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편린으로 구성되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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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편린으로 구성되는 미래
  • 강신익
  • 승인 2004.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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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생명과학은 미래의 과학이다.
우리는, 어떤 생명체가 가진 수많은 세포 중 단 하나, 그 중에서도 핵이라고 부르는 부분만 있으면 똑같은 생명체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생명체의 미래는 고스란히 염색체라는 물질 속에 DNA라는 분자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쥬라기공원이라는 황당한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를 현실화시킬 수 있다는 생명과학의 가정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고생물학은 과거의 학문이다. 현존하는 편린들로부터 과거를 추적하고 그걸 새롭게 구성해 낸다. 과거는 실제로 존재했던 실체적 진실이지만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주어진다. 고생물학은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지만 현대의 생명과학은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우리의 현실은 진실과 가능성의 양방향으로 열려있으며 가능성은 진실에 토대를 둘 때 진정한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과거에 대한 탐구는 미래를 위해서도 절실한 과제가 된다.
위 그림은 지금부터 약 3,500년 전에 살았던 어떤 이집트인의 유골이다. 이 하나의 편린으로 우리는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첫째, 많은 치아들이 소실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당시의 생활이 무척 격렬한 육체적 운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둘째, 모든 치아들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는 사실에서 당시의 음식이 매우 거칠었음을 알 수 있다. 모래가 많은 사막이라는 환경도 문제였지만, 입자가 곱지 않은 돌절구를 이용해 곡식을 가공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셋째, 3,5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치아우식증과 치주염은 아주 흔한 구강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골의 주인 역시 아주 심한 치주염과 우식증에 시달렸던 것 같다.

넷째, 이 유골의 주인은 우식증으로 인한 치조농양으로 고생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치조골에 구멍을 내는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1대구치의 치근 주위에 나 있는 두 개의 작은 구멍에는 인위적으로 만든 다음 자연적으로 치유된 흔적이 뚜렷하다.

이처럼 과거의 편린들은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며 그 이야기들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재와도 연결된다. 우리는 3,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치주병과 치아우식증으로 인한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라진 치아의 기능을 대신할 기술은 개발했지만 치아상실의 근본원인이라 할 양대 질병을 획기적으로 예방할 방법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이제 과거의 진실과 지금의 현실을 미래의 가능성으로 연결시킬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미래에 관한 희망은, 지난 3,500년간 우리가 이룩한 성과가 생각보다 보잘 것 없다는 뼈아픈 자성을 토대로 할 때 더 큰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

행여 이 유골의 DNA를 추출해 고대이집트인을 현대에 부활시키려는 허망한 꿈일랑은 꾸지 말기 바란다.       

강신익(인제의대교수·일산 백병원 치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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