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혈전은 쫄딱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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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혈전은 쫄딱 망했다
  • 신순희
  • 승인 2020.12.22 17:2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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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신순희 논설위원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을 때 나는,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누구까지 죽일 수 있는지를 무기력하게 목도한 느낌이었다. 검찰과 언론의 야합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위험한, 통제되지 않는 권력이었다. 그런 더러운 권력에 사랑하고 존경했던 분이 목숨을 잃었다는 인식, 그 과정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부끄러움은 마음 깊숙이 가라앉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2020년 오늘날,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맹목적인 팬덤과 광기어린 검찰 죽이기 작업은 11년 전 노무현 트라우마가 복수혈전으로 뿜어져 나오는 PTSD 딱 그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광증에 편승해 이익을 보려는 몇몇 협잡꾼은 언제나 그렇듯이 섞여있고 말이다.

무소불위의 검찰권력은 실존하고 위험하다. 영화 『부당거래』에서 일개 대한민국 검사 류승범에게 미운털이 박혀 그야말로 탈탈 털리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해 질 정도의 탄압을 받는 주인공의 모습이 과연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일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을까?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한결같이 위험한 권력이라면 분산되거나 통제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의 이 방식은 아니다. 정말이지 절대 아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치는 게, 이리도 당당하고 이리도 무식하게 훔치는 게, 조금의 자기성찰이나 부끄러움도 없이 계속 훔치고 또 훔쳐대는 게, 이제는 처음에 성경을 읽으려고 시작한 일이라는 걸 기억이나 하나 싶게 오로지 훔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게, 훔치는 일을 말리려는 사람은 마치 성경과 신을 모독하는 사탄인 마냥 저주를 퍼부어대는 게, 무리한 도둑질이 횡횡하여 많은 국민들이 이게 진짜 나라냐 싶을 정도로 실망하고 절망하고 있는데도 팬덤에 둘러싸인 채 못 들은 척 외면하며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옆에서 눈만 꿈뻑꿈뻑 대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정말이지 한때 진보를 자처했던 이들의 모습이 맞나 싶다. 작금의 사태를 연출하고 있는 집권세력을 진보가 아닌 ‘586 민주건달’이라 표현한 홍세화 선생의 표현력이 참으로 찰떡같을 뿐이다. 검찰개혁이란 명분 아래 내편은 털끝도 금지, 남의 편은 영혼까지 탈탈 털어대는 자들에겐 사실 건달보다는 양아치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만 말이다.

복수혈전은 늘 망했다. 왜냐면 복수는 가장 저열한 트라우마 극복방식이기 때문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우리가 악마를 보았을 때 악마도 우리를 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처럼 각자 넘치는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피는 피를 부를 뿐, 결코 미래를 부르지 못한다. 물론 유색인종과 이민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겨서 백인 노동자 계급의 절대적 지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트럼프의 정치 전략처럼 내편 네편을 더욱 선명히 나눠서 최소한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확보하려는 정치꾼들에게는 PTSD전략이 매우 유효하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정도의 편 갈라치기는 우리 편이 무슨 짓을 해도 상대편으로 넘어갈 수 없는 정치적 보증보험같은 역할을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얕은 수가 언제까지 통할까.
 
나만해도 이 지겹고 부끄러운 복수혈전의 와중에 그나마 점점 선명히 보이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그렇게나 가기 싫었을 팽목항에 머리 예쁘게 올리고 억지로 갔던 공주님만도 못한, 국민이 두 패로 나뉘어 패싸움을 벌이고 있고 그 사이에 낀 국민들조차 피로감에 지쳐가고 있는 이 개싸움 판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착한 임금님은 사실 옛날 옛적 그 예쁜 공주님과 소름끼치도록 닮아 있다는 깨달음이다.

박정희의 상주로서 한때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산업화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아무런 정치철학도 없이 국가비전도 없이 그저 비극적으로 죽은 아버지의 집단기억과 악수만으로 대통령자리까지 갔던 공주님과,

노무현의 정치적 상주로서 민주화 세력과 노무현 트라우마 지지층의 두꺼운 팬덤을 등에 업고 별다른 정치철학이나 업적도 없이 그저 부고를 전했던 그날과 똑같은 느릿한 말투만으로 대통령자리까지 온 임금님은 너무 닮아있다. 예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 선명하게 보인다. 그 둘은 한마디로 정치 금수저다.

친구를 잘 사귄 노태우를 제외하면,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심지어 이명박까지 모두 다 자신만의 뭔가(결코 등가로 취급하는 건 아니고)를 스스로 해내서 대통령 자리에 간 정치인들이다. 거칠게 말해서 적어도 비극적으로 죽은 누군가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허상으로 기본점수를 먹고 들어간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치 금수저에게는 치명적이고 근본적인 결함 있으니 그건 자신에게 기본점수를 쥐어준 죽은 망령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그의 복원 혹은 복수가 필수 미션이라는 점이다.

1대 금수저 공주님은 국정교과서라는 이름의 무리한 역사적 복수혈전을 시도했었고 2대 금수저 임금님은 검찰개혁이라는 이름의 광기어린 검찰복수 미션을 실행하고 있다.

무리한 복수미션의 끝에서 공주님은 아버지의 망령까지 껴안고 퇴장했었다. 복수혈전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던, 혹은 할 능력이 없었던 공주가 내려올 때 그 지긋지긋하던 ‘박정희 향수’라는 질긴 망령도 함께 스러졌으니 말이다. 그 어떤 외부의 노력으로도 힘들었던 일이 스스로 소멸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왜 박정희의 상주가 대통령이 되어야 했었던가 그 답을 찾은 느낌이었고 대한민국이 소비한 4년여의 시간이 그나마 의미 있게 느껴졌었다.

우리 착한 임금님은 과연 무엇을 안고 퇴장할 것인가. 이제 이 사회의 가장 강력한 적폐가 되어버린 586민주건달들 같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가짜 진보 망령들을 싹 쓸어가 주는 걸까. 결론의 디테일이야 뭐 지켜봐야겠지만 ‘복수’라는 과거집착형 정치는 필히 쫄딱 망해 사라질 것이다.

그 빈자리에는, 한때 시대적 소명을 다했으나 이제는 썩어버린 과거세력들이 모두 물러간 자리에는, 아마 젊은 세대들이 살아갈 새로운 미래의 세력이 자라날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은 언제나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나를 포함한) 과거 세력의 이 광란도 끝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참으면 지나갈 것이고 그때는 비로소 그 의미도 알게 되리라.

*본 기고글은 신문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신순희(하늘정원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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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H 2020-12-24 10:34:17
원장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근데 저희 어린 세대도 PC나, 페미/반페미, 경제 격차 문제로 또 싸움질 하면서 그렇게들 살아갈 것 같아서 서글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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