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대혁명과 촛불혁명
상태바
프랑스대혁명과 촛불혁명
  • 송필경
  • 승인 2022.01.11 12: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1789년 7월 14일 빠리 중심부에 있는 감옥 바스티유의 함락으로 프랑스는 모르는 사이에 혁명을 맞았다. 바스티유 함락은 굉장한 결과를 초래했다. 인민이 갑자기 자신의 실력을 인식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외쳤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자유를 얻었다. 물론 몇 사람의 목은 떨어졌지만, 그러나 그것은 악인의 목이다. 여러분! 바스티유의 점령으로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한참 뒤 생각해 보니, 잠깐 동안 벌어진 파리의 소동은 프랑스의 상황을 바꾸어 놓은 장대한  서사극의 1막 1장이었다. 이 날 사건은 프랑스인과 세계 사람들의 눈에 상징적이며 찬란한 최고의 업적으로 길이 남게 됐다.

1789년 당시 프랑스는 유럽 제1의 강대국이었다. 인구 2천 6백만 명으로 유럽의 16%. 철학가와 예술가의 영향이 전 유럽에 미쳤다.

법적으로는 절대왕정이었으나, 자유주의자들이 15년간 집권하고 있었다. 그들은 폭정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국내는 소란으로 동요되고 정부는 신용을 상실하고 있었다. 통치계급이 스스로 권위를 상실하고 직책을 포기한 것이 계기가 돼 혁명으로 이어졌다.

법원은 법의 수호자라는 의무를 포기한 특권계급의 옹호자였다. 국민을 분노케 만든 것은 전제정치가 아니라 귀족의 오만한 계급적 편견이었다. 중세기 제도를 일부만 파괴했기 때문에 남겨 놓은 일부가 고통을 주었다.

“볼테르는 우리의 이성을 매혹했고, 루소는 우리의 감정을 깨우쳐주었다. 우리에게는 서글픈 일이기는 하나 가소롭고 진부한 체제를 지성인들이 공박하는 것을 보고 민중은 은밀한 쾌감을 느꼈다.”

보수도 얼마 없이 흙투성이가 돼 뛰어다니는 사람은 교구 사제들이고, 주교와 궁정의 성직자들은 영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막대한 수입을 가지고 비속한 사치생활을 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 귀족 계급이 모든 권력을 상실한 프랑스에서 봉건제도의 잔재 청산을 위한 혁명이 왜 일어났을까?

귀족계급이 스스로 이러한 사태를 빚어놓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질병에서 유래한 하나의 징후였다. 국가 재정의 세입 결함을 보충할 수 없게 된 유일한 원인은 귀족과 성직자들의 재산에 대해 과세를 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특권계급의 거부행위 같은 국가에 대한 반역행위를 지지한 법원의 태도, 행정 당국자의 무관심 등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근본적인 개혁을 불가피하게 했다.

온건하고 침착한 시예즈 신부는 제3신분(민중)을 이렇게 규정했다. 의회의 제1신분은 사제, 제2신분은 귀족이었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전능(全能)이다. 이때까지 제3신분은 무엇이었던가? 전무(全無)였다. 앞으로 제3신분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그 무엇이 되고자 할 것이다.”

미라보(Mirabeau 1749〜1791)는 역사와 현실에 조예가 깊었지만, 방자한 태도로 귀족들의 불쾌감을 자아냈다. 돈으로 좌우할 수 있는 탕아라고 지목돼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귀족들이 미라보를 배척하자 제3신분으로 의회에 출마했다. 

“나를 미친개라고 하는데 그래도 좋으니 선출해주면 전제주의와 특권계급을 모조리 물어 죽이겠다.” 미라보는 당선돼 삼부회에서 가장 특출한 웅변가로서 빛났다.

“지금이야말로 이성과 인간이 그 천부의 권리를 회복해 자유와 오랫동안 고대하던 황금시대를 이룩할 행운의 순간이다.” 미라보는 배의 키를 잡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신랄하게 뇌까렸다. 그러자 미라보에게 궁정은 양보했고 귀족은 항복했다.

“역사는 야수의 행동과 다름없는 행적을 너무도 빈번하게 전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간혹 영웅을 골라낼 수 있을 정도이나 이제 우리는 참다운 인간의 역사를 창조할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대혁명의 상징인 바스티유가 당시 현실적으로 무엇이었던가보다도 상징적으로 무엇이었던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바스티유의 성탑은 파리 중심지에 존재하는 봉건제도의 음산한 영상으로 보였고, 그에 따르는 ‘국왕의 영장’과 불법 투옥은 더욱 불길한 악평을 조성하고 있었다. 바스티유 폭동의 유일한 원인은 봉건적 특권의 고집이었고, 폭동진압 방법은 특권의 포기에 있다.

바스티유 함락 이후 “시민계급, 농민 심지어 여자들까지도 명철하고 자부심이 만만해 생기발랄하게 보인다. 멍에를 지고 있던 인민들이 다시 곧바로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별안간에 프랑스에는 이제는 양도할 수 없는 천부의 권리를 가진 평등한 시민만이 존재하게 됐다. 7월의 햇살 아래 성탑을 공격하는 인민포병들, 특권을 포기햇던 젊은 귀족들, 모든 이념과 기대가 상상을 자극해 그 시대의 고귀한 감정과 위대한 희망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국왕 루이 16세( Louis XVI 1774〜1793)는 우둔한 표정을 지었고 법률은 아직도 잠자고 있었다.

미라보는 말했다. “혁명을 추진하는 데 있어 곤란한 일은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수습하는 것이다.” 미라보는 무엇보다도 혁명에 거역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국민이 권리를 갖게 되는 대혁명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며, 그들이 모든 권리를 회복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왕정과 국민 간의 불가분성은 전 프랑스인의 가슴속에 분명히 간직돼 있다.”  

“본인은 궁정의 적이 아니고 오히려 한편이 되려 하고 있다는 것을 궁정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애써주기를 바란다.” 이에 대해 왕비 마리 앙투아네뜨(Marie Antoinette 1755〜1793)는 어리석게도 대답했다. “우리는 미라보의 구원을 받아야 할 만큼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얼마 안 돼 왕비는 미라보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미라보는 말했다. “국왕은 지금 단 한 사람의 신하만을 가지고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왕비이다.”

미라보는 루이 16세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한 주먹으로 쥐려 해도 쥘 수 없는 기름칠한 상아공을 상상하면 된다.”

“나는 질서를 재건하려는 사람이다. 그러나 구체제의 재건은 아니다.” 이렇게 말한 미라보는 뒤에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루이 16세 부부와 은밀히 거래했다고 한다. 미라보는 방탕한 생활 때문인지 혁명 2년 뒤 급사했다.

미라보가 죽은 뒤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1758〜1794)가 혁명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루이 16세 처형에 앞장섰다. 사실 루이 16세는 폭정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왕은 무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무죄라고 선언하는 순간 혁명이 유죄가 된다. 이제 와서 혁명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가? 왕을 죽여야 한다. 혁명이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1793년 1월 루이 16세는 단두대에 올랐다. 10개월 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단두대에 올랐다.

그리고 1794년 7월에 수만 명을 단두대로 보낸 로베스피에르도 반대파에 잡혀 결국 단두대에 올랐다. 잔인하게 남을 죽인 만큼 잔인하게 죽은 ‘공포정치가’ 로베스피에르에 관한 평가는 다양하다.

로베스피에르는 도덕이란 현실적으로 소수파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우세했던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일부 선택된 엘리트주의였다.

이에 맑스는 로베스피에르의 민중과 민주주의를 위한 순수한 진정성을 이해하면서도 부르주아적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문제의 근원인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정치의 힘에만 기댔다고 평가했다.

로베스피에르를 단두대에 보낸 반대파들은 곧 부패와 타락에 빠져 추악함을 보여주면서 혁명의 물을 흐리게 만들었다.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프랑스혁명은 수많은 크고 작은 혁명을 거쳤다. 약 80년 뒤 1871년 파리코뮌은 1789년 대혁명에 버금가는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사건이다.   

2022년 올해로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지 233년이 지났다. 프랑스에서는 아직도 혁명이 진행형이다.

앙드레 모로아(Andre Maurois 1885〜1967)의 ‘프랑스사’ 가운데 ‘프랑스혁명’을 다시 보고 있다. 인류보편사의 관점에서 ‘촛불혁명’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라는 관심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정부의 무기력과 결단성의 부족이 이것보다 더 잔인한 다른 권력의 승리를 초래하게 된 점, 그리고 ‘1789년파’가 그들이 예견하지 못한 그들의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를 승인한 것 등은 우리 ‘촛불’에서도 일어난 사실이었고, 앞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우려이다.

지난 2016년과 2017년 촛불을 직접 들었던 입장에서 이 ‘촛불정부’ 5년을 평가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실망한 부분이 더 많아서일까?

하지만 아직 촛불혁명은 5년도 채 되지 않았다. 4.19, 5.18, 6.10 항쟁과 촛불을 포함해도 우리 남한의 민주민중혁명 역사는 채 62년밖에 안 된다. 프랑스의 233년 역사에는 한참 못 미친다.

언제나 지금보다 더 못한 권력의 탄생을 막는 일에 주력하다보면 역사는 한 발짝씩 앞으로 더 나아가리라는 믿음을 나는 가지고 있다.

앙드레 모로아의 이 표현이 참 재미있었다.

“국왕은 지금 단 한 사람의 신하만을 가지고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왕비이다. (그의 모습은) 한 주먹으로 쥐려 해도 쥘 수 없는 기름칠한 상아공을 상상하면 된다.”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인식과 태도로 ‘王’이 되려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