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공돌이, 공순이, 막농사꾼이 붉은 카펫을 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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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공돌이, 공순이, 막농사꾼이 붉은 카펫을 밟다
  • 송필경 논설위원
  • 승인 2004.05.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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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국회 본관 앞 층계를 오르면 중앙 자동문이 있는데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 대신 육중한 대리석 건물 반대편에 있는 뒷문으로 출입해야 하는데 그 곳까지 걷는 데는 5분 가량 걸린다. 중앙문에서 2층 계단 위까지 붉은 카펫이 쭉 덮혀 있고, 계단을 오르면 대리석 바닥으로 된 본회의장으로 연결된다. 본관 승강기 16대 가운데 5대에도 금배지를 단 사람만 탈 수 있게 붉은 카펫이 깔려 있다.

그런데 공돌이와 공순이 그리고 막농사꾼 출신 10명이 권위의 상징인 붉은 카펫을 밟고 국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붉은 띠를 머리에 둘러맸던 사람들이다.
금배지를 달면 우리 사회에서 대단한 특권을 누릴 수 있다. 면책특권을 가졌기에 함부로 말을 해도 상관없다.

명백한 범죄를 저질러도 동료들과 짜고 국회를 열면 잡혀가지 않는다. 설사 감옥에 잡혀있더라도 동료들이 마음만 먹으면 탈옥시킬 수 있는 힘을 우리 입법부는 가졌다. 조금만 야심 있거나 돈 꽤나 있다거나 어느 정도 관직에 있었거나 약간의 명예만 쌓았다 싶으면 기를 쓰고 문을 두드리는 곳이 국회다. 돈으로 매수해서라도 심지어 양심을 팔아서라도 손에 쥐고 싶은 것이 금배지다. 여의도는 이런 자들에겐 따뜻한 보금자리다.

이번 선거의 특징은 바람, 바람, 바람이었다. 3·12 ‘탄핵풍’은 초메가톤급으로 20년 이상 버텨온 한나라당을 통째로 날려버릴 듯이 발생했다. 이 바람에 열린우리당은 사상초유의 거대여당이 될 뻔하다가, ‘박풍’이라는 만만치 않은 역풍에 기세가 다소 꺾이더니, 자살골같은 ‘노풍’에 많이 누그러졌다. 이런 바람 선거는 다이내믹한 이슈보다 감성과 이미지에 의존한다. 선량의 인물됨이나 각 당의 정책을 선택하기보다, 이를테면 제품의 불량 여부는 그대로 둔 채 포장술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번 선거 역시 득도 있고 실도 있었다. 역대 선거 가운데 가장 엄격한 선거여서 ‘공정’이 ‘자유’를 잠식했다고 할 정도이다. 돈을 ‘묶고’ 입을 ‘푼 것’은 좋았으나 발까지 ‘묶은’ 것은 지나쳤다는 평이다.

박정희 향수에 자극이 돼 영남에서는 표가 집중하는 ‘세몰이’가 거셌다. 초선의원 비율이 63%나 돼 ‘물갈이’도 상당했는데 이것은 새 정치에 대한 기대감이라기보다 기존 정치에 대한 부패청산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여성정치인이 과거에 비해 많이 진출했는데 이는 남성중심의 강성정치를 완화하라는 시대적 요청이었다. 자민련이 몰락하여 김종필이 퇴장한 것은 3김이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한 시대의 분수령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선거가 일궈 낸 가장 큰 의미는 정치권 지각을 ‘판갈이’ 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다. 실패로만 이어진 이 땅의 진보 운동 풍토에서 남루해 보이는 노가다들이 입법권력의 주역으로 발돋움 한 것은 우리 정치사에서 총칼없이 이룬 첫 혁명이라 불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민노당에 대해 민중은 권위주의 세력을 심판하고 새 정치 패러다임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이 역사적 요구는 혁명적 변화의 의미를 가지지만, 현실적으로는 우파의 가치인 경제 성장을 뿌리칠 수만은 없을 것이며, 소수 정파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실정치를 바꿀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은 무력혁명보다 더 힘들 것이다. 그러기에 정책에 있어 갈등하기 보다 차이를 드러내어 우리 사회가 한 축만이 아니라 다양한 축과 다양한 요소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제도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척박한 현실에 뿌리내리는 것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민노당의 승리는 “원칙에 대한 존경, 정의와 진실에 대한 존경, 희생 그것도 끊임없는 희생에 의해서”였다. 그 원칙과 정의와 희생의 시발점은 34년 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산화한 전태일 열사였다. 4·19혁명 44돌을 맞아 각 당 지도부들은 4·19국립묘지를 참배하며 새 정치에 대한 각오를 다졌으나 민노당은 여기 참배에 앞서 모란공원에 있는 전태일 열사 묘소를 찾았다. “열사의 영전에 원내 진출을 보고”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법대생 친구하나 있었으면…”하는 바램을 되뇌이던 생전의 열사를 생각하면 입법부 의원이 된 열사의 후예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막중한 책임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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