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찌니- 정치를 고귀하게 만든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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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찌니- 정치를 고귀하게 만든 정치인
  • 송필경
  • 승인 2022.08.0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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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만해 한용운(1879〜1944)은 1926년에 『군말』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시 『님의 침묵』을 쓰게 된 의도와 목적을 제시한 서문에 해당하는 서시(序詩)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깨달음을 얻은 님에 대한 송시(頌詩; 인물을 기리는 서정시)로서, 님에 대한 여러 은유를 통해 님의 속성을 함축하면서 구원(救援)을 바라는 만해의 마음이 깊이 배어 있다.

다음은 작품 『군말』의 원문 일부이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시의 제목인 ‘군말’이란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을 뜻하는데 만해는 일제강점 시대란 혹독한 환경에서 꼭 필요한 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역설로 사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기룬’은 ‘기릴 만하다’ 외에 여러 뜻이 있다. “기룬 것”은 시인에게 그리움,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석가와 칸트에 어깨를 나란히하며 기릴 사람인 이태리(伊太利; Italy)의 마시니는 누구인가?

마시니는 마찌니(Giuseppe Mazzini; 1805〜1872)를 가리킨다. 그는 ‘원칙에 대한 존경, 정의와 진실에 대한 존경, 희생 그것도 끊임없는 희생에 따라’ 정치를 한 정치인이었다. ‘신념을 품은 사람들이라면 조국에 대해 결코 절망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란 믿음으로 19세기 이태리 통일 운동에 매진한 정치가였다.

로마제국 멸망 후 1,400여 년 동안 이태리는 작은 지역 국가로 분열하고 때로는 강대국에 점령당해 볼품이 없었다. 19세기 이태리의 당면 과제는 외세 배격과 민족통일, 그리고 정치 민주화였다.

1870년에 이태리는 오랜 분열을 청산하고 통일하는데 지도자 역할을 한 세 사람이 있다. 마찌니와 더불어 가리발디, 그리고 카부르인데 이들을 이태리 통일의 삼걸(三傑)이라 한다.

카부르(Camillo Cavour; 1810~1861)는 통일의 구심세력이 된 피에드몽트 왕국의 재상으로서 날카로운 현실 감각과 국제외교로 통일완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현실 정치가이다.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1807~1882)는 모집한 지원병 1천 명으로 시실리 왕국을 석권한 군사 지도자로서 영웅적 전설을 남겼다.

마찌니가 한 일은 무엇일까? 마찌니는 단명했던 로마공화국의 삼두체제의 일원이 됐던 것을 빼고는 공식적인 직책을 맡았던 적이 없었다. 또 그가 혁명군을 탁월하게 지휘했던 것도 아니다. 사실 그가 시도했던 봉기는 모두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현실 정치에서 마찌니는 실패자였다. 현실 정치인들은 마찌니를 통일과업에 방해가 되는 거추장스런 존재로 보았다. 마찌니는 공화국을 세우려는 자기 이상에 집착해 왕정이 주도하는 통일은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도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태리 민중의 힘으로 오스트리아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태리 통일을 주도한 세력은 피에드몽트 왕국이었고, 오스트리아 세력을 몰아낸 것도 책략이 담긴 국제외교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이태리 통일이라 하면 마찌니를 가장 먼저 손꼽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치에 있어서 겉으로 드러난 실제적 행위보다는 그 행위를 있게끔 한 풍토, 그런 행위의 밑바탕이 된 사상이 더욱 중요하다.

카부르가 능란한 국제외교를 폈다 해도 통일을 지향하는 애국심에 불타는 이태리 민중이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가능했을까? 가리발디가 지원병을 훌륭히 지휘했다고 한들 그 지원병들이 모일 수 있게끔 해준 밑바탕이 없었던들 통일투쟁이 가능했을까?

통일은 떨쳐 일어나는 민중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는 마찌니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옳은 것이었다. 책략이나 외교는 이 밑바탕에 근거해야 비로소 가능했다.

마찌니가 한 일은 통일이라는 이상을 향해 이태리 국민을 분발케 한 것이었다. 마찌니는 글을 썼고 팜플렛과 신문을 제작했으며 민중에게 연설했다. 교육을 통해 이태리 민중을 사상으로 무장하려 했다.

혁명적 봉기를 여러 번 시도한 것도 민족의식을 깨우치려는 목적이 있었다. "수십 년의 교육보다 한 번의 개혁이 국민을 더욱 깨우친다“고 마찌니는 강조했다.

마찌니는 민중의 힘을 신뢰했다. 자신이 설정한 이상과 의무를 위해 모든 것을 철저하게 희생한 삶을 보면 숙연함과 향기를 느끼게 한다. 마찌니처럼 희생과 의무를 완벽하게 실천한 사람은 역사에 흔치 않다.

정치가는 물론 혁명가에게도 가슴 한 구석에는 명예욕이나 쾌락욕, 허영심 등이 자리잡고 있다. 마찌니처럼 티 없는 삶을 발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찌니는 누구보다도 정곡을 찌르는 비장의 무기를 지녔다. 민중을 드높은 열정으로 분기시키려는 인물은 민중의 헌신적 동기에 호소해야 한다는 것, 어떤 위대한 원칙이 제시될 때라야만 사람들은 삶을 아끼게 만드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영웅적 행동으로 용솟음친다는 것을 알아보는 재능을 마찌니는 지녔다.

통일 이태리를 만들려는 노력은 수많은 생명이 사라지고 망명, 투옥, 가난이 따르며 가정들이 흩어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참담한 생활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임무의 부름에 따라 이 일을 떠맡을 수 있게끔 되어야 했다.

삶의 목적은 행복 추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긴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라고 마찌니는 생각했다. 확신이 없으면 사람은 계속되는 고난 앞에 결국은 꺾여 타락하고 만다고 봤다.

마찌니는 이러한 면에서 도덕가, 도덕적 스승이었고 또 그의 도덕이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에 입각하고 있다는 면에서 종교가였다.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티 없는 삶으로 마찌니는 이태리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마찌니는 통일된 이태리의 이상의 상징이었다.

마찌니의 70 평생은 고통과 처절한 실패, 참담한 환멸의 가시밭길이었다. 기나긴 고난에도 마찌니가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던 것은 깊은 종교적 신앙과 도덕적 원칙 때문이었다.

마찌니가 꿈꾸던 공화국 이태리는 자신의 생전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마찌니는 자기의 삶이  한낱 낭비에 불과하다고 한탄하며, 통일을 눈앞에 뒀지만 책략이 난무하는 이태리의 정치 현실에 환멸을 느끼며 죽었다.

마찌니가 원했던 공화국 이태리가 탄생했지만 마찌니가 생각했던 높은 도덕적 원칙에 따라 세계를 이끌어가는 이태리는 아직도 요원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마찌니가 제시했던 이상과 원칙은 두고두고 이태리를 이끌어가는 별이 되리라.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인도의 위대한 영혼인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는 마찌니에게 다음과 같은 추모의 글을 남겼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오늘날 이태리를 하나의 독립국가로, 그 인민들이 명백한 한 민족으로 인정받은 데 기여한 결정적인 사람은 마찌니다.

마찌니는 1873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마찌니의 적들은 지금은 그의 친구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뜬 후에야 그의 진실을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의 장례식을 위해서 8,000여 명의 조객이 모였다. 그는 제노아(Genoa)에서 가장 높은 곳에 묻혔다.

현재 이태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하나로 여긴다. 경건하고 종교적인 인물이었으며 가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기심이나 자만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을 뿐더러 이웃의 고난을 자기의 고난으로 간주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전 생애 동안, 단지 한 사람의 개인이 정신력과 철저한 헌신을 통해 자기 나라를 우뚝 솟게 한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찌니는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마찌니의 위대한 생애를 추모하며 1905년 6월 22일.

***
1980년 5월 비상계엄령 아래서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대학은 긴 방학이 아니라 8월 말까지 3개월 반 가량이나 되는 휴교였다.

학교 주변 만남의 장소는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다. 의식 있는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과장하자면, 스파이 비밀 접촉하듯 했다. 술집에서 마음대로 취하기도 몹시 무서웠다. 자연히 하숙방에서 내리 뒹굴면서 내 생애에서 책을 집중적으로 가장 많이 읽은 때였다.

이때 가장 감명 받은 두 책은 『드레퓌스 사건』과 『마찌니 평전』(볼튼 킹 지음, 황의방 송재원 옮김, 한길사, 1980)이었다.

그 뒤 이런 생각을 했다. 마찌니를 닮은 우리 혁명가는 불운의 독립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1905〜1938))을 꼽을 수 있다. 김산은 미국 여성 작가인 님 웨일즈(Nym Wales; 1907〜1997)의 『아리랑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 또한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의 승리만 가지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승리만을. 그러나 이 작은 하나의 승리는 나의 삶을 계속 지탱해 갈 수 있는 신념을 나에게 주기 족하다.

민족의 운명이 가장 비참했던 일제 압제 때, 미련한 이상주의를 실천한 혁명가 마찌니를 우리에게 소개한 만해 한용운의 안목은 참으로 위대했다. 우리는 아직도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에서 살고 있다. 마찌니의 민족통일에 관한 신념을 우리는 반드시 귀감(龜鑑)으로 삼아야만 한다.

다음은 마찌니의 어록이다.

* 승리는 ‘원칙에 대한 존경, 정의와 진실에 대한 존경, 희생 그것도 끊임없는 희생에 의해서’ 온다.

* 지금까지처럼 어느 한 계층이 개혁의 열매를 물려받고 독차지하며 어느 한 귀족정치가 다른 귀족정치로 바뀌는 것에 그치는 한, 우리는 결코 혁명을 찾지 못한다.

* 누더기를 걸치고 허기져서 부자들이 멸시하며 던져주는 빵부스러기에 고통스럽게 달려들거나 야수같이 날뛰는 즐거움에 취해 소요 속에 휩쓸려 헤매는 민중이 내 눈 앞에 지나는 것을 나는 본다. 나는 저들 고통에 찌든 얼굴들이 신의 손길을, 우리와 똑같은 사명의 표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스스로 미래의 터전을 떠올려 보곤 한다. 그것은 장엄하게 일어선 민중, 한 가지 신조로 모인 형제들, 평등과 사랑의 유대, 아름다움과 힘 속에 끊임없이 자라나는 이상적인 시민적 덕성의 환상이다.

미래의 민중은 사치에 물들지 않고 비참에 억눌리지 않으며 자신의 권리와 임무에 대한 인식만으로 고양될 것이다. 그 모습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나의 심장은 현실을 보는 고통으로,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영광으로 고동친다.

* 산골로 올라가시오. 농부와 식사를 함께 나누고 당신들이 이제까지는 무시하던 공장 일꾼을 찾아보시오. 그들에게 자신들이 정당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옛날의 전통과 영광을, 그리고 지나간 버린 그 옛날의 융성했던 상업을 얘기해 보시오. 아무도 캐어내 말해주지 않아서 그들이 모르고 있는, 수 없이 많은 억압의 형태를 그들에게 말해보시오.

* 사상은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랄 때 빨리 익는다.

* 나는 내가 살아서 보건 말건 나의 이 생애에는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환상과 사랑이 적어도 인간의 5분의 4는 차지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시는 소수인의 재능이나 특권이 아니다. 대중의 살아서 말로 피어나오는 시들로 마음이 가득하다.

* 여성을 사랑하고 존경하시오. 여성을 위안의 대상이 아니라 당신의 지적, 도덕적 힘을 북돋아주고 활력과 영감을 채워주는 사랑으로 바라보시오. 여성보다 낫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당신의 마음속으로부터 그 생각을 지워버리시오. 당신은 여성보다 나을 것이 없소. 남녀 사이에는 불평등할 것이 없는 것이요. 다만 남자 사이에도 그러하듯이, 남녀 사이에는 서로 다른 성향과 특별한 소명이 있을 따름이요. 여성과 남성은 두 개의 음정으로서 그것이 없으면 인간이란 현악기가 연주될 수 없는 것이요.

* 민족은 나에게 신성하다. 왜냐하면 나는 그 속에서 모든 인간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도구를 보기 때문이다. 나라는 인류의 워크샾이다. 민족이란 살아 있는 과업이다. 민족의 생명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고, 보편 섭리적 계획 내에서의 힘이며 기능이다.

* 모든 위대한 민족운동은 오로지 시대나 난관에 구애되지 않는 신념과 의지의 영향력 아래, 무명의 민중들 가운데서 시작된다.

* 사상이 진리 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사상가의 생활은 그의 행동 속에서 진리를 눈에 띄게 표현해야 한다.

* 폭정을 정의로, 거짓을 진실로, 이기적 이익을 의무로, 왕국을 공화국으로 대치했을 때, 비로소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 이전에는 평화가 불가능하다.

* 청춘은 운동으로 살고 열정과 신념으로 큰다. 젊은이들을 드높은 사명으로 떠받들어 보라. 그들을 선의의 경쟁과 칭찬으로 불붙여 보라. 젊은이들의 대열 속으로 불의 언어, 영감의 언어를 터트려 보라. 그들에게 조국, 영광, 힘, 위대한 과거를 말해 보라.

* 모든 위대한 민족운동은 오로지 시대나 난관에 구애되지 않는 신념과 의지의 영향력 아래, 무명의 민중이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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