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건강을 보호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의료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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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건강을 보호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의료제도
  • 문정주
  • 승인 2022.07.07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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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주의 공공의료 다시 읽기-2]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의 저자, 문정주 선생은 공공성을 의료의 핵심으로 보고, 우리나라에 일차의료와 공공병원체계 도입이 시급하다는 관점에서 풀어낸 글을 본지에 격주로 연재할 예정이다. 

문정주 선생은 공공의료 연구자·가정의학과 전문의. 종합병원 임상 의사로 12년, 보건소 공무원으로 10년, 보건복지부 공공의료지원단 연구원으로 10년간 일한 뒤 서울의대 겸임교수,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임감사를 지냈다.

해당 연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이탈리아는 사람들에게 흔히 음악과 미술의 나라, 역사 유적과 관광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여서 이탈리아라 하면 열정적인 오페라, 눈부신 햇살 아래 펼쳐진 바닷가 길을 떠올리곤 했다. 이 나라를 달리 보게 된 것은 공공의료에 관련해 각 나라 의료제도를 연구하면서였다. 인권 존중, 약자 보호, 형평, 연대를 원리로 삼아 국영의료를 운영하는 나라가 이탈리아인 것을 그때 비로소 알았다.

1970년대 초까지 이탈리아의 의료제도는 매우 부실했다. 국가적인 의료보장이 없어 집단별로 제각기 의료를 이용하므로 직업이 무엇인지에 따라, 직장이 어떤 의료보험에 가입했는지에 따라, 의사를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었다. 가족이나 이웃 간에도 누구는 치료받고 누구는 치료받지 못하는 식으로 차별이 예사였다. 직장이 없거나 돈이 없는 사람은 아무 기금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불평등이 깊어져 국민의 분노가 커지고 기존 체제가 위기를 맞이하자, 건강할 권리에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모두를 위해 국가가 책임지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70년대 중반에 드디어 국영의료 도입을 위한 입법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의료에 대한 책임을 수용한 뒤, 아직 국영의료가 도입되기 전 일부 분야에 사업을 시작했다. 가족상담실을 설치해 여성 건강을 보호하는 의료사업이었다. 이는 당시 시급한 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획이자 동시에 국민이 국영의료를 미리 맛보게 하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활동이기도 했다.

가족상담실

1975년, 전국에 가족상담실Consultorio familiari이 설치되었다. 명칭에 ‘가족’을 쓰고 있으나 정확하게는 어머니와 임신부에게 또는 임신을 원하거나 피하고 싶은 여성에게 상담과 의료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주정부가 운영하며 누구든,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이든 이용할 수 있고 이용료는 없다.
  
처음 가족상담실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어머니 또는 부모를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지원한다. 둘째, 여성에게 산부인과 진료 등 의료를 제공한다. 셋째, 임신한 여성과 태아 건강을 보호한다. 넷째, 피임에 필요한 정보와 의료를 제공한다.
  
1978년에 본격적인 국영의료 시대가 열리며 가족상담실에는 임신한 여성의 사회적, 법적 권리를 보호하는 임무가 추가되었다. 더 적극적인 역할을 맡게 된 것으로, 상담도 지원도 범위를 넗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상담받는 여성이 직장 노동자라면 임신 기간 동안 위험한 작업이나 야간 근무를 피할 권리가 있음을 알려주어 건강을 지키게 한다. 미등록 이주민이라면 임신 중에는 추방당하지 않는 것을 알려주어 안심하고 무료 진료와 분만을 이용하게 하고 신생아 예방접종까지 마칠 수 있게 지원한다. 가정폭력이나 빈곤 등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한 어머니와 아이들이 있다면 공공기관이나 지역 봉사단체와 협력해 해결 방안을 찾는다. 이와 같이 업무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상담실에 사회복지사가 추가되는 등 인력도 늘었다.

그래도 가족상담실 업무에서 중심 인력은 단연 조산사다. 조산사는 간호사 자격에 더해 임신과 출산 등에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경력을 쌓은, 여성 건강에 관한 전문인이다. 이탈리아어로 산부인과학을 Ostetricia, 산부인과 의사를 Ostetrico(남성), 조산사를 Ostetrica(여성)라 쓰는데 Ostetrico와 Ostetrica는 그야말로 똑같은 낱말이다. 다만 남성 명사를 알파벳 o로 끝맺고 여성 명사를 a로 끝맺는 언어적 관행에 맞춰 끝자리 글자만 다르게 붙었다. 현대에 이르러 의사가 남성만의 직업은 아니게 되었지만, 옛 시대에 쓰던 명칭이 굳어져 그대로 부른다. 그런데 의사와 조산사의 명칭이 똑같다는 사실은 옛 시대에 그 둘 사이에 전문성이나 사회적인 신뢰에 차이가 없었음을 뜻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여성 몸에 일어나는 임신과 출산이니만큼 여성인 조산사가 더 큰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그 조산사가 지금도 가족상담실에서 임신한 여성을 돕는다. 의사, 사회복지사, 상담심리사, 교육학자 등과 함께 여성의 건강과 권리 보호를 위해 일한다.

인구가 445만 명인 에밀리아로마냐주에 가족상담실이 185개소, 청소년 상담소가 36개소, 이주 여성 상담소가 16개소 있다(2015년). 웬만한 동네마다 빠짐없이 설치돼 인구를 기준으로 할 때 서울 시내에 있는 주민센터보다 훨씬 많다. 이 상담실·상담소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중요한 장소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숫자다.

상담실을 방문하는 여성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것은 임신 진단과 등록, 정기적인 산전 진찰, 부모 교육, 산후 진료 등 아기 출생과 관련된 상담과 진료다. 그다음으로 많은 것이 여성 암 검진, 골반 통증이나 골반염 등 부인과 진료, 피임, 심리상담, 낙태 등이다. 에밀리아로마냐주에서 2015년 연간 이용자가 38만 명인데 그중 약 20퍼센트가 외국인일 정도로 이주 여성도 이곳을 마음 편히 드나든다.

에밀리아로마냐주 모데나의 카르피 가족상담실 직원들. 산부인과 의사(오른쪽에서 두번째)와 조산사들이다. (제공=문정주)
에밀리아로마냐주 모데나의 카르피 가족상담실 직원들. 산부인과 의사(오른쪽에서 두번째)와 조산사들이다. (제공=문정주)

 

안전한 분만

여성 건강을 보호하는 일에 최대 목표는 안전한 분만이다. 임신 기간 중 건강 보호는 동네 가족상담실이, 분만은 종합병원 분만센터가 맡으므로 두 기관 간 협력이 관건이다.

가족상담실에 임신부가 처음 방문하면 담당 조산사를 정해주고 상담과 진찰, 초기 검사를 받게 한다. 그 뒤 평균 4주마다 방문하게 하는데, 임신 경과가 순조로우면 조산사가 계속 관리하고 위험 요소가 있으면 산부인과 전문의가 관리한다. 임신 기간이 36주가 되면 임신부를 종합병원 분만센터에 있는 ‘만삭 진료실’로 보낸다. 
  
분만센터에서는 가족상담실이 보낸 건강 정보를 참고해 임신부 상태를 확인하고 출산이 임박할 때 입원해 분만하게 한다. 보통 4박 5일 입원하며 병동에서 산모에게 모유 수유 방법, 아기 목욕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분만센터를 퇴원한 산모는 다시 동네 가족상담실을 이용하며 조산사에게서 산후 건강관리와 신생아 돌보기에 도움을 받는다.

OECD 통계로 볼 때 이탈리아는 안전한 분만이라는 목표를 충실히 달성하고 있다. 생후 1년 이내 아기의 사망이 2020년에 1천 명당 2.4명(우리나라는 2.5명)으로 OECD 회원국 평균인 4.1명보다 훨씬 적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5.4명에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

안전한 분만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장치가 온라인 의료 네트워크다. 주정부가 관리하는 네트워크로, 모든 공공의료기관이 연결돼 정보를 주고받는다. 특히 가족상담실과 분만센터 간에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위급한 사태를 대비해 튼튼한 연결체계가 작동된다. 가족상담실에서 온라인으로 직접 분만센터에 진료나 검사를 예약할 수 있고, 진료 정보를 간편하게 전송하며, 고위험 임신부에 관해 실시간으로 분만센터 전문가가 가족상담실 조산사에게 자문해준다.

임신부의 입원과 분만, 갓난아기의 입원 모두 무료다. 국영의료제도가 필수의료를 무상 제공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분만을 할 수 없어 제왕절개 수술을 받거나 아기 상태가 나빠 집중치료실에서 값비싼 치료를 받아도 마찬가지로 무료다. 외래에서 받는 전문의 진료나 검사에는 본인 부담금을 일부 내야 하지만, 종합병원에 입원해서 받는 수술, 분만, 입원치료 등에는 돈이 전혀 들지 않아 출산하는 여성에게 경제적인 부담은 없다.

피임, 낙태, 그리고 ‘이름 없는 분만’

“아이의 탄생과 같은 중요한 사건은 스스로 확실한 생각을 갖고 계획해야 합니다.” 

이탈리아 국영 의료 안내서에 실린 피임에 관한 홍보 첫머리 글이다. 

여성이 임신하지 않을 권리를, 안전하게 어머니가 될 권리와 마찬가지로, 가족상담실이 보호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방지하고 원할 때 아기를 가질 수 있도록 피임하게 도와준다. 먹는 피임약, 자궁 내 삽입기구 등 선택 가능한 여러 방법을 알려주고 약을 처방해 무료로 받게 하거나 피임기구를 직접 장치해준다. 미처 피임하지 못한 채 성관계를 갖게 돼 임신할 위험이 있는 여성에게 응급 피임약도 처방하며 역시 무료로 받게 해준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에 완벽한 피임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언제든 원치 않는 임신이 생길 수 있다. 여성이 자기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으나 그 임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일 때, 출산은커녕 당장 임신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한 여건일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인다. 여성 삶에 가장 도움이 절실한 순간일 것이다.
  
1978년, 국영의료법이 제정되던 해에 「모성보호와 낙태에 관한 법률」도 국회를 통과했다. 임신 90일 이내 낙태를 합법으로 인정한 법률이다. 낙태를 범죄로 몰던 제도 아래 여성들이 불법 시술소에서 비위생적인 낙태 시술을 받다가 수없이 목숨을 잃고 난 뒤였다. 새롭게 쟁취한 이 권리를 보호하는 일도 가족상담실의 몫이 되었다.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에서 벗어나 삶을 지킬 수 있게, 낙태할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지원한다. 다만, 결정을 내리기 전 반드시 상담한다. 임신을 유지한다면 받을 수 있는 사회적 혜택을 확인하고, 임신을 중지하게 만드는 이유를 극복할 방안이 과연 없는지 돌아보는 상담이다. 그 과정을 거친 뒤에는 여성이 결정한 대로 시행하게 돕는다. 약물 낙태를 원하면 유산 유도제—우리나라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지만, 유럽을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 사용되는 먹는 낙태약이다--를 처방 해주고, 낙태 수술을 해야 하면 진료 증명서를 써주고 병원을 추천해 무료로 수술받게 한다.

임신 중지를 고민하는 여성에게 이탈리아 사회가 제공하는 선택지가 하나 더 있다. 아기를 키울 수 없지만, 한편으로 낙태도 하고 싶지 않은 여성을 위한, ‘이름 없는 분만partorire in anonimato’이다. 이 방법에서는 임신부가 자신에 관한 정보를 아무것도 공개하지 않고,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익명으로 분만한다. 분만 뒤에는 아기를 병원에 둔 채 산모만 퇴원하며 그 뒤 10일 동안 친권을 포기할지 결정할 여유를 보장받는다. 그 기간이 지나면 입양 당국이 입양을 기다리는 가족에게 아기를 보낸다. 삶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지키는 동시에 아기가 새로운 가족을 얻게 해주는 방법이다.

이탈리아 국영의료 안내서. 외국인에게 국영의료 이용 방법을 설명하는 책자다. 전체 25쪽 중 10쪽이 여성을 위한 내용으로, 특히 가족상담실에 관해 자세히 안내한다. 이탈리아어 외에도 8개 국어(알바니아어, 아랍어, 중국어, 프랑스어, 영어, 루마니아어, 스페인어, 우크라이나어) 판이 나와 있다. ⓒ Ministero della Salute (제공=문정주)
이탈리아 국영의료 안내서. 외국인에게 국영의료 이용 방법을 설명하는 책자다. 전체 25쪽 중 10쪽이 여성을 위한 내용으로, 특히 가족상담실에 관해 자세히 안내한다. 이탈리아어 외에도 8개 국어(알바니아어, 아랍어, 중국어, 프랑스어, 영어, 루마니아어, 스페인어, 우크라이나어) 판이 나와 있다. ⓒ Ministero della Salute (제공=문정주)

인권을 존중하는 의료

가족상담실은 ‘임신하는 몸을 가진’ 여성을 위한 장소다. 원하는 임신을 할 수 있도록, 안전한 출산이 가능하도록, 원치 않는 임신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의료를 제공하고 사회적 권리 행사를 지원해 건강을 지킨다. 어머니, 여성이 건강해야 가족, 공동체가 다 건강할 수 있다.
  
가족상담실 설치와 여성 건강 보호를 시작으로 이탈리아는 그 전 시대 의료제도의 차별과 불평등을 극복했다. 여성이면 누구든지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돈을 낼 부담도 없으며 미등록 이주 여성도 따뜻하게 보호하는 동네 가족상담실과, 첨단 분만시설을 누구나 이용하며 입원도 분만도 무상으로 해주는 분만센터는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국영의료가 추구하는 인권 존중, 약자 보호, 형평, 연대의 가치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현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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