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과 우동: 우리의 토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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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과 우동: 우리의 토론 문화
  • 송필경
  • 승인 2021.07.27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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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많은 사람이 단지 자신의 편견을 재배열하면서, 생각을 한다고 생각한다.”

한때 SNS 상에 유행했던 토론 우스개가 있었다.
‘짜장면과 우동’이란 토론이다.

A: "어제 중국집 가서 짜장면 시켜 먹었는데 정말 맛있더군요."(평범한 문제 제기)
B: "짜장면이 뭐가 맛있어요? 우동이 훨 맛있지."(평범한 반론)
C: "우동이요? 에이, 우동보다는 짜장면이죠. 돼지고기도 들어가고."(재반론, A의 의견에 합류)
D: "짜장면에 돼지고기라면 우동에는 해물이죠. 맛을 안다면 역시 우동!"(재재반론, B의 의견에 합류. ‘~을 안다면’이라는 말 나왔음)
A: "님아, 그럼 우동 안 먹는 사람은 맛을 모른단 말인가요?"(말꼬리 잡기 시작)
B: "그만큼 우동이 낫다는 거죠. 에이, 짜장은 느끼해서…"(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깎아내림)
C: "님께서 짜장면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군요. 제가 설명해 드리죠.(‘잘 모르시는군요’ 나왔음. 지식과 데이터, 증거 등등 늘어놓기 시작)

짜장면의 유래: 짜장면의 출생지는 인천이다. 1883년에 생겨났다. …소스가 남았지만 향토 짜장면은 채를 썰기 때문에 젓가락질이 쉬워 그릇이 깨끗하다. 

우리가 몰랐던 짜장면의 차이: 간짜장- 춘장에 물과 전분을 넣지 않고 그냥 기름에 볶기만 하면 간짜장이 된다. 옛날짜장보다 조금 더 기름지고 짜장과 면이 따로 나온다. 삼선짜장- 새우, 갑오징어…

아시겠죠? 짜장에 대해 잘 알지도 못 하시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D: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만 토를 달자면, OOO씨 아닌가요?"(옥의 티 찾기, 흠집내기)
A: "OOO 맞습니다. 그리고 그게 뭐가 중요한가요? 본질을 아셔야죠."(본질 얘기 나왔음, 깔보기 시작)
B: "님들 얘기 잘 들었습니다. 근데 말투가 좀 기분 나쁘군요."(말투 물고 늘어짐)
C: "기분 나쁘다뇨? 시비 건 건 그쪽 아닌가요? 맛도 제대로 모르면서."(책임 전가. 상대 무시)
D: "시비? 말이 너무 지나친 거 아냐? 사사건건 가르치려구 들자나!"(반말 나왔음)
C: "어쭈? 어따 대고 반말이야? 너 몇 살이야?"(나이 얘기 나옴)
A: "C님, 참으셈, 잘 돼봤자 고딩이에요."(동조. 중고딩 비하 발언^^)
D: "고딩? 당신은 몇 살인데? 내 참, 군에 갔다와서 직장 다니다 별꼴을 다 보네. 에이 18"(욕설 출현)
A: "18? 왜 욕을 하고 그래? 진짜 기분 JOT같이…"(더 심한 욕설 출현)
B: "그쪽에서 욕 나오게 하자나! 택도 아닌 짜장면 같고 사람을 우습게 봐?"(책임 전가. 한번 더 깎아내림)
C: "택도 아닌 짜장면? 18 당신 좋아하는 우동보다는 100배 1000배 나아!"(욕설, 말꼬리잡기, 비교 발언)
E: "님들, 싸우지 마셈, 둘 다 맛있는 음식이자나요"(말리는 사람 등장)
D: "님들도 아시겠지만 우동이 훨 낫잖아요? 근데 저 맛도 모르는 @#$%들은"(의견 동조 호소)
F: "난 짬뽕이 맛있던데…"(엉뚱한 논제 제기, 이런 사람 꼭 있음)
A: "F님아, 지금 짜장면 우동 얘기 중이니 짬뽕은 끼어들지 마시길…"(말 막음)
C: "맞아요, 껴들 때 껴 들어야지, 주제도 모르고…"(그 사람마저 비하, 무시)
F: "뭐라고? 아, 18 싸우지 마라고 좀 웃겨 볼라고 그랬더니, 짬뽕을 무시하는 거야?"(발끈)
E: "님들 싸우려면 밖에 나가서 싸우세요!"(나가란 말 나옴)

짜장면과 우동(사진제공= 송필경)
짜장면과 우동(사진제공= 송필경)

이 우스개를 처음 보고 말싸움의 속성을 아주 잘 꼬집었다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말싸움을 우스개로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여러 SNS상에서 토론을 하다보면 흔히 이런 말꼬리잡기나 말싸움을 자주 볼 수 있다. 어떨 때는 토론하다가 내 자신도 모르고 이런 말싸움에 휘말렸다가 후다닥 정신이 든 경우도 있다. 이 우스개는 엄연한 현실이다.

방송 토론에서도 아예 말꼬리잡기를 작정하고 출연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본다. 특히 정치 관련 토론에서 말이다.

토론은 찬성과 반대가 있는 확실한 주제에 근거 있는 논리로 자기 주장을 펼치는 말이나 글이다. 토론은 상대가 있다. 자기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게 아니다.

스포츠 경기 이상으로 엄정한 규칙과 매너를 따라야 하며 또 형식적인 제한도 따라야 한다. 자기 주장을 펼치되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하며, 반박을 할 때는 근거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아울러 한 쪽에서 반증을 제시하면 상대방은 반증에 상응하는 대답이 나와야 한다.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자기 주장만 있을 뿐인 꽉 막힌 사람들 말이다. 근거를 가지고 반론을 해도 자기 의견을 반복할 뿐이다. 그런 태도를 ‘선명성 또는 일관성’이라고 생각하는 고집불통이 있다.

남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다가 엉뚱한 말이나 처음 뱉은 말을 되풀이 한다. 그러나 한 사물이나 한 사건만 보더라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무수한 해석이 있게 마련이다.

피카소의 말이다. “진실이 하나만 존재한다면 동일한 화제(畫題 테마)로 그렇게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불교적 관점으로 보자면, 진실 하나에도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수많은 사실들이 있다. 아무리 어마어마한 통찰력을 지녔을지라도 어찌 보면 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지식은 갠지스 강 모래밭에 있는 한줌의 모래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상대방 시각과 의견, 그리고 해석을 존중해야 한다. 상대방을 존중하려면 상대방이 말할 때 귀를 기울이고 그 주장하는 핵심을 파악하려고 애를 써야 한다. 상대방과 다르게 본다면 근거를 가진 견해로 조리 있게 반박해야 한다.

상대방이 내 생각을 듣지 않고 내 생각의 핵심을 파악하려 하지 않으면, 또는 상대방 생각을 듣지 않고 그 핵심을 파악하려 하지 않으면 토론이 과열되고 고성이 오가기 쉽다.

상대방이 내 생각과 내 생각의 핵심을 파악해 주기를 바란다면, 나도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내가 상대방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일 또는 싫어하는 일을 상대방에게도 하지 마라.’ 이것은 예의이고, 또한 모든 윤리에서의 황금률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우리 사회의 토론 문화는 상식적이지 않을 때가 많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더러 있다.

사회가 군사문화에 오래 영향을 받아서인지, 민주주의 방식에 아직 서툴러서인지, 또는 암기식 공부에만 매달려 성찰하는 습관을 기르지 못했기 때문인지, 어쨌든 토론 문화가 매끄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토론에서 상대방이 논의를 제기하면 적절한 반응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논의를 제기한 문제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암기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만 응답하기 바쁘다.

암기 능력으로 단답식 정답만 찾는 능력만 키웠지, 질서 있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훈련을 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받은 교육의 병폐다. 때문에 위트와 유머를 섞는 토론을 보기 참 힘들다. 맹목적 찬성 또는 반대와 비방, 그리고 비난이 있을 뿐!

암기에는 상대가 필요 없다. 암기는 수학의 답처럼 절대만 찾는다. 토론은 자유로운 사고로 진행하기 때문에 절대가 없고 상대적인 것이다. 적절한 질문이 있으면 상황에 맞는 적절한 답변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기억에 저장한 암기 지식만 끄집어내 사용한다. 이 암기 지식은 편견 또는 확증편향이기 일쑤다. 편견을 조합해놓고 생각한 것처럼 말한다.

그러니 우리 사회는 토론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라 토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봐야 할 경우가 많은 것이다.

『숫타니파타(Sutta nipata)』는 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이 경전의 「문답 소편(小篇)」을 보면 어설픈 토론과 논쟁을 하느니 차라리 침묵하라고 한다. 우리의 토론 문화에 많은 시사점을 주며, 논쟁에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한다.

- 세상의 학자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견해를 고집하면서 의견을 달리해 싸우고 있다. 스스로 진리의 숙달자라고 자칭하면서 여러 가지 논쟁을 일삼는다. "이것을 안 사람은 진리를 아는 자이며 이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불완전한 자"라고 말하면서.

- 그들은 이렇게 다른 견해를 품고 논쟁하면서 "저 사람은 어리석어 진리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두 자기야말로 진리에 이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들 중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한 것일까?

- 남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어리석고 저급하며 지혜가 뒤떨어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각자의 편견만을 고집하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모두 어리석은 자들이며 지혜가 뒤떨어진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 또 만약 자신의 견해로 인해 깨끗해지고 진리에 도달케 되고 총명한 사람이 된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 속에는 지성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들의 견해는 이러한 점에서는 모두 동일하게 완전할 것이다.

- 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서로 비방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그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견해만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이야기해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남이 어리석다고만 말할 뿐이다.

- 진리는 하나일 뿐, 둘이 없다. 그 진리를 안 사람은 다투는 일이 없다. 다투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진리를 찬양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문들은 똑같은 것을 똑같이 말하지 않는 것이다.

- 스스로 진리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면서 말하는 사람들은, 어째서 여러 가지 다른 진리를 내세우는 것일까? 그들은 여러 가지 다른 진리를 남에게서 들은 것일까? 아니면, 자기의 사색에 의한 것일까?

- 세상에 여러 가지 다른 진리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원한 것으로 상상할 따름이다. 그들은 자기만의 편견에 사로잡혀 사색하고 탐구한 나머지 ‘내 말은 진리다’, ’다른 사람의 말은 허황하다’라고 두 가지로 말하는 것이다.

-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견해나 학문, 계율, 서원, 사색 등 남의 말에 의존해 자기 학설만을 고집하며 ‘반대하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고 진리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 반대자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보는 동시에, 자기는 진리에 이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자기는 진리에 이른 사람이라 하면서 남을 멸시한다.

- 그는 그릇된 어리석은 생각으로 차 있고 교만에 넘쳐 있다. 자기는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마음 속으로 제 1인자라 자만한다. 그의 견해는 자신이 볼 때 그처럼 완성돼 있기 때문이다.

- 만약 남이 자기를 어리석다고 해서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자신도 상대와 함께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또한 스스로를 베다에 통달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라 부를 수 있다면, 여러 사문 중에 어리석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 ‘나의 가르침 이외에 다른 어떤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타락한 자, 불완전한 자들’이라고 이교도들은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편견에 탐닉해 이미 물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 자기 학설만을 청정하다 말하고, 남의 가르침에는 청정이 없다고 한다. 이교도의 무리들은 이와 같은 집착에 빠져 자기의 학설만을 완고히 내세운다.

- 자기의 학설을 완고히 내세우고 있지만, 어느 누구를 어리석은 사람이라 볼 수 있을 것인가. 남의 가르침을 어리석다거나 옳지 않다고 한다면, 그는 스스로 고집쟁이가 되고 말 것이다.

- 일방적으로 결정한 자신의 입장에 서서 자기 자신을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세상에서 논쟁에 휘말린다. 일체의 철학적 단정을 버린다고 한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논쟁의 실마리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붓다가 2,500년 전에 이미 논쟁에 휘말리지 말라고 했다. 그 긴 시간이 지난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벌이는 논쟁은 여기에서 몇 발자국이나 벗어났을까?

흔히 선생이나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비판의식이 부족하다고 한다. 암기한 지식으로만 이야기 하거나 풍문을 거론하며 이야기하는 자세로는 근본적인 비판이 있을 수 없다. 자기 지식의 신념만 진리고, 다른 이 지식의 신념은 다 어리석다고 할 때 어떻게 비판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종교가 그러하고, 학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 주장만을 옳다고 일삼고, 남의 주장은 그르다는 논쟁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폐다.

서로 다투는 논쟁을 초월해 진정한 깨달음(지혜)에 이르는 길은 있다. 사색과 몸 훈련(수행)을 통해 깊은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은 이기고 지는 논쟁과 전혀 차원이 다르다. 위대한 성현이 그러하다. 상대를 압도하는 절대의 경지를 현실 정치에서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민주주의는 토론과 타협의 산물이다. 단 우리 정치에서 말하는 협치는 내가 말하는 타협하고는 다르다. 논리를 갖춘 토론이 팽팽히 맞설 때 서로가 어느 정도 양보를 해 최대 공배수를 만들어내는 것이 타협이다. 우리의 협치는 이른바 속된 권력을 함께 누리기 위해 서로 어울리자는 ‘야합’에 불과하다.

토론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하는 게 아니라, 먼저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자세가 기본이어야 한다. 토론의 기본을 살펴보면 토론자의 품격을 가늠할 수 있다.

지금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예비경선 토론회와 장외 설전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가관이다. 평범한 문제에 말꼬리를 잡고, 상대의 말을 부풀려 음해하고, 상대의 장점을 깍아내리고, 이어서 감정 대립으로 흐른다. ‘짜장면과 우동’의 논쟁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한 나라의 지도자들 모습으로 봐 주기 힘이 든다. 논쟁에 품격이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을 쿡 찔러서 자위적인 쾌감을 얻을 게 아니라, 논쟁을 통해서 국민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진실과 열의, 그리고 비전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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