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국가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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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국가보안법?
  • 송필경
  • 승인 2021.05.2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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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4.27시대연구원 이정훈 연구위원이 지난 16일 구속돼 논란이 일고 있다. 촛불정부에서 아직도 국가보안법으로 말이다. 솔직히 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신성시 해야 할 ‘사상의 자유’에 대해 아직도 국가보안법이라는 희대의 악법으로 규제를 가하겠다는 발상 자체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인간의 자유로운 생각을 감옥에 가둘 수 있는가?’ 나는 다음의 두 사례를 ‘사상의 자유’에 관한 양심적 표준으로 삼고 있다.  


1953년은 쿠바의 현대사 흐름에서 아주 중요한 분수령을 이루는 해였다. 당시 27살의 젊은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는 그 나이에 누구도 꿈꾸기 힘든 꿈을 꾸었고, 그 꿈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

카스트로는 미국의 천박한 자본과 마피아 갱단의 손아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조국 쿠바를 구하기 위해 그 해 7월 26일 무장 항쟁을 일으켜 정권 전복을 꾀했다. 친미 괴뢰 독재자 바티스타는 선거를 없애고 쿠데타로 집권했다. 선거를 통해 정치에 입문하려던 카스트로는 투표용지 대신 총을 들고 혁명으로 나가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카스트로는 20대 초반 남성 116명과 여성 2명을 선발해 훈련한 후 몬카다 병영 공격 계획을 세웠다. 병영을 습격해 충분한 무기를 확보하고 인근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들어가, 마피아 집단의 비호를 받던 바티스타 정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리는 대규모 민중봉기를 계획했다.

혈기만 왕성하던 청년 돈키호테들은 제대로 총 한방 쏘지 못하고 실패해 대부분 체포되고, 일부는 도망쳤다. 전투 중 체포된 부대원 56명은 즉결 처형당했다.

카스트로는 부대원 19명과 산으로 도망갔다가 6일 만에 체포됐다. 카스트로 일행을 체포한 병사들은 이마에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격분해 있었다. 카스트로는 흉악하고 살인을 일삼던 병사를 향해 기죽지 않고 모욕적인 소리를 퍼부었다.

“우리는 해방군이다. 너희들은 독재자의 하수인이며 살인자들이다.”
그 말에 더 흥분한 병사들은 카스트로 일행을 바로 죽이려고 총을 겨눴다.
“쏘지마!”
지휘자인 키 큰 흑인 대위 페드로 사리아(Pedro Sarría Tartabull;1900∼1972)가 질서를 잡으려고 애쓰면서 명령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쏘지 마, 쏘지 마. 사상(Idea)을 사살할 수는 없어. 그 누구도 사상을 죽일 수 없어.”

카스트로가 재판을 받을 때인 1953년 9월 26일자로 법정에 보낸 스스로 쓴 변론 요지의 마지막은 이렇다.

우르겐스 법정 귀하
…나는 만약 내 삶을 위해 내 권리나 명예의 극히 일부분을 포기해야 한다면 천 번이라도 그렇게 하고자 할 것입니다. 즉 “동굴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올바른 사상은 큰 군대 이상의 힘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사리아 대위의 중얼거림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비교하기 위해, 볼테르가 루소를 옹호하면서 포효한 ‘사상의 자유’를 월 듀란트의 『철학이야기』에서 요약 인용하겠다.

18세기 프랑스 지성의 상징이며 프랑스 대혁명의 불을 지핀 사람은 볼테르(1694-1778)와 루소(1712-1778)였다. 루이 16세는 감옥에서 볼테르와 루소의 저작을 보고 “이 두 사람이 프랑스를 파괴했다”고 말했다.(루이 16세는 어처구니없게도 프랑스란 국가를 자신의 왕조 부르몽 가家로 생각했다.)

볼테르와 루소는 봉건 귀족 정치에서 중산 계급 지배로 넘어가는 역사 전환 과정에서의 두 외침이었다. 그러나 서로 주장은 너무 달랐다.

부유한 보수주의자이며 상류 사회의 햇볕을 즐긴 볼테르는 언제나 이성을 신뢰했다. 아주 가난하게 자란 루소는 이성을 신뢰 않고 늘 행동을 원했다. “법률을 폐지하라. 그러면 인간은 평등과 정의의 성스러운 시대에 들어서리라”와 같은 급진적인 주장을 과격하게 폈다.

1755년 11월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3만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볼테르는 숙연했으나, 프랑스 성직자들이 재난은 리스본 주민들의 죄의 대가라고 말한 것에 격분했다.

“신은 재난을 방지할 수 있었으면서도 방지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재난을 방지하고 싶었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는가”라고 되물었다.

이 신학적 딜레마에 대해 루소는 전혀 엉뚱한 견해를 나타냈다. “이 재난에 대해서는 인간 자신이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인간이 도시에 살지 않고 시골에 살았더라면 이와 같이 대규모로 죽지는 않았을 것이며, 인간이 옥내에서 살지 않고 옥외에서 살았다면 집이 인간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루소의 주장에 시민들이 찬사를 하자, 화가 난 볼테르는 인간이 이제까지 휘둘러 온 모든 지적 무기 중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인 '볼테르의 조소’로써 돈키호테 같은 루소에게 응수했다.

볼테르는 루소에게 응수하기 위해 사흘 만에 세계 문학사 중 가장 훌륭한 단편으로 평가받는 『깡디드』를 완성했다. 이 단편에 대해 프랑스의 문호 아나톨 프랑스는 “볼테르의 손끝에서 펜이 달리며 웃는다”라고 평했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문명·문학·학문에 반대하고 미개인이나 동물과 같은 자연 상태로 돌아가라고 계속 주장했다.

이 책을 받은 볼테르는 “인류의 발전에 역행하는 귀하의 새 책을 받게 되어 감사합니다. 일찍이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기 위해 귀하만큼 지혜로운 노력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귀하의 책을 읽노라면 네발로 기어 다니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나는 60년 전에 이미 그 버릇을 버렸으므로, 불행하게도 그것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라고 답했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계속 미개 상태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볼테르는 유감으로 생각했다. “보시는 것처럼, 원숭이가 인간과 비슷하다는 의미에서, 루소는 철학자와 비슷하오!”라고 비꼬았다.

볼테르는 현재의 상태가 잘못된 것은 인정하나 루소 같은 문명 비판을 어린애 생각으로 보았다. 볼테르는 인간은 미개 상태보다 문명 상태에서 더 잘 살 수 있다고 확신했다. 볼테르는 루소에게 “인간은 원래 맹수로서, 문명사회는 이 맹수를 쇠사슬로 묶어 놓고 그 야수성을 길들이는 것이며, 사회 질서로만 정신과 기쁨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볼테르는 지성이 인간의 교육과 변화를 통해 점차적으로 평화롭게 이 순환을 단절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루소는 낡은 제도를 파기하고 마음의 명령에 따라서 자유·평등·우애를 근본으로 하는 새로운 제도를 수립할, 본능적이고 격정적인 행동에 의해서만 이 순환을 단절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볼테르는 루소를 열정과 공상에 가득 차 있고, 고귀하지만 현실성이 빈약한 몽상가이며, 오늘의 우리 잣대로 보면 국가보안법을 무시하는 극좌과격주의자로 보았다.

그러나 스위스 당국이 과격한 주장을 편 루소의 여러 저서를 금서로 지정하고 불을 태우자, 볼테르는 그 유명한 사자후를 외치며 스위스 당국을 공격하면서 루소를 옹호했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사상(Idea)에는 하나도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사상을 말하는 당신의 권리를 죽을 때까지 옹호할 것이다”

볼테르와 루소, 이 두 지성의 높은 격조는 결과적으로 프랑스 혁명에 불을 질렀고 근대화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사상을 죽일 수 없다’와 ‘사상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죽을 때까지 옹호하겠다’는 같은 의미를 지닌 너무나 고귀한 진리다. 

프랑스 대사상가 볼테르와 쿠바 일개 군인 사리아의 ‘사상의 자유’를 시공을 초월하는 만고불변의 공통 원리로 파악하는 묘미가 역사 공부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격스럽다. 그러면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이 촛불정부에서 아직도 펄펄 살아있으니 21세기 우리 사회가 그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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