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베트남 진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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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베트남 진료기
  • 편집국
  • 승인 2004.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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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과거로 끝나야 한다


활기찬 호치민 市

베트남 제2의 수도라 불리는 호치민市는 활기가 가득찬 거리였다. 오토바이와 자전거, 버스들은 서로 뒤엉켜 빵빵거리고, 손 신호도 해가면서 요리저리 잘 지나다니고,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학생들과 잠옷같이 헐렁한 옷을 입은 아줌마들, 얼굴이 시커멓게 탄 아이들도 바삐 거리를 지나다니고 있었다.

특히 거리에 오토바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모두들 거리로 몰려나와 하루 내내 오토바이만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오토바이가 많아진 이유는 중국제 싼 오토바이들이 많이 들어온 것과 함께 베트남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때문에 몇 년 전 만해도 오토바이는 집안의 보물이고, 모두들 자전거만 타고 다녔는데, 지금은 대부분 가족 수대로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한참 거리의 풍경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30년 전 여기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마음속엔 전쟁의 아픔

하지만 전쟁의 아픔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 마음 깊숙한 곳에 생생히 살아 있다는 것을 전쟁박물관에 가서 알 수 있었다.

정착촌이라는 미명 하에 싹쓸이를 한 모습, 무수하게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폭탄과 고엽제, 그리고 베트공을 죽이고 그 앞에서 웃으면서 사진 찍은 미군과 한국군, 포로에게 저질렀던 갖은 고문들….

“과거를 잊고 미래로 가자”고 했지만, 그 ‘잊고’라는 말이 ‘망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단지, 그 아픔을 지금 다시 들추어내서 베트남의 경제 발전을 저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 오히려 얼마나 철저하게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힘이 거대한 미국을 이기고 지금의 활기찬 베트남을 세운 원동력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베트남 국민들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그 곳에서 가해자로 서 있던, 우리의 삼촌일 수도 있고 아버지일 수도 있었던 한국군을 생각하면 다시 한번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미리 책을 읽고 갔지만, 참혹한 역사의 증거들 앞에서 “다시는 이런 전쟁은 없어야 한다. 더군다나 우리나라가 강대국의 들러리로, 남의 나라를 짓밟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이 베트남에서의 일주일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한 두 달 뒤에는 또 다시 우리의 군대가 미 제국주의의 들러리로, ‘경제재건’이라는 명분 하에 이라크로 떠나는데….

선한 베트남 사람들

진료 첫날부터 많은 환자 분들이 찾아왔다. 첫날 왔다가 그냥 가신 분들만 해도 200분이 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하루 20-30명의 환자를 보았는데, 베트남에 와서 100명 가까이 환자를 보게 되니 오후가 되면 침놓는 손이 떨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환자가 많은 것이 결코 힘들지는 않았다. 다만 환자들에게 다정하게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한번 마주보며 웃어주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진료를 받으러 오는 베트남 사람들을 보면 가끔씩 웃음이 배어 나오곤 한다. 한국의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들과 어찌 그리 똑 같은지…. “아픈 곳에다 침 놔달라”고 떼 쓰시고, 침맞고 누워 계시면서 옆 사람이랑 수다떨며 “하하! 호호!” 웃으시는 모습. 침맞고 가시면서 손 꼭 잡고 다정한 말씀 해주시는 모습…. 베트남이 아니라 우리나라 어느 시골에 의료봉사 온 느낌이다.

한국군 학살로 인해 여러 마을이 몰살되다시피 한 따이빈사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속에 한국군의 후손인 우리들에 대한 원한이 있을 만한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저 선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며 내 마음까지 선해지는 걸 느끼곤 한다.

더위와 피로, 그리고 멀미로 몇 몇 사람들이 쓰러지고 힘들어했지만, 한국에서와 달리 슈퍼맨과 같은 힘을 발휘하며 모두들 열심히 진료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베트남 사람들의 그 선한 눈빛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던 일주일은 언제인지 모르게 후딱 지나가 버리고…. 마지막 떠나는 날 저녁식사 시간. 이별의 술잔이 돌고, 몇몇 베트남 학생들이 울기 시작했다. 가녀린 몸으로 통역하느라, 진료 보조하느라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었을 통역 친구들.

우린 어른이니까 눈물은 참아야 했다. 다만 꼬옥 안아 줄 뿐이었다. 공항까지 따라온 학생들을 뒤로 한 채, 비행기는 떤센넛 공항을 떠나 인천으로 날기 시작했다. 비행기에 무거운 몸을 기댔다. ‘아무래도 내년에 또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착한 눈매의 사람들, 밝은 학생들, 제국주의로부터 자존심을 지킨 당당한 역사를 다시 한번 보기 위해….

베트남 진료의 의미

진료 수기를 쓰면서, ‘베트남 진료가 무슨 의미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왜 베트남인가?”

떠나기 전에도 그리고 갔다와서도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 마음속에는 여기에 대한 대답이 가득 들어있는 것 같은데, 말로 하려면 어찌나 입안에서 맴맴 돌고 제대로 말이 돼서 나오지 않는 것인지….

하지만 일주일 전에 술을 마시면서 들었던 한 선생님의 말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것같다.
“끝나지 않은 역사적 일을 매듭짓고 가지 못한다면, 베트남 전쟁과 같은 비극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지금의 이라크 파병도 같은 것이지 않느냐? 베트남 참전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베트남 진료는 과거에 대한 참회와 용서의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자리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본다.

김락희(참의료실현 청년 한의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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