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 디지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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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디지로그
  • 서대선
  • 승인 2007.04.26 00: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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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재발견(2)

 

퇴근 후, 난 컴퓨터 앞에 앉아 간혹 3D 버춰 테니스 게임을 한다. 한 게임 끝나는데 대략 30분 정도. 하고나면 맨 날 후회하는 것이 차라리 책을 읽을걸.

저녁 10시쯤 되면 그다지 재미있는 TV프로도 별로 없다. 이럴 때면 야식이 생각날 때다. 참아보려 하지만, 한참 성장해야 할 시기인지라, 군것질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 디지로그 - 이어령/생각의 나무
나는 뭔가를 집에 잔뜩 쌓아놓고 생활하는 것을 싫어한다. 책만 빼고. 필요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인근 By The Way에 가서 필요한 것만 산다. '최소주의'를 지양하는 성품 탓에 집에 복잡한 살림살이가 별로 없다. 특별히 아끼는 전자기타와 작은 앰프, CD카세트 더블테크 정도..

거울 앞엔 드라이기와 머리카락 마는 거, 무스와 젤리, 로션과 스킨은 1년 전에 떨어진 빈껍데기 병만 댕그라니 남아있다. 아침을 깨우는 자명종 시계 2개와 핸드폰 충전기. 뭐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보니 빗이 없다. 맨 날 손가락빗이나 머리 마는 빗으로 머리를 빗자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빗을 사야겠다. 한쪽 방에는 컴퓨터와 프린터, 스캐너, 복사기가 동시에 되는 복합기가 자리 잡고 있다. 별로 쓸 일은 없지만, 어딘가 만화를 송고 할 일 있으면 스캔기능을 가끔 쓴다.

참고로 난 만화가가 아니다.

건치신문에 아마추어식 스토리 만화를 그려 컴퓨터로 보내주곤 한다. 공짜로. A4용지에 6칸이나 9칸짜리 만화 칸을 그리고 몇 날을 끙끙대며 구상한 스토리 만화의 밑그림을 샤프펜슬을 이용해서 스케치 한다.

대사를 적어 넣고 카메라 앵글을 구상해서 칸마다 적절한 장면들을 그려 넣는다. 항상 뭔가가 아쉽지만 대충 스토리만화 밑그림이 완성되면 그 위에 일제 0.3mm 하이테크 포인트로 아우트라인을 그린다.

이때 선과 선이 만나는 지점을 확실히 클로져 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뽀샵으로 페인트 칠 할 때 그 사이로 페인트가 다 새 버린다. 대충 아우트라인을 그렸으면 제도용 지우개로 스케치한 연필 밑그림을 깨끗이 지운다. 그 다음 바로 이 복합기를 이용해서 스캔을 뜬 다음, 뽀샵에서 그림을 불러 드린다.

이후 작업은 색깔을 집어넣고, 다듬고, 명암처리하고, 뭐 남들과 비슷한 작업을 한다. 그리고 이메일로 송고하면 끝. 그때의 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대게 집중해서 한 페이지 그려서 송고하는데 까지 5~6시간 걸린다. 그 시간을 엄청 집중해야하기 때문에 원고를 송고하고 나면 기진맥진이다.

이 때쯤이면 배도 출출하고, 야식 생각이 간절하다. 주로 새벽 3~4시. 집에 먹을 것은 없다. 바람도 쐴 겸, 24시간 영업하는 By The Way에 컵라면이라도 사러 나간다. 그 시간에 By The Way 알바생은 졸고 있다.

신라면 1개, 계란은 집에 있고, 포장 김치 하나, 가끔 비싼 캔맥주와 500원 짜리 숏다리도 산다. 저녁 10시쯤 야식을 하지 않았다면, 매일 있는 작업은 아니지만, 만화를 송고했으니 새벽녘에 컵라면이 얼큰하게 먹고 싶어진다.

너무 창작에 몰두하다 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눈은 피곤하다. 배도 고프고. 자주는 아니지만, 만화 송고하는 날 새벽 2~3시 경이면 전기를 이용한 5만 원짜리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요즘 가전제품들 정말 잘 나온다. 2-3분이면 물이 끓었다고 삑삑거린다. 신라면에는 이미 계란과 스프가 풀어져 있다. 김치도 약간 들어가 있고. 물만 부으면 즐거운 야식을 먹을 수 있다.

이어령 교수의 [디지로그]는 얼마 전에 사두었는데 초반만 읽고 아직도 진도를 못나가고 있다. 그동안 김연아 선수 피겨 세계선수권대회도 있었고, 박태환 수영경기에다, 새벽이면 박지성 축구소식, 버지니아 총기살해사건 등 인터넷으로 검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맘 놓고 이 책 디지로그 좀 읽으려 하면 TV EBS 다큐멘타리는 어쩜 그리도 재미난 것들을 많이 하는지. 이를테면 인공지능, 사이보그, 환경재앙, 우주전쟁, 유나버머, 뇌의 신비, 컴퓨터의 미래, 디지털 혁명 등 도저히 놓칠 수 없는 우수한 다큐프로들이 방송되는 것이다.

읽다가 초반 페이지를 접은 채 이어령 교수의 책 디지로그는 옆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도 한번은 읽어봐야 할 중요한 책이므로 내 주변 가까이에 이 책 디지로그는 항상 위치해 있다.

뚜껑을 점선까지 딴 신라면에 끓는 물을 표시선 보다 1cm정도 더 많이 붓는다. 계란을 풀었기 때문이다. 물을 붙고 종이뚜껑을 덮으면 양쪽이 들떠서 수증기가 샌다.

바로 이때 [디지로그]를 올려놓는다. 정말 안성맞춤이 따로 없다. 다른 책들은 대부분 표지에 특수 코팅처리가 되어있지 않아서 컵라면 뚜껑 위에 몇 분 올려놓고 뒤집어 보면 수증기 때문에 책 표지가 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어령 교수의 [디지로그]가 나오기 전에는 주로 류시화씨의 [외눈박인 물고기의 사랑]이나 안도현씨의 [연어] 등을 사용하기도 했었는데, 그 책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임시방편으로 찬송가를 쓰기도 했다.

[디지로그]의 특수함을 발견하면서부터 컵라면 뚜껑 덮개용으로는 예외 없이 이 책을 사용하게 되었다. 일단 자국은 남지만, 다른 책처럼 심하지 않고 특수코팅 처리된 책표지가 항상 새 것 같아서 컵라면 뚜껑 공기 밀폐용으로는 제격이다.

어떤 의미로 본다면 이어령 교수의 [디지로그]는 "젓가락 정보마인드"에 충실한 동양식 패스트푸드 컵라면을 먹는데 있어서 아날로그적으로 매우 유용할 뿐만 아니라 인터넷 정보를 검색하면서 야식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나물과 골뱅이의 문화유전자"에 익숙한 내게 "디지털시대의 아날로그 추임새"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디지로그]에 눌린 채 뜨거운 물에 불고 있는 컵라면의 문제는 항상 비만에 있다.

오늘밤은 컵라면 대신에 디지로그라는 "정보를 먹어야"겠다. 오늘 만큼은 디지로그를 완독하고 싶다. 멀티테스킹이 가능한 이어령 교수의 책 [디지로그](생각의나무), 거침없이 일용을 권한다.

난 아직도 안 읽어 봤지만…

서대선(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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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홧!! 2007-04-27 14:24:23
하하하 ^^ 우리만 읽기 아깝네요. 진짜로.
책의 일용. 어쩐지 건치내의 새로운 유행어로 떠오를 듯.

어니 2007-04-27 10:36:51
책의 재발견 참 재밌습니다.

이어령 교수를 이문열과 비슷하게 분류해놓고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아무이유없슴)

샘 글은 참 재치있고 기발하네요.

김원장이야기 자주 보고 싶습니다.

ㅋㅋ 2007-04-27 10:28:11
라면이 나오는 대목에서 대충 눈치챘습니다. 선생님의 만화에 이토록 많은 노력이 들어간 줄은 몰랐네요...새삼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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