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숨쉬는 고통으로부터 배운 것들
상태바
살아 숨쉬는 고통으로부터 배운 것들
  • 박윤서
  • 승인 2023.08.23 16: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3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관기]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1학년 박윤서
나가사키에서 열린 2023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참가한 한국 보건의료인 일동(제공=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나가사키에서 열린 2023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참가한 한국 보건의료인 일동(제공=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나가사키 원수폭금지대회를 알기 전, 우연한 기회로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 문제에 관한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원자력발전의 부작용과 핵무기의 위협이 생각보다 나의 일상과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원전과 건강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원수폭금지대회 참가 기회가 생겼을 때는 원자력발전과 핵무기에 대한 의료인의 시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그리고 후쿠시마를 겪은 일본은 이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여러 궁금증을 안고 공부를 했던 것 같다.

나가사키에서의 3일은 세계 2차 대전부터 핵무기 개발과 사용의 역사, 피폭 후 도시의 재건, 핵확산금지조약의 허점, 핵무기금지조약에 대한 일본 정부의 침묵, 그리고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에 대한 일본 의료인들의 관점을 알게 되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공부만으론 알 수 없는 사람들의 경험이었다.

방공호 (제공=박윤서)
방공호 (제공=박윤서)
폭심지 근처 시냇물 (제공=박윤서)
폭심지 근처 시냇물 (제공=박윤서)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과 평화공원에서 경험해보지 않은 전쟁의 자취를 보며 거시적인 역사와 정치에 가려진 개인들의 피해와 일상의 파괴를 느낄 수 있었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우라카미 상공 500미터에서 폭발한 플루토늄 폭탄 ‘뚱보(Fat Man)’가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으며 순식간에 도시를 파괴했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 하지만 사상자만 약 15만여 명, 그 중 약 7만 4천여 명이 사망했고 그 중 1만여 명이 조선인이었다는 점, 대부분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대규모 인재로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원폭의 파괴력을 측정할 계측기까지 떨어뜨리는 계획된 실험이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나에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단지 안타까운 역사 속의 일이었다. 밥까지 탄화 되어버린 소녀의 도시락, 열선에 의해 화상입은 얼굴, 폭풍으로 날아간 우라카미 성당의 종, 한 쪽 벽만 남은 건물, 그리고 끓어버린 기왓장을 보며 그 일들이 실재했던 삶의 체험으로 다가왔다. 폭심지 가까이로 걸어가며 보았던 당시 무너진 민가의 물건들, 화상에 의한 급격한 탈수로 물에 뛰어든 사람들의 시체가 쌓여 있던 시냇물, 폭격에 대비해 만들었던 방공호는 78년 전과 현재 사이에서 심한 괴리를 느끼게 했다.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로서 얻은 간접적인 경험은 왜 평화를 위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폭자로서 한국 참가단에게 증언해주신 오오츠카 씨는 피폭 당시 10살의 소년이었다. 당시엔 원폭증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아서 머리가 빠지는 등 이유 모를 증상에 마땅한 치료법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피폭된 가족들은 질병으로 죽고 자신만이 지금껏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시는 것을 보며, 당시의 어린 아이가 지금의 증언을 하는 어른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힘들었던 경험을 다음 세대의 평화를 위해 공유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오오츠카 씨를 비롯한 피폭자와 피폭 2세를 대상으로 한 “피폭의 유전과 전염”과 같은 차별과 혐오의 언어가 또 하나의 사회적 폭력이 됐다는 사실에 핵무기는 직접적인 피해자와 함께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폭력이라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피폭생존자 오오츠카 씨가 당시 경험을 증언하고 있다. (제공=박윤서)
피폭생존자 오오츠카 씨가 당시 경험을 증언하고 있다. (제공=박윤서)

이번 경험을 통해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라면 정확히 마주하고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사건의 내막, 정치적인 문제, 나라 간의 갈등 상황, 전쟁에서 사건의 시간적 순서, 피해 규모 등의 객관적인 자료에만 집중하고 고통스러운 개인들의 이야기엔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들이 문제 해결과 객관적인 시선을 위한 정보인 사실과 함께, 피해자들의 주관적 체험과 생명이 평화의 이유이고 사회적 협의가 필요한 이유이며 “no more 히로시마, 나가사키, 후쿠시마, 피폭자”를 외치는 이유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원수폭금지대회 폐회식에서 일본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연설은 이러한 개인들의 체험이 다음 세대로 잘 전달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은 전쟁과 핵무기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앞선 일들을 기억하는 이유, 기억하는 방법, 앞으로 평화를 위해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2023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 발표 중인 학생들(제공=박윤서)
2023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 발표 중인 학생들(제공=박윤서)

한국도 광주의 5.18, 제주의 4.3,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국가, 정치세력이 가해자로서 사회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해왔지만, 내 지식은 교과서적인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시간이 흘러 사건만 기억하고 피해자를 잊어버리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이지 않으려면 직접 겪지 않은 내가, 직접 겪어본 자들의 삶을 기억해야겠다. 교과서를 넘어 현장을 보고, 겪은 자들의 증언을 듣고, 스스로 찾아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무고한 피해자들과, 남겨진 가족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익보다 중요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평화의 이유로 삼는 사람, 그런 이유를 가지고 작더라도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탄화된 도시락 (제공=박윤서)
탄화된 도시락 (제공=박윤서)
우라카미 천주당 벽 (제공=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우라카미 천주당 벽 (제공=박윤서)
나가사키에서 열린 2023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참가한 한국 보건의료인 일동 (제공=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나가사키에서 열린 2023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참가한 한국 보건의료인 일동 (제공=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