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여명의 햇살”… ‘우당’ 이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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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여명의 햇살”… ‘우당’ 이회영
  • 송필경
  • 승인 2023.08.28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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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어떤 부인이 평소 간악하기 짝이 없는 이웃 졸부에게 놀림을 당하다가 기어코 백주대로에 해를 입었다. 집안에서는 분란이 일어났다. 얍삽하기 짝이 없는 자식은 어머니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고 졸부에게 빌붙어 그 대가로 거액을 챙겨 사치를 누렸다. 우직한 자식은 어머니의 순결과 명예를 되찾기 위해 간악한 졸부와 온 몸으로 싸우다가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21세기 이 집안의 후손은 두 갈래다. 이완용의 자손이거나 이회영의 자손이다.

우당 이회영(1867-1932)은 조선 말 명문거족 출신이며 최고의 부호였다.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으로 아버지는 이조판서,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냈다.

1910년 나라를 뺏긴 ‘경술국치’라는 치욕을 당하자 우당과 6형제 가족 50여 명은 전 재산을 정리하고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로 독립투쟁을 하러 갔다.

당시 우당과 형제들은 서울 명동과 개성, 양주, 평택 등지에 270만여 평이라는 넓은 땅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서울 강남의 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 앞의 땅을 10조 원에 사들인 현대자동차 재벌 못지않은 당대의 땅거부였다.

형제 모두가 이처럼 어마어마한 재산을 처분해서 독립운동자금으로 쓴 경우는 세계 역사에서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압록강을 넘는 배 삯이 1원 정도였을 때 우당은 100원을 사공에게 주며 당부했다. “앞으로 이 강을 건너올 사람이 많이 있을 터인데 만일 배삯이 없어 건너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를 때 나를 봐서 그들을 그저 건너게 해주라.”

우당은 압록강을 건너는 나룻배에서 나라의 비참한 상황을 비통한 심정으로 시를 읊었다.

鴨綠江水有時盡(압록강수유시진)
此恨蓮綿無絶期(차한연면무절기)

압록강의 물이 없어질 때까지,
이 가슴에 품은 한은 흘러흘러 끊이지 않으리라.

우당 전시회 ‘난잎으로 칼을 얻다’ 팝업배너(왼쪽)와 우당 흉상.(사진제공= 송필경)
우당 전시회 ‘난잎으로 칼을 얻다’ 팝업배너(왼쪽)와 우당 흉상.(사진제공= 송필경)

우당은 조선의 고리타분한 성리학에 몰입하지 않았다. 과거시험보다는 절에서 신학문을 공부했다. 노비에게도 존대말을 썼고 노비해방에도 앞장선, 봉건적 인습과 사상을 타파한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노비를 풀어주고 과부가 된 여동생을 개가시킨 혁명적 근대인이었다. 숯장수 출신 목사와 벗하면서 평민들의 교회 지하실에서 새 하늘을 도모했다. 조국과 겨레를 한없이 사랑하되 주인 없는 공평한 세상, 더 많은 자유를 만인이 누리는 현실을 꿈꾼 아나키스트였다.

우당은 언제나 자기 내부에서 발견한 모순들을 타파하면서 새로운 경계로 이동해갔다. 모든 행동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이름과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스스로 잊었다. 가장 앞이면서도 가장 뒤였다. 말을 앞세우기보다 자기 살을 도려내서 실행을 우선했다.

만주 서간도에서 경학사(밭을 갈며 공부한다는 뜻)와 신흥강습소(이른바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문무를 겸비한 교육으로 독립의 꿈을 지니게 했다. 여기서 『아리랑』의 김산 같은 독립지사들을 3.500여 명 배출했다.

대신 자신은 일주일에 세끼밖에 못 먹는 배고픈 가난과 질병을 견뎌야 했고 겨울이면 얼어붙은 만주에서 발가락이 삐져나오는 신발을 신는 가난을 견뎌내야 했다. 우당은 가장 부자였고 가장 가난했다.

우당은 사군자(四君子 매화‧난초‧국화‧대나무) 중 묵란(墨蘭)을 특히 잘 쳤다. 난초 그림을 팔아 독립자금으로 쓰기 위해 서간도에서 베이징(北京)과 텐진(天津)을 오갔다. 그러던 중 다롄(大連) 항에서 1932년 일경에 체포돼 65세의 나이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문으로 구치소에서 중후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을 마쳤다.

지난 2014년 12월 6일 덕수궁 옆 중명전에서 ‘난잎으로 칼을 얻다’란 제목의 우당 선생 전시회를 통해 우당의 체취에 흠뻑 취했던 적이 있다.

우당 선생은 서양식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훨씬 뛰어넘어 도덕적 의무를 회피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의 생각과 행동양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기신 분이다.

우리는 짐승보다 못한 이완용 부류에게 욕설을 퍼붓는 수고를 하기보다는 민족의 여명기에 햇살같은 역할을 한 이회영 선생의 덕을 더 가슴에 깊이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 2000년 중국 정부에서도 항일열사 증서를 수여했을 정도로 우당 선생은 중국에서도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우당 선생을 비롯한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등 총 다섯 분의 독립지사 흉상을 제거하겠다고 물의를 빚고 있다.

이는 곧 항일의 역사를 지우고 말겠다는 뜻이 아닌가? 쿼바디스 도미네? 해도 해도 너무한 일이다. 도대체 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단 말인가? 조국은 반항아들을 언제나 낯설게 대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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