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치과병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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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치과병원 이야기
  • 양정강
  • 승인 2021.05.17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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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양정강 논설위원

건치신문에 논설위원이라는 이름으로 쓴 글이 20여 차례가 된다. 과연 읽을만 했는지 궁금해 돌아보니 댓글이 몇 개라도 달린 글은 개인사와 관련한 옛날 이야기와 나이 들어 드는 감회를 전한 잡문(雜文)뿐이었다.

최근 소아치과학회 학술대회에서 `치과의사학으로 읽는 소아치과 이야기`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미래아동치과 원장 권훈` 연자가 직접 방문한 `Forsyth Dental Infirmary`와 `Eastman Dental Infirmary`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있었으나 미국 뉴욕 맨하탄에 있던 `구겐하임치과병원(The Murry and Leonie Guggenheim Dental Clinic)`은 별 언급이 없었다.

하긴 지난 1931년에 시작해서 1967년에 폐쇄하고, 이후 1954년에 시작한 뉴욕치과대학에 `치의학 연구소` 지원만 이어졌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한수 동서 치학 견문기(1977 석암사)』에 “미국 보스턴에 어린이의 의료복지를 위한 포싸이스(Forsyth) 치과의원이 있었다. 우리나라 치과의사들에게 한때는 잘 알려졌던 병원”이라며 1910년 John Hamilton Forsyth와 Thomas Alexander Forsyth 형제가 설립한 배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있었다. 

지난 1915년 Eastman Kodak 필름회사 설립자인 George Eastman(1854-1932)이 기부한 $1,200,000로 시작한 Rochester Dental Infirmary는 현재 Univ. of Rochester Medical Center, Eastman Institute for Oral Health로 이어지고 있다. 

위 세 치과병원은 모두 부자들이 기부한 돈으로 가난한 집 어린이들을 무료로 진료하면서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엔 이런 치과병원이 없다. 한때 환자도 많고 돈을 잘 번다고 소문난 치과 원장이었는데 평생 이재(理財)엔 단 일초도 생각 없이 지낸 것이 몹시 아쉽다. 

지난 2014년 2월 건치신문에 쓴 「한글과 한자」라는 제목의 글을 50여 년 전인 지난 1963년, 미국 뉴욕 `구겐하임 치과병원` 취업 이야기로 시작하다보니, 주제에 대한 관심보다 `구겐하임`이란 이름이 익숙한 때문인가 “1963년이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을 때였겠네요”라는 댓글이 떴다.

답글을 “미술관을 지은 철강재벌이자 자선사업가인 구겐하임이 시내 초등학생들의 무료 진료를 위한 치과병원을 수 십 년간 운영하다 1960년대 말에 폐쇄함”이라고 달았는데 알고보니 잘못이 있어 잠시 해명을 한다.

마이어 구겐하임(Meyer Guggenheim, 1828-1905)은 스위스에서 태어나 지난 1847년 미국으로 이주해 이후 큰 부자가 되어 `광산왕`이란 별명을 얻었는데 자녀 10명 중 머리 구겐하임(1858-1939)은 가업을 계승해 자선단체와 치과병원을 만들었고, 구겐하임 미술관은 솔로몬 R. 구겐하임(1861-1949)이 설립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생각하던 중 징병 신체검사에서 뜻밖에 병종 불합격을 받았다. 일곱살 때 2층 창가에서 연을 날리다 그만 길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한쪽 눈에 출혈이 있었고 죽는 줄 알았는데 다음 날 멀쩡히 깨어났다고 한다. 

해서 훗날 수도육군병원 안과에서 `외상성 시신경 위축증(Traumatic Optic Nerve Atrophy)` 진단을 내렸는데 한쪽 시력이 그저 일부 뿌옇게 보여도 평생 큰 불편은 없었다. 다만 외안 현미경(External Eye Microscope)으로 그림을 그릴 때는 눈을 옮겨야 했고 미국서 자동차 운전 면허장 시력검사를 양안 현미경 모양새로 할 때, 반만 읽고 고개를 들어 들통이 나기도 했다.

군 징집 면제를 받고 나서는 졸업 후 미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세브란스 치과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1954년 구겐하임치과병원에서 근무하고 뉴욕대학에서 치주학 수련을 받은 후 귀국해 치주학 강의 및 대한치과페리오학회 창립을 주도한 김낙희 선생 댁을 찾아갔다.

케이크를 하나 사 들고 이대 후문 근처 비포장 길을 따라, 단지 구겐하임 치과병원 주소 하나를 알기 위해 방문한 기억이 새롭다. 그때 훗날 세계은행 총재가 된 김용(1959~) 아드님은 아기 침대에 있었나보다.

구겐하임치과병원 취업을 위한 서류를 열심히 꾸려 보냈으나 졸업 때까지 무소식이라 대학원 진학을 했다. 1년이 지나 구겐하임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아 펼쳐보니 뜻밖에도 다가오는 8월부터 근무 할 수 있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읽으면서 방 안에서 방방 뛰었다. `아 이제 미국을 가나보다.'

하긴 `라떼`는 김포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지금 롯데호텔 자리인 반도호텔 앞에서 출발했는데 김동순 학장과 동급생 몇의 전송을 받고, 공항에서는 가족은 물론 목사님 기도까지 받고 떠나는 시절의 미국 길이었다. 초청장에는 10개월간 체류에 월급 $238, 수련목적은 `Specialization in Dentistry for Children`이라고 기록돼 있었다.

선배 두 분과 함께 평생 처음 타는 미국 비행기(Pan Am)로 뉴욕까지 가는 길은 직행이 없던 시절이라 동경 하루 체류, 샌프란시스코 경유였는데 선배 한 분은 시애틀까지 한미재단에서 마련한 화물선을 이용했다.

구겐하임치과병원은 매년 세계 30여 나라에서 70여 명을 초청, 10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첫 1주일엔 치아모형에서 와동형성 등 실습교육으로 시작, 일과 후엔 1시간씩 기초학 포함 강의도 듣고 진료 중엔 수시로 감독치과의사(Supervisor)들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국인 최초로 지난 1950년 구겐하임치과병원에서 근무한 이는 `경성치전`을 졸업한 노광욱(1922년생)으로 추정된다. 이후 1950년대에 김낙희, 이진명, 그리고 1960년대에는 1967년 폐쇄 때까지 약 30여 명이 근무했다. 고국이 어려운 시절 때문인가 대부분 미국에 머물러 여생을 보냈고 귀국 후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한 이들도 몇 있다. 

Forsyth와 Eastman에서 수련받은 이들 중 두 분을 소개한다.

김영호(1926-2008): 1949년 서울치대 3회 졸업 후 1952년 The Forsyth Dental Infirmary for Children에서 소아치과 인턴과 교정과 Fellow. 이후 Eastman Dental Center에서 교정과 Fellow 및 Univ. of Rochester 치의학석사(M.S. in Dental Science), Tufts Univ. 치대 치의학사(D.M.D.). 이후 세계적인 교정학자로 MEAW Tech. 개발.

김귀선(1920-2013): 1944년 경성치전 졸업 후 Forsyth(1954-1957)에서 교정과 Fellow. 귀국 후 1959년 초대 대한치과교정학회장 및 대한치과의사협회장, 연세치대 학장 등 역임.

미국에서는 어린이치과병원이 100여 년 전에 시작했는데, 국내에서는 어린이치과의원이 지난 1992년 처음 생겼다.

지난 1898년 UCLA 치대를 졸업하고 USC에서 교직생활, 25년간 소아환자만 진료하고 정리한 어쩌면 최초 소아치과 교과서 『Operative Dentistry for children』을 저술한 M. Evangeline Jordan(1865-1952)을 소개하면서, 국내에서 지난 1992년 처음으로 소아환자만 진료하는 어린이 치과의원을 개원하고 이후 2005년 소아치과 최초 병원으로 승격한 `CDC어린이 치과병원` 이재천 대표 원장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양정강(사람사랑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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