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이름 부르기와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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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이름 부르기와 ‘반성’
  • 송필경
  • 승인 2023.12.11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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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인물의 이름을 부르며 돌이켜 생각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반성이다. 반성은 스스로의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를 돌이켜본다는 뜻이다. 자신의 사고내용이나 사고과정, 문제해결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생각이다.

김상봉 교수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 나오는 글이다.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해준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회상하고 그것에 감사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과 온전히 만날 수 있다. 이 만남이 진리다. 진리는 인식과 사물의 일치가 아니라 나와 너의 만남, 자기와 타자의 인격적 일치에 존립하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고 그것에 감사하는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우리가 실현해야 할 만남의 진리를 위해서다. 내 존재를 지탱하는 것은 타인의 눈물이다.

정신적 깊이는 고통의 깊이와 일치한다. 다시 말해 고통이 넓고 깊을수록 세상을 넓고 깊게 바라볼 수 있다.

우리는 오늘도 조선말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를 부른다. 참형(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을 당한 수운의 정신을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재해석한 정신을 160년이나 지난 우리 시대에 맞게 재창조하려고 한다.

수운이 받은 고통만큼 수운의 정신이 넓고 깊었기 때문에 수운은 오늘뿐만 아니라 내일에도 여전히 스승일 것이다.

지난 2020년 전태일 50주년에 시민모금운동으로 마련한 대구 남산동에 있는 전태일의 옛 집터. 주인 집 본채는 지붕기와가 헤져 천막으로 감싸 놓았다. 전태일이 살던 2평짜리 셋방은 초석만 남아 있다. 이 집을 중간 사진처럼 복원하려고 ‘전태일의 친구들’은 시민모금운동을 시작했다.(사진제공= 송필경)
지난 2020년 전태일 50주년에 시민모금운동으로 마련한 대구 남산동에 있는 전태일의 옛 집터. 주인 집 본채는 지붕기와가 헤져 천막으로 감싸 놓았다. 전태일이 살던 2평짜리 셋방은 초석만 남아 있다. 이 집을 중간 사진처럼 복원하려고 ‘전태일의 친구들’은 시민모금운동을 시작했다.(사진제공= 송필경)

다음은 김상봉 교수의 ‘영성 없는 진보-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이란 주제의 글을 시민언론 『민들레』가 지난 10월 29일에 실은 글이다.

현대 한국의 민중항쟁사에서 전태일의 분신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건이지만 이 사건처럼 그 의미가 은폐된 사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한 사람의 독실한, 어쩌면 과도하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그를 분신으로 이끌었던 것이 계급의식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사랑이었다는 사실이 그 이후 전적으로 은폐됐기 때문이다.

예수는 당대의 유대 민중에게서 민족을 해방할 메시아로 추앙됐으나 예수가 그 역할을 거부했을 때 버림받고 살해됐다. 예수가 그랬듯이 전태일이 죽음을 통해 계시했던 것도 사랑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이 오해 받았듯이 전태일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이다. 짧은 기간 전태일의 공적인 삶의 모든 장면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뜨거운 응답의 연속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부신 장면이면서 가장 은폐된 장면은 아마도 그가 착취 없는 사업장을 스스로 만들려 한 시도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앞서 우리가 거론했던 기업 민주화의 선구적 기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무엇이라 이름 부르든 그가 꿈꾸었던 것이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으로서의 공장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형성의 시도는 그의 생전에도 좌절됐지만 그의 사후에도 계승되지 못했다. 세상은 그를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더 나은 세계를 형성하려는 신적인 사랑의 현현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운동가로만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가 선구적으로 보여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은 자기의 권리에 대한 투쟁으로 박제화 되어버렸던 것이다.

전태일은 특별한 천재성으로 막 시동을 건 남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포착했다.

우리가 지금 전태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선사한 고통을 성찰하는 데 있다. 심해지는 양극화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에게 사랑과 자비와 어짊을 실천하고자 하는 다짐이다.

전태일을 ‘투쟁‧단결’을 상징하는 노동운동가 또는 노동투사로 한정한다면, 전태일이 지닌 정신의 크기와 넓이를 과소평가하는 편협한 생각에 빠지고 만다. 전태일의 어린 여성노동자를 위한 숭고한 연민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이라는 수운의 웅혼한 평등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전태일이란 이름은 과거 인물인 명사(名詞)가 아니라 내일의 인물이 되어야 할 동사(動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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