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고귀하게 만든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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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고귀하게 만든 정치인
  • 송필경
  • 승인 2022.07.2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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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는 인도의 초대 총리이자 제3세계 비동맹주의의 선도자였다. 또한 저서 35권을 남긴 문필가였다.

아버지는 특권에 익숙한 귀족으로 아주 부유한 변호사였다. 덕분에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인 해로(Harrow school)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대학을 나왔다. 1912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인도로 돌아왔다.

이쯤이면 네루는 영국 식민지배 아래 인도에서는 최상류층 직위에 도달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열정적인 사회주의 신념을 간직하고, 인도의 유학파 정치인의 ‘잘난 체하는 저속함’을 싫어했다.

네루는 귀국 후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6번 투옥으로 9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간디가 암살된 뒤에는 인도 민족주의의 불꽃을 이어갔고, 인도 독립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부패하지 않았으며, 복잡한 인도의 종교 종파를 초월했고, 비전을 지닌 정치인이었다.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총리이자 존경받는 세계적 정치가로써 면모를 갖추었다.

영국에서 인도로 귀국하기 전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제 생각에 교육은 시험에 합격하거나 영어, 수학을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교육은 하나의 ‘정신 상태’입니다.”

대영제국에서 가장 우수한 교육을 마친 이다운 교양과 지성을 잘 나타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

“인도 민중의 모습과 비참한 처지, 그리고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부끄러움과 슬픔에 휩싸였습니다. 나 자신의 태평하고 안락한 삶과 이렇게 무수한 인도의 아들딸들이 거의 헐벗고 사는데도 이를 무시하는 하찮은 도시 정치가 부끄러웠고, 인도의 황폐와 나라를 뒤덮은 빈곤이 슬펐습니다.”

아주 부유함에도 변호사 일과 사교생활 모두에 염증을 느끼고 정치에 관심을 쏟았다. 마침 그 때 네루는 간디를 만났다. 충분히 누릴 수 있는 부르주아적인 안락을 거부하고 불복종이라는 저항을 선택했다.

더 높은 법인 ‘양심의 소리’에 따라 투옥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1919년 인도 펀잡 지방 소도시 암리차르에서 우리의 ‘5·18 광주학살’에 비유할 수 있는 영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그 소행의 냉혹함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학살은 절대적으로 부도덕하고 천박스러워 보였다. (중략) 그때 나는 예전 그 어느 때보다도 제국주의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부도덕하며, 그것이 얼마나 영국 상류층의 정신을 병들게 했는지 생생하게 깨달았다.”

네루는 그때부터 간디적인 고행을 받아들이고 빈민들이 이용하는 3등 열차로 여행했다. “보잘 것 없는 음식을 존경심을 가지고 함께 먹는 특권을 누렸다. 나는 비폭력이 몸에 배어있는 그들의 천성을 믿게 되었다.”

해로와 케임브리지 출신의 엘리트인 네루가 인도라는 나라와 인도인인 자신의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자기 이익을 챙기면서 ‘거실정치’를 추구하는 선출되지 않은 엘리트들의 자세로는 결코 독립을 얻어낼 수 없다는 걸 간디에게 배웠다. 정치는 민중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이어야 했다.

네루
네루

네루는 시사평론가를 겸하면서 논객으로써 언어적 재능의 기술을 닦았다. 그 경험으로 네루는 20세기 인도의 가장 세련된 저술을 남길 기회를 가졌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 3년간 감옥에 있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감옥 생활도 이로운 점은 있다. 격리당해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기 때문이다.”

3년간 투옥생활을 하면서 딸을 가까이서 돌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을 모두 196편의 편지에 담아낸 애틋한 저술이 바로 『세계사편력』이다.

딸이 올곧게 성장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뿍 담긴 광범위하고도 세심한 역사이야기다. 동시에 제국주의 열강의 패권 다툼 속에서 인도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가진 세계사적 인식이 오롯이 담긴, 의미 깊은 방대한 저작이기도 하다. 당시 13살의 딸 인디라는 자라서 훗날 인도 여성 최초의 총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3권으로 번역됐는데 1권은 591쪽, 2권은 608쪽, 3권은 582쪽이나 되는 방대한 저술이다.

『세계사편력』은 가진 자의 덕목이자 지도자의 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사상이 깊이 녹아들어 있다. 네루는 전문 역사가에 버금가는 해박한 지식과 세계관으로 각 나라의 역사와 상호 연관성을 꿰뚫었다.

네루는 1931년 1월 1일, 딸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소년소녀들이 보통 한 나라의 역사만 공부하고, 그나마 몇몇 사건이나 날짜 따위나 암기하는 것을 보면 참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란 서로 연관된 전체이므로, 만일 네가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지 못하면 어느 나라의 역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네가 한두 나라에 국한되는 답답한 역사를 배우지 말고 전 세계의 역사를 연구하라고 권하고 싶다.”

네루는 딸에게 세계 모든 민족의 자주성과 평등을 강조하면서 민족우월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네루의 『세계사편력』은 인도를 넘어 전 세계의 고전이 된 지 오래이다.

네루는 1947년에 인도 초대 총리를 역임했다. 1961년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외교를 따르는 25개 국가를 모아 문화적 다양성, 인권보호 등을 논의하는 비동맹회의를 이끌었다.

하지만 네루가 정치와 외교에서 남긴 유산보다는 『세계사편력』이라는 지적 유산이 후세에 더욱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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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편력』
『세계사편력』

나는 『세계사편력』(곽복희, 남궁원 옮김. 일빛. 1995)과 『네루 평전』(샤시 티투르, 이석태 옮김. 탐구사. 2009)을 읽었다.

내가 매혹당한 네루의 놀라운 점은 2가지다.

첫째는 당시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왔으면서도 엘리트 의식을 버리고 민중에 헌신했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하버드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 명문 대학을 나온 젊은 정치인이 많지만, 엘리트란 아집에 갇혀 있어 안타깝다. ‘잘난 체하는 저속함’ 말이다.

둘째, 『세계사편력』은 감옥에서 편지 형태로 쓴 글이다. 감옥에는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도 없었고,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책도 없었다. 그럼에도 2천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세계 역사서를 기억으로만 썼다는 것은 지성의 놀라운 능력이다. 지식으로만 쓸 수 없는 글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 젊은 정치인의 바람이 불고 있다. 참신한 점도 있지만 대부분이 편협하고 하찮은 정치적인 이슈에만 머물고 있어 폭넓은 세계관과 웅혼한 지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은 신자본주의의 양극화 심화, 전 지구를 위협하는 기후위기, 그리고 지구상 유일한 우리의 분단 상황이다. 이를 극복하려는 미래의 전망(비전)과 지혜와 의지를 갖추어야 진정 젊은 정치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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