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운’ 노동시간과 노동조건
상태바
‘너그러운’ 노동시간과 노동조건
  • 송필경
  • 승인 2023.02.06 16: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태일 깊이 알기①: 로버트 오언과 전태일

1.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

1차 산업혁명(1750-1830년)이 끝난 19세기 중반, 유럽 노동운동 역사에서 주요한 선구자 일부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생시몽, 푸리에 같은 사상가들은 이상사회 청사진을 만들고자 했다.

성숙한 노동계급이 닻을 내리기 전이어서 이들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계급투쟁의 현실과 미래 노동운동에 대해 공상적이었다.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 역시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로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의 경쟁에 맞서 새로운 사회협력을 제시했다.

너그러운 노동시간과 노동조건, 사회보장, 합리적인 오락, 교육수준 높임, 쾌적한 주거환경 등의 건전한 사회적 배치 속에서 협동을 보여주기 위해 뉴레크너(New Lanark) 방적공장을 구상했다.

이 소규모 실험공동체는 노동운동과 관계가 없었지만 인간적인 의미는 매우 컸다. 유토피아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보다는 종교와 철학의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참된 지식을 살폈고 (종교적) 원죄나 그에 근거한 법률과 강제를 배제했다.

오언은 지배 엘리트들에게 인간은 완전하다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 실패한 뒤, 미국에서 모범공동체를 세웠지만 이 또한 실패했다. 오언을 비롯한 당시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은 서유럽에서 노동운동을 위한 중요한 저수지를 마련한 공로가 있다.

연합과 상호부조와 협동의 이상,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합리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비판, 인간사회의 일을 다른 방식으로 더 훌륭하게 배열할 수 있다는 실제적인 확신을 담은 저수지였다.

이 저수지는 민주주의의 오랜 역사를 관통하는 압도적인 유산으로 아직 남아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진보를 추구한 정치인들은 경쟁과 이기적 개인주의보다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2. 전태일(1948〜1970)

사회적 약자에게 따뜻한 연민을 나타내는 게 유토피아가 아닐까?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 무렵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이 나타났다면, 남한 자본주의가 막 시동을 걸 무렵 전태일이 나타났다.

다음은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에서 발췌 인용한 것이다.

1970년, 전태일이 “올해와 같은 내년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결단코 투쟁하련다”고 맹세한 바로 그 해가 돌아왔고 이 해는 전태일 생애의 마지막 해였다.

그 해 3월 달 일기장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여 종업원들에게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는 모범적인 피복업체를 만들기 위한 구상과 방대한 계획서를 써 놓았다. 1968년 말 이 계획을 착상했으며 1969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계획 방법을 찾았다.

이 사업계획서는 대학노트 30쪽에 걸쳐서 사업방침(10개항), 필요한 각종 설비비품의 숫자와 가격, 필요한 인원과 직공의 숫자 및 인건비, 예상되는 한 달 수입과 지출의 내역과 총계, 생산할 제품의 종류와 판매방법, 소비시장 45개를 일일이 조사·기록한 ‘서울특별시 시장조사도’, 직공들의 교육‧오락시설과 그밖의 처우문제 등 세밀한 구상을 담고 있으며 …(중략)… 소비자에게는 질 좋은 제품을 공급할 것과 또 직공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배려하기 위해 세심한 관심을 보였다.

이 모범업체 구상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실로 어처구니없는’ 공상이라는 걸 전태일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3.

오언은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인간이란 상황에 따라 변화가능한 존재라 믿고 노동자들에게 최선의 환경을 제공해주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공장 내에 유치원을 설립해 어린이들에게 최선의 교육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공장이 위치한 지역에서는 술을 팔지 않으면서 다른 물건을 값싸게 파는 소위 협동조합운동을 했다. 이 활동은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급격히 변모해가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그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기대했다. 오언은 노동조합운동에 참여해 전국적인 수준의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시대적인 한계로 노동조합운동은 끝내 좌절했다.

우리가 『전태일 평전』을 통해 잘 알듯이 전태일은 자신이 남겨 놓은 수필‧일기‧소설‧시‧탄원서‧편지 등에서 온 몸을 바쳐 이른바 ‘노동해방’의 꿈을 꾸고 노래를 했다. 하지만 무지렁이란 사회적 한계 때문에 꿈을 꾸었지만 짧은 생에서 꿈을 시도해보지 못했다.

전태일의 모범업체를 구상한 미완성 소설 원고(왼쪽)와 하승수가 번역한 로버트 오언의 저서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
전태일의 모범업체를 구상한 미완성 소설 원고(왼쪽)와 하승수가 번역한 로버트 오언의 저서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

4.

로버트 오언은 유토피아를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토피아를 꿈꾼 사람은 무척 많았지만 현실 속에서 그런 사회를 추진하고 제한적인 범위라 하더라도 실천에 옮긴이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공상가 오언을 기억해야 할 가치는 충분하다.

전태일의 구상은 유럽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구상에 못지 않았다. 전태일은 초등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 오랜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유럽의 우뚝한 사회주의 지성인과 어깨를 겨눌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전태일의 통찰력을 짐작할 수 있는 자랑이다. 또한 연민을 위한 삶과 철학적인 죽음은 인류 전 역사에서도 찾기 힘들 만큼 숭고했다.

로버트 오언과 전태일의 뜻대로 철학과 설득으로 인간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검증을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이상의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정의롭고 따뜻한 세계를 향한 단순하지만 열정의 바람에 나는 어떤 역할을 하고 싶다. 68세인 내가 남은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갓 두 돌 지난 손녀를 위해서 말이다. 앞으로 같은 열정을 지닌 이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

**
다음은 로버트 오언이 자신의 사회철학이 담긴 계획도시를 꿈꾸면서 1817년 자신의 이상 도시를 제안한 내용이다.(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발췌)

1) 이상도시의 주민 숫자는 800~1,000명 사이가 가장 바람직하다.
2) 1인당 1에이커 정도의 경작지가 필요하며 따라서 800~1,500에이커 사이의 경작지를 손으로 경작하도록 한다.
3) 작은 중앙정원, 막다른 골목, 가로등 대신 원형의 대광장을 만들고 그 주위에 주거용 건물을 건축한다. 대광장에는 주민 모두가 함께 식사하는 식당과 교회, 학교 등이 세워진다.
4) 이러한 도시의 건설비용은 9만 6천파운드에 불과해 경제적으로도 매우 유리하다.
5) 주민들이 경작하고 남은 생산물은 노동가격으로 환산돼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다.
6) 주민들은 납세의 의무와 병역의 의무를 지는 대신 법원과 형무소는 없다.
7) 아이들이 세 살이 될 때까지는 가정에서 양육하나 그 후에는 공동체에서 양육한다.

오언은 상상을 실천에 옮겼다. 처음에 그는 소규모의 공동체사회를 조직했고, 그 성공에 힘입어 전국 각지에 이와 유사한 공동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공 뒤에는 늘 갈등이 따르는 법. 종교형태의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과 오언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자 보수적인 색채를 띤 상류층 인사들은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1825년 미국에서 1,200여 헥타르의 대지를 구입한 오언은 꿈을 펼치기 위해 900여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정부 형태나 종교적 견해 등에 대해 여러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자 오언은 더 이상 사회의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없었다.

1828년, 미국에서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산업혁명으로 인해 급격히 변모해가던 영국의 노동자들이 그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자 오언은 이에 부응했다.

오언은 노동조합운동에 참여해 전국적인 수준의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정부와 사업주, 그리고 이들의 지원을 받은 법원은 그들의 활동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노동조합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오언은 쓸쓸히 숨을 거두었지만 꿈꾸었던 공동체 운동과 소비자조합 운동은 현대에 오히려 각광을 받아 오언의 철학을 되살리고 있다.

다음은 오언의 저서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에 대한 출판사 ‘지식을 만드는 지식’의 서평이다.

세계 최초의 협동조합과 유치원을 설립한 로버트 오언의 사회발전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엿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온 양극화가 심각한 오늘날 사회에서 고통받고 있는 우리에게, 현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줄 것이다.

로버트 오언이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을 집필할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이 비참한 삶을 살아가던 사회였다. 찰스 디킨스 또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1838)에서 이러한 현실을 다룬 바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오언은 무엇이 절망적인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으며, 이 책은 그러한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오언은 외부의 강제보다 사회구성원들의 자발적 행동에 사회변화의 가능성을 두었다. 무지와 오류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서로 협력하고 개인과 사회 모두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사회 원리들을 만들면서 사회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의 성격은 본성이나 유전자가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환경에 따라 달리 형성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환경과 교육을 특히 강조했으며, 합리적으로 교육을 받고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얻고 가족을 꾸리고 간간이 오락을 즐길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영국의 뉴래너크와 미국의 뉴하모니의 공동체에서 직접 실험하고 증명했다. 일례로 그는 영국의 뉴래너크에 세계 최초의 유치원을 세웠다. 그가 생각하는 사회발전의 또 하나의 동력은 바로 협동조합으로, 협동조합은 개인과 사회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좋은 제도였다.

나아가 그는 여러 산업을 공동으로 통제하고 협동해서 운영하면 더욱 좋은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아쉽게도 오언의 실험은 성공하지 못했고, 오언은 공동체를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운동가로 여생을 보냈다.

실패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세계의 협동조합 운동사를 쓴 존스턴 버챌은 정부와 기업가들의 억압 때문에 노동조합이 폐쇄돼 협동조합이 활성화되지 못했고, 조합원들이 빈곤에 빠질 정도로 경기가 악화됐으며, 이윤배분과 관련된 원칙이 정해지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의 공동체 계획은 실패했을지라도 그의 주장은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 당시의 정부관료와 기업가들도 지지를 보냈으며, 여전히 많은 사람이 오언의 이상을 따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하고 있다. 또한 오언이 강조했던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과 협동조합 운동의 중요성은 우리 사회에도 의미 있는 주제들이다.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은 총 4개의 에세이로 구성돼 있으며, 제1·2에세이는 새로운 사회의 원리를 밝히는 장이고, 제3·4에세이는 그것을 실제 사회에 적용하는 장이다. 원리도 중요하지만 오언 스스로 밝혔듯이 이 책은 자신의 구상이 공상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따라서 저자의 의도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제1·2에세이는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한에서 발췌했으며, 제3·4에세이는 완역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