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 시대와 인물] “당장 가서 인플레 잡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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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 시대와 인물] “당장 가서 인플레 잡아와!”
  • 편집국
  • 승인 2003.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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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에 물불 가리지 않았던 ·김·종·원·


일본군에 자원 입대한 친일파
역사에는 선인과 의인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악인도 등장한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하찮게 여겼던 김종원 같은 사람은 후자에 속하는 경우이다.
일본군에 자원 입대하여 필리핀과 뉴기니아에서 근무하면서 시작한 그의 잔악한 범죄는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이어졌다. 한국전쟁 때 ‘타이거 김’으로 외국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던 ‘김종원’이라는 이름은 공포와 잔인함의 대명사로 이미 전쟁 전부터 알려졌다.

마음 따라 여수 시민 무차별 학살
이승만 정권이 세워진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시기에 일어난 여순사건은 군인들이 처음 일으켰지만, 여기에 지방 민간인들이 합세하면서 전남 동부지역을 휩쓰는 봉기로 발전한 사건이었다. 여수는 일주일만에 진압군에게 완전히 점령당했는데, 마산에 주둔하고 있던 김종원은 5연대 소속으로 이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여수에 상륙한 김종원은 앞뒤 생각하지 않은 마구잡이 박격포 사격으로 같은 편인 진압군을 죽이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미 군사고문단원은 매우 화가 나, 김종원의 작전능력이 형편없다고 평가했다.

이런 과오를 씻어내려는 욕심 때문인지 김종원은 무차별적인 민간인 살육을 감행했다. 여수에 들어온 진압군은 전 시민을 학교운동장에 모이게 한 다음 이른 바 ‘부역자’ 색출을 실시했는데, 머리가 짧거나 손이 투박한 사람 또는 군인 팬티를 입은 사람은 반란군이거나 반란군에 협력했다고 무조건 처벌했다.

한 마을에서는 골목에 나와있던 청년 몇 사람을 그 자리에서 칼로 베는 일도 있었다. 혐의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는 한번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그의 마음이 어디로 움직이느냐에 여수 시민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해방 후엔 빨치산 토벌 앞장
봉기를 진압한 김종원이 소령으로 마산 16연대 부연대장으로 임관했을 때인 1949년, 그의 나이는 28세에 불과했다. 그는 항상 자신이 갖고 있는 직분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부연대장 시절에는 마산 시내 전 중학생을 마산중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키고는 기관총을 단 짚차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나 “반민특위에서 나를 잡으러 오면 3초 내에 권총으로 모두 쏴 죽이겠다”고 말하였다. 일본군에서 복무했던 김종원은 뒤가 구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김종원은 여순사건과 지리산 빨치산 투쟁 그리고 제주도, 거제도, 동해지구 등의 소요지역에서 좌익 세력 소탕에 큰 공을 세웠다.

사람 잡는 데 그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만, 전쟁이 터지고 전방에 배치되자 그의 용맹성은 온 데 간 데 없고, 숨어지내거나 도망치기에 바빴다고 미군 문서는 기록하고 있다. 여순사건 상륙작전 때도 그랬지만, 한국전쟁 때에도 김종원은 작전과 지휘에서 전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김종원은 미 군사고문단이 지켜보고 있는데서 부하를 쏴 죽일만큼 ‘용감’했다. 비겁성과 잔인함 때문에 그는 1950년 7월 연대장 직에서 해임되지만, 다시 복귀해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을 맡았다.

범죄 은폐 위해 빨치산 위장도
이 때 거창 학살사건이 터졌다. 거창 학살사건은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작전 중이던 11사단 9연대 3대대가 공비와 내통하였다는 혐의로 1951년 2월에 이 지역 수 백 명의 청장년을 중화기로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국회는 조사단을 파견,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려 했는데, 김종원 대령은 국회의원들에게 이 지역은 빨치산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어서 조사가 불가능하다고 말하였다.
국회의원들이 조사를 강행하자 김종원은 국군 1개 소대를 무장공비로 가장해 현장으로 가던 의원들을 습격해 진상조사를 방해하였다. 빨갱이를 소탕해온 그가 빨갱이로 위장해 국회의원들을 습격했던 것이다.

국회 재조사로 거창 학살사건과 김종원이 주도한 조사방해사건의 진상이 공개돼,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곧장 석방돼 경찰 간부로 특채되었다. 김종원은 그 뒤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을 거쳐 전북경찰국장, 경남경찰국장, 경북경찰국장을 거친 뒤 경찰의 최고직인 치안국장을 지내면서 승승장구했다.

당장 인플레 잡아와!
군대에서 쌓았던 막무가내의 그의 행동은 경찰국장직을 맡으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는 순시 도중 파출소장의 계급장을 떼어내 자기와 안면 있는 순경에게 달아주거나 경찰서장을 부하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폭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경남경찰국장 시절에는 참모회의 중에 인플레 때문에 시민들이 큰 고생을 한다는 말을 듣고는 “수사과장! 당장 가서 ‘인플레’ 잡아와!”라고 말했다고 한다. 잔혹하고 격렬한 성품 뒤에 숨어 있는 이런 무지함이야말로 이승만대통령이 김종원을 아껴 사용했던 이유였다.

김종원은 4월 혁명 뒤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의 배후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복역 중 당뇨병에 걸려 석방됐으나 얼마안가 사망했다.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악인의 쓸쓸한 최후를 확인하며 역사의 심판을 얘기하지만, 그의 손에 죽어간 수많은 원혼들에 대한 역사의 진상규명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김득중(역사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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