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실험과 대북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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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실험과 대북 지원
  • 편집국
  • 승인 2007.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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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무청사 신축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적십자병원 성원들

이 글은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남북구강보건교류협력특별위원회 소식지 상반기호에 실린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손종도 부장의 글이다. 글 내용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지난 2006년 10월 11일 중국 심양을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하는 방북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날만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한 10월 9일 이후 이틀만에 하는 방북인 것이다. 동행한 기술진 중의 한 명은 부산에 일하러 간다고 집에 이야기하고 나왔다고 한다.

북 핵실험 이틀 후 방북

북한의 핵실험은 국제사회와 한반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을 중심으로 유엔은 즉각적인 제재 결의한 채택에 돌입했으며 한국 정부도 남북관계에 대한 정책 재검토에 들어갔다.
대북 포용정책을 폐기하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과 같은 경제협력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10여년간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전개된 인도적 대북 지원에 대한 의견도 양분됐다. 핵위기로 촉발된 남북간의 긴장 고조를 막기 위해서라도 인도적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과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에 동참하기 위해서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남북간의 협력사업 중단은 지방자치단체들로 이어졌다.

서울시는 북한의 핵실험 바로 다음날인 10월 10일 남북 교류협력 사업 및 남북협력기금 집행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인천시도 10일 비상대책회의를 갖고 인천항-개성시 물류수송체계 구축사업, 수해지원사업 등의 대북사업을 중단키로 했다. 전라북도는 11일 인천항을 통해 보내려던 평남 남포시 축사건설지원용 자재 선적을 중단했다. 경기도 역시 그동안 진행된 남북간의 교류협력사업을 잠정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술진은 당초 11일로 예정됐던 방북을 그대로 진행했다.
북한의 핵실험은 한반도 차원을 뛰어넘는 큰 사건이지만 우리는 민간 차원의 대북 지원단체로, 과거 서해교전이나 조문파동 등 당국 관계가 단절된 시기에도 민간지원과 교류는 중단없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민간 차원의 지원과 교류는 또 북한 주민의 인도적 상황의 악화를 막는 효과만이 아니라 남북간 신뢰의 최소 조건을 확보하는 역할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온한 분위기의 평양

오후 5시경 도착한 평양비행장의 분위기는 평온했다.
착륙 전 하늘에서 내려다본 평양은 9월 말의 평양과 다르지 않았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만난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 관계자들은 우리를 이전과 다르게 매우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들 민화협 참사들도 핵실험 이후 남쪽의 분위기에 대해 무척 궁금해 했다.

이번 방북은 적십자병원 내 약무청사의 신축을 위해서다. 약무청사 건축 현장의 현장소장과 설비 담당, 철골 기술진 건설 인력과 함께 북을 방문한 것이다. 현장소장과 설비 담당은 이미 지난 9월 말에도 열흘 동안 평양에 있다가 추석 연휴 기간 서울에 다녀 온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떠들썩한 남쪽과는 달리 평양의 주민들은 일상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핵실험과 그 여파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민화협 관계자들에 국한됐고, 적십자병원 성원 등 일반 평양 주민들은 핵실험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생긴 에피소드 하나.
이번 약무청사 기술진들은 건축 현장에서 직접 일을 하는 사람들로, 최소 15일 많으면 40일 이상을 평양에 체류해야 했다. 기술진이 받은 북측의 사증도 체류일이 66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공사 기일을 맞추려면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구분없이 일을 해야 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보통 일을 했으니 북측의 기준에서 보면 혹사도 이런 혹사가 없다.

남쪽의 기술진들이 이렇게 일을 하니 현장에 나와 있는 적십자병원 약무병동의 일부 성원들도 토요일, 일요일 쉴 수가 없다. 개인보다는 집단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국가이기는 하지만, 쉬는 날인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 하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마침 10월 17일(화)은 타도제국주의동맹 80돐로 17일, 18일 이틀간 휴일이 됐다고 했다.
하지만 약무청사 신축 현장은 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제 23∼24살 된 약제사 아가씨들의 불만이 들려왔다.
“17일 내일 남자 친구와 유보도에 놀러 가기로 했는데, 이렇게 또 일을 하면 어떻게 하냐?”라는 것.

북의 핵실험으로 바깥 세상은 시끄럽지만 평양의 일반 주민들은 그렇게 일상을 살고 있었다. 남쪽의 대북 지원이 지속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의 식량위기 재연 우려

비록 뚜렷한 성과 없이 끝나기는 했지만 6자 회담이 재개되면서 핵실험 정국은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북한 주민에게는 더욱 힘든 시간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올 겨울 북한의 식량 위기가 재연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2월 26일 사단법인 좋은벗들은 북한식량위기 가능성에 대한 전문가 진단으로, “북한의 대량아사, 다시 오는가?”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열었다.
좋은벗들은 최근 북한의 식량 사정을 가장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데, 좋은벗들이 추산하고 있는 2006년 북한의 곡물 생산량은 280만톤에 불과하다. 여기에 중국으로부터 20만톤, 세계식량계획(WFP)의 7만5천톤을 합해도 총 공급량은 307만5천톤에 그친다는 게 좋은벗들의 생각이다.

북한은 1995년 이후 남쪽을 포함해 외부로부터 연 평균 100만~200만톤의 식량을 차관 또는 무상으로 도입해왔다.
하지만 북핵으로 조성된 외부 환경으로 이러한 식량 지원이 급감했다.

WFP는 2006년 5월부터 2008년 4월까지 1억 달러를 모아 대북 인도적 지원 프로그램을 운용할 계획었으나 기부금은 2006년 12월 26일 현재 15.8%밖에 모아지지 않았다.

1996년부터 지난해까지 1조7천억원을 낸 WFP의 가장 큰 손 미국은 올들어 한 푼도 내지 않았다. 북한 핵실험 이후 유엔의 대북 강경제재를 외쳐온 일본도 마찬가지다.

WFP는 2006년 10월 26일 발표한 ‘긴급 보고서’에서 “가까운 미래에 신규 기부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2007년 1월 외부 지원에 심각한 차질이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유니세프(UNICEF)도 북한에 사용할 목적으로 목표했던 모금액 1,120만 달러의 절반도 채 거두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식량위기가 현실화할 경우 식량 위기의 가장 큰 희생양은 어린이와 노인, 배급 후순위 주민 등 취약계층이다.
1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북한의 구조적 식량 위기가 어린이들에게 집중되는 상황에서 또다시 위기가 찾아올 경우 이들이 가장 취약한 상황에 놓일 것은 분명하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야기된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남쪽의 대북 지원이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쪽 대북 지원단체들의 협의체인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는 최근 진행된 워크숍에서 정부의 대북 식량 지원을 촉구하는 등 북한의 식량위기 재연을 막을 수 있는 다양한 캠페인을 벌여 나가기로 했다.

손종도(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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