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을 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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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을 보내고
  • 송필경
  • 승인 2021.05.0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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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어린이!
어른이면 누구나 겪은 시절이다.

워즈워드는 어린 시절,
무지개를 바라보면 마음이 뛰었다고.

나이 들어 그러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거둬 달라고 기도했다.

어린이(child)는 접미어에 따라 뜻이 다르다.
유치하다(childish)와 순진하다(childlike).

아,
나는

유치해서 추잡하게 늙을 것인가,
순진하며 맑게 늙을 것인가.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워즈워드의 시 무지개를 보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어느 선승(禪僧)의 네 구절 시가 생각난다.

이 시의 탁월한 해석은 도올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325쪽에 있다. 요약은 이렇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산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 네 구절은 결국 우리 삶이 어린애이다(childishness)에서 어린애답다(childlikeness)로, 상식에서 상식으로, 순박에서 순박으로, 철학에서 예술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전달한다.

기나긴 구운몽도 현실로 되돌아 왔으며, 백척의 긴 대나무 끝에 매달렸던 선객(禪客)도 한 발자국 더 짚고 땅에 떨어졌다.

인간이 의식을 가지면 그 의식은 자기의 자발성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기존 관습과 타성의 틀에 따른다. 그때 본 산과 물은 소박한 모습이었다.

인간이 문제 상황에서 자발적 의식을 가졌을 때 그 의식에서 어떤 아포리아(aporia 길 없음)에 부닥치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된다.

여기서 인간은 비극을 느끼며 탐구를 시작한다. 탐구는 인간에게 계속 문제 상황을 안겨주면서 곤혹으로 이끈다. 동양적 인간은 곤혹을 해소하는 하나님이 안 계시기에 산과 물, 그 자체로 해결책을 구해야 했다. 결국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는 무차별의 공상(空相 실체가 없음)으로 해탈·초월해야 했다.

그러나 해탈·초월 자체를 궁극적으로 또한 해탈·초월해야 했다.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인 그 웅혼한 무차별의 경지에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현실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여기에 동양적 인간의 비극과 동시에 위대함이 있다.

동양인에게는 ‘하늘나라(Kingdom of God)’는 산이요 물이다. 산과 물, 이것이야말로 알파요 오메가며 거기에 군더더기를 붙일 필요가 없다.

이 세계의 저주에서 이 세계의 사랑으로 되돌아가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현실 긍정이야말로 동양의 지고한 예술의 경지다.

요즘 정치권에서 ‘복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에게 연민을 느끼고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이것저것 따지며 유치하게 배배꼬는, 딴에 유식한 사람을 많이 본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적 탐구를 통해 문제 상황을 지혜롭게 파악하기 보다는, 지식의 양으로만 우격다짐으로 문제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너그럽지 못한 부류가 많다.

지식의 양만으로는 결코 지혜로울 수가 없다. 우리 사회에서 전문직에 있는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이 심하다.

다시 말해 전문직일수록 순진하지 않고, 너그럽지 않고, 지혜롭지 않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의 비극이 아닐까?

좋은 말은 좋은 말이고, 좋은 정책은 좋은 정책이구나 하는 어린애다운 순수함을 우리 사회, 특히 정치권에서는 빨리 되찾아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뛰는, 그러한 나이든 사람이 되려고 나는 노력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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