 만났다. 이 만남은 1970년대 학생운동사에 큰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다.

새문안교회에서는 이날 이후 전태일의 장례식을 마친 사흘 후인 22일 주일에 새문안교회 대학생부 학생 40여 명이 전태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회와 그 공모자인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는 금식기도회를 가졌다. 새문안교회는 가장 앞장서서 전태일의 분신을 아파하며 동참했던 교회로 기록되었다.

전태일 장례식을 모두 마친 다음날인 20일(금)에는 서울대 법대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이날은 애초에 서울시내 각 대학교 학생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종교 단체가 대규모로 규합해 합동으로 추도식을 거행하려 했는데 학교당국과 사정기관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오재식은 그 다음 달인 12월에 당시 영향력 있던 월간지였던 기독교사항 12월호에 '어떤 예수의 죽음- 故 전태일씨의 영전에'라는 글을 게재하여 기독교계에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보수교단‘에서는 이미 전태일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단정해 교리적으로 위배된다며 무조건 매도하던 와중에 벌어진 이 논쟁은 크게 떠들썩한 것은 아니었으나 사회구원과 민중 신학의 신학적, 역사적 의의를 갖게 한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22일 새문안교회 대학생 신도 40여 명은 전태일의 죽음에 사회가 책임이 있고 자신들도 공모자라며 속죄를 위한 금식 기도회를 열었다.

23일에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 집전으로 추모 예배를 거행했는데, 여기서 김재준 목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위해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라고 했다.

젊은 지성인들과 양심적인 종교인들은 미처 몰랐던 노동자의 모진 삶의 고통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언론도 노동문제를 사회 이슈화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로써 정치계와 정당들도 정부의 반노동자 정책에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에 대항하는 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은 1971년 1월 23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했다.

분신의 울림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가장 강렬한 메시지로 남아 있다. 박정희가 이룩했다는 화려한 ‘한강의 기적’이란 포장지 속에는 수백만 노동자의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 전태일의 분신은 이 화려한 포장지를 벗겨낸 셈이다. 그러자 양심적인 젊은이, 지식인, 종교인이 그 고통의 울음을 듣게 되었다. 고통의 울부짖음은 남한 사회의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1960년대 어린 소녀들은 부모를 위해 약간의 돈을 벌기 위해 유순한 저임금 노동자 집단을 형성했다. 이 여성들이야말로 1960년대 수출주도의 주춧돌이었다. 하루 15시간 이상 중노동에 매달 하루 또는 이틀 휴가를 받는 이들 여성의 희생 위에서 수출업자들은 황금 동산을 쌓아 올렸다.

전태일 희생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아마도 전태일 분신 사망 바로 그 달에 결성한 청계피복노조였다. 이소선 어머니는 자본과 권력의 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노조 결성 이후 1970년대부터 내내 강력한 노동 운동을 이끌었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 노동환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점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1978년 방림방직의 한 노동자의 절규는 이렇다.

“(방림의) 긍지와 영광의 어두운 그늘 아래서 우리 여성노동자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너무나 심하게 일을 해왔으며,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었다.

우리가 노동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가난한 부모를 돕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교복을 입고 싶지만 그 대신 시골의 우리 고향을 떠나 서울의 낯선 환경에 와서 공장 일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돈을 벌로 왔지만 그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개발독재의 경제성장은 노동자의 삶을 충족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과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했다. 부가 산봉우리처럼 축적되는 다른 한편에서는 빈곤의 골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전태일의 불꽃은 고도성장의 어둠에 가려져 있던 우리 사회의 근본 문제들을 비추는 역할을 했다. 민중의 현실을 깨달은 일부 지식인들은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의 민중운동에 참여했다.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 선 학생운동은 정권 비판을 넘어 사회구조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을 학습하면서 1980년대를 준비했다.

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화적인 인간관계를 꼽으라면 수운 최제우와 녹두장군 전봉준의 만남, 그리고 전태일과 조영래의 만남이라 생각한다.

최제우-전봉준은 썩은 왕조 체제를 개혁하려 하였고, 전태일-조영래는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 속 민중의 각성을 일깨웠다. 다시 말해 시대모순을 돌파한 시대정신을 구현한 분들이다.

칸트의 말을 사용해 보자. 전봉준-조영래 없는 최제우-전태일은 맹목이고, 최제우-전태일 없는 전봉준-조영래는 공허하다.

그러나 시대정신을 이끈 두 분과 두 분은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위대한 영혼들이 아름답게 만났다.

최제우-전봉준, 전태일-조영래(사진제공= 송필경)
최제우-전봉준, 전태일-조영래(사진제공= 송필경)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숭고한 청년 전태일을 만난 위대한 청년 조영래!
우리 현대사에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의미 있는 신화였다.

조영래는 1969년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했으며 1970년 전태일의 장례식을 서울 법대 주관으로 치렀을 때 참석했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자마자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됐으며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973년 4월 만기출소 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수배돼 1974년부터 1979년까지 6년간 쫓기는 생활을 했다.

위인은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다고 한다. 조영래는 도피생활을 하면서 전태일의 영혼을 찾아갔다.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씨를 만나고 당시 전태일과 함께했던 청계천 노동자와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기 위해 청계천 일대를 누볐다. 조영래가 본 것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 가난한 노동자의 삶이었다. 많은 노동자를 만나며 지식을 전해주기도 했지만, 오히려 노동자들에게서 삶은 귀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도피기간동안 전태일의 삶을 완벽하게 복원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은 『전태일 평전』이란 제목으로 1983년 전두환 정권의 모진 탄압에도 출간되어 우리나라 노농운동사에 가장 큰 울림을 남겼다.

다시 정리해보자. 전태일은 암담한 노동현실의 근본원인은 근로기준법이 준수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태일은 비록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법대 교재인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구했다. 전문적인 법학개념과 법률용어로 된 책과 씨름했다. 그는 이때부터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러나 아름답고 숭고한 청년 전태일에게 자신이 죽고 난 뒤지만 그토록 원했던 대학생 친구인 아름답고 위대한 청년 조영래가 찾아왔다. 숭고한 청년 전태일은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인간 고통의 본질을 알아냈고, 위대한 청년 조영래는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 내려와 그 고통을 이 세상에 드러내었다. 혼과 혼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을 나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격조 있는 만남’이라 부른다. 근대사에서 동학의 두 주역인 최제우와 전봉준의 만남처럼.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 모든 민주화운동은 이들 두 분-전태일과 조영래-에게 가장 많은 빚을 안고 있다 해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전태일 서거 50년, 조영래 서거 30년, 지금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진보는 전태일과 조영래가 보여준 삶의 의미를 복원해야 한다. 이분들은 꺼지지 않는 횃불이요, 시대정신이 솟아나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우리는 이 횃불로 암흑을 밝히고, 끊임없이 솟는 이 샘에서 자유와 평등과 사랑의 목마름을 해소해야 한다.

***이 글의 많은 내용은 재미 최재영 목사의 전태일 실록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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