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들의 구체적인 고통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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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의 구체적인 고통을 기억하며…
  • 송수민
  • 승인 2023.08.2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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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관기] 동의대학교 한의대학 본과 3학년 송수민
(제공=송수민)
평화기념상 앞에서 (제공=송수민)

열 살의 오오츠카 카즈토시 씨는 학교 근처에서 친구와 함께 매미를 잡고 있었다. 순간 하늘에서 강렬한 빛이 번쩍하며 굉음이 들렸고, 땅이 울리고 폭풍이 몰아쳤다. 얼마 후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폐허가 된 거리에 내팽개쳐져 있었고, 함께 있던 친구를 포함하여 생명의 기척이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죽음의 정적만이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1945년 8월 9일이었다. 미국이 원자폭탄 Fat Man을 나가사키에 투하한 날이다. 원폭은 지상 500m 위에서 터졌고, 그 표면 온도는 5천도가 넘었다(태양의 표면 온도는 6천도다). 난데없이 땅 가까이에 작은 태양이 떨어진 것이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엄청난 빛과 열이 쏟아졌고, 신칸센 속도의 5배가 넘는 폭풍이 불어 모든 것을 날려버렸으며, 폭풍이 휩쓴 잔해마저 화재로 덮여버렸다.

거리는 새카맣게 타들어갔고, 도로에는 사체들이 굴러다녔다. 1km 내에 있던 사람들은 내장의 수분까지 말라버린 채 즉사했다.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지만 온몸의 피부가 타고 늘어져 살가죽이 찢어진 옷처럼 덜렁거려 ‘도저히 사람의 형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방공호와 강가로 몰려들었다. 눈에 갈고리처럼 박혀 평생이 지나도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학살은 한순간의 폭발로 끝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화상을 입고 상처에 구더기가 들끓는 채로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갔다. 전쟁터에서 오래 일했던 간호사들은 이런 참상은 본 적이 없다며, 해드릴 수 없는 게 없어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리며 바닷물을 증류해 만든 소독약을 뿌리고 다녔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도 원인 모를 구토, 두통, 설사 등에 시달렸는데, 훗날에야 그것이 방사능의 영향으로 인한 내부 피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오츠카 씨의 가족들은 젊은 나이에 암이나 괴사성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죽음의 그림자는 그들의 아이들, 피폭 2세들에까지 번졌다. 그의 조카는 백혈병으로 죽었다. 자유롭고 싶었던 중학생이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아버지는 원폭 투하 전에 이미 전사하셨다) 원폭 투하 후 생긴 잔해를 운반하는 일을 했는데, 암이 온몸에 퍼질 때까지 병원 한 번 제대로 못 가고 고약만 붙이고 일하셨다. 

오오츠카 씨 본인도 열 살 때 피폭되고 조혈세포에 문제가 생겨 아흔이 다 된 지금까지도 항암과 재활치료를 계속 받고 있었다. 나가사키의 원폭병원 원장님은 "원폭은 피폭자가 죽을 때까지 그를 살해하며, 아이와 손주들에게까지도 불안을 안긴다."라고 했다. 조사에 따르면 피폭 2세의 반 이상이 10살 이전에 사망하며 빈혈, 심근경색, 협심증, 우울증, 정신분열증 등의 질환을 앓을 가능성이 일반 국민의 몇 십 배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여전히 피폭 2‧3세의 원폭피해는 인정되지 않고 의료비 또한 지원되지 않고 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슬픔도 피폭희생자들을 갉아먹었다. 8개월 된 아이를 업고 있던 엄마는 25년간 아이의 옷을 간직하다가 원폭자료관에 기증했다. 아침에 학교 간 딸아이의 온통 불에 탄 도시락을 발견한 아빠, 9살짜리 딸을 잃고 매일 자살하고 싶었던 엄마, 아이 셋과 아내를 화장시킨 사람의 시, 황토덩어리가 되어버린 주검조차 찾을 수 없는 네 명의 아이들 등의 이야기도 있었다. 참담함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소설가 하라 다마키는 혼자 살아남았다는 슬픔에 몸부림치다가 철길에 몸을 뉘여 자살했다. 폭탄은 그렇게 온 생애를 부수었다. 그의 소설 한 구절을 인용한다. 

지금도 나의 존재는 산산조각 난 채 끝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밀려가고 있을까. 이 하숙집으로 온지 벌써 일 년이 넘는데 인간의 고독감은 거의 바닥을 친 것 같다. 더는 이 세상에 붙들고 매달릴 지푸라기조차 없다.

하라 다마키 『염원의 나라』

피폭자에 대한 사회의 외면과 차별도 고통을 심화시키는 요인이었다. 미국과 일본 정부는 원폭 피해를 축소하고자 피해자들의 입을 막았고, 시민들은 피폭으로 인한 질병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차별했다. 구호병원은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고, 피폭자들은 아픈 몸과 사회적 차별로 제대로 된 일자리도 얻지 못하고 가난에 허덕였다. 아이를 갖지 못하거나 장애아를 낳은 여성들은 쫓겨났다. 쓰디쓴 울음을 삼킨 채 홀로 아픔을 견뎌야 했다. 국가로부터 버려진 세월이었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제공=송수민)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제공=송수민)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몇몇 원폭 피해자들은 짓밟힘을 거부하고 지원과 사과를 요구하며 평화운동을 시작했다. 특히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청년들이 나서서 증언했다. 온몸에 켈로이드 흉터가 남고, 피하지방이 없어 체온 조절이 안 되고, 등 전체에 화상을 입어 3년이 넘도록 엎드려 살며 가슴팍이 짓무르고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살해당한 사람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반전평화운동에 헌신했다. 그러한 그들의 노력은 핵무기금지조약 체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오오츠카 씨도 다시는 원폭피해자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나가사키를 마지막 피폭지로 하자(no more Nagasaki)는 운동을 하고 있다. 아흔이 다 된 그는 핵무기의 금지가 길었던 피폭체험의 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10분 걷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일주일에 한 번씩 활동한다. 그의 말투와 눈빛에서는 어떤 단단함과 깨끗함이 느껴졌다. 아픈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 지금도 계속되는 내부피폭을 그만큼 끊임없이 말하면서, 아픔은 그의 속에서 고여 썩지 않고 단단하게 다듬어진 듯했다. 

그는 전문가(학자)도 영웅도 순교자도 아닌, 참혹함을 온몸으로 받아낸 평범한 동료, 시민으로 평생을 피폭자로 살아온 당사자였다. 그의 몸과 마음에 박힌 원폭의 발톱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듣는 내내 눈물이 쏟아졌다. 말씀이 끝난 후 너무나도 오오츠카 씨와 포옹하고 싶었다. 그의 마음이 전해준 깊은 울림에 감사하고 같은 인간으로서 그가 겪은 아픔에 공감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러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예전에는 막연하게 전쟁 중에 죽었다 하면 즉사했을 거라 생각했다. 죽음과 고통을 쉬이 연결시키기 어려웠다. 하지만 오오츠카 씨의 증언과 원폭자료관을 통해, 참사에서의 죽음은 죽을 만큼의 고통 끝에 온다는 사실을, 고통은 매우 구체적이고 육체적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전에는 화상에 구더기가 끓는다는 것도, 살이 찢어진 옷처럼 늘어날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삶터가 무너진 슬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괴로움은 불덩이가 되어 단전에서부터 끓었다. 그리고 희생자들을 방치하는 사회 속에서 고통은 몇 십 년이나 지속되었는데, 그동안 어떤 피폭 2세는 이불을 덮지 않고서는 코가 아파 조금도 잘 수 없었다. 그렇게 아픔이 구체적인 만큼, 평화도 추상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생자들의 분노를 삭제한 채 그들이 겪은 일의 슬픔과 안타까움만 강조하는 것은 참사 포르노 소비와 다름없었다. 이런 일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방법은 가해자인 미국에 책임을 묻고, 스스로 핵을 보유해야 핵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핵억지론에 반대하고, 핵무기의 원료를 생성하고 방사능 오염 가능성이 있는 핵발전소를 폐지하자는 구체적이고 공격적인 요구가 아닐까 했다.

오오츠카 씨는 온몸으로 원폭을 기억하며 살아남아서,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이제는 몸의 일부가 된 아픔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준 사람들에 분노하고 싸우고, 다시는 그 누구도 내가 겪은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운동했다. 그 깨끗하고 단단한 마음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을 본 뒤에 평화공원으로 나왔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다니고 매미소리가 쟁쟁 울렸다. 그때 그 참혹함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막연하게 원폭이 투하되었던 거리는 우리와 매우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너무 친숙하고 평화로워서 오히려 낯설었다.

군수공장이 밀집되어있던 나가사키. 하지만 동시에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보다 일으키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았던, 공습피해도 적고 매미를 잡으러 다니는 아이들이 있던 곳. 저절로 제철소 가까이 있는 본가가 떠올랐다. 본가와 자취방 모두 원전 인근 지역이라는 것도. 원폭 혹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전의 평화와 지금 나와 내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평화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피부로 공포가 느껴졌다.

나가사키의 군수공장에서는 그 당시 일본의 신무기였던 어뢰를 만들었다고 한다. 미쓰비시 제강 무기공장이 원폭 투하의 목표지점이었다. 원폭 투하 결과 튼튼하게 지었던 공장은 완전히 망가졌고, 공장에서 일하던 1만 명 중 80%가 죽거나 다쳤다. 오오츠카 씨의 “이것이 군사 대 군사의 결말이다”라는 말에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핵무기 아래서 보호받아야, 즉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어야 다른 나라의 핵공격에서 안전할 수 있다는 한미일 정부의 핵억지론의 결과는 서로 폐허가 되거나, 서로 군비경쟁으로 아까운 자원을 소모하는 것일 뿐이겠구나 생각이 들며, 원폭자료관의 "평화를 말하는 사람은 단 한 개의 바늘도 숨겨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평화공원에서 한국인 원폭 희생자들 위령비를 찾아 묵념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7~10만 명인데, 대부분이 강제동원된 분들이었다. 이중으로 희생당한 분들, 평생 아팠지만 그 아픔을 홀로 감당할 수밖에 없던 분들이었다. 한국은 일본보다도 원폭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고 심지어 의료지원은 모두 일본에서 피폭자로 인정받아야만 지원받을 수 있어 아직도 돌봄 접근성이 매우 떨어진다. 원폭 피해자 복지관 수용인원이 부족해 못 들어갔는데, 거기 갈 수만 있다면 원폭에 대한 원한도 잊을 수 있겠다며 눈물 흘리시던 할머니도 생각났다. 

미국은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 원폭을 떨어뜨렸다고 했지만, 그 피해를 고스란히 겪은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킨 위정자들이 아니라 한일 민중들이었다. 선배의 말을 빌리자면, 일본과 한국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정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정부만을 일본 전체로 보지 말고, 사람 대 사람으로 한일 민중이 결합해야하겠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한일 원폭 피해자들이 힘을 합쳐 국제 민중법정에 미국을 고소하고 원폭 책임을 묻는 것처럼 말이다.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제공=송수민)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제공=송수민)

2023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도 참가했다. 1954년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으로 일본 근처의 비키니 섬에서 제3의 피폭이 일어나고 전국적으로 수산물 소비가 어려워지며 대중들의 공감을 얻어 생겨난 대회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보편적인 평화와 반핵 운동은 쉽게 수용된 반면 피폭자들의 원한과 분노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양 정부의 피폭 피해 은폐 뿐 아니라, 원자력을 통한 발전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올해에도 피폭자 증언이 있었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핵무기 사용을 규탄하는 발언이 많았다. 아쉬웠던 것은 원전 문제,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후쿠시마 지역 청년의 발언에서 원전을 포함한 탈핵이 언급되었고 한국 팀은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 반대' 몸자보를 입고 기립박수를 쳤다. 내부피폭은 원수폭 피해자들 뿐 아니라 원전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지역주민에게도 유효한 이야기였는데, 기대만큼 많이 언급되지 않아 매우 아쉬웠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평화, 탈핵을 이야기하는 전세계의 사람들을 만나 우리의 힘과 연대를 확인하고, 후에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혹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할 공간을 발견했다는 것 자체로 굉장히 의미 있었다. 직접 이 자리에 온 사람들 뿐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이들을 응원하며 대회에 갈 수 있도록 지원한 뒤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하니 더욱 큰 자리라는 것이 느껴졌다. 

세계대회에서는 핵무기의 위험성을 논하며 군사기지(특히 미군기지), 핵발전소로 논의를 확장했고 반전, 평화, 안전을 논했다. 이를 들으며 현 정부가 한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오염수 투기를 사실상 용인하고, 기후위기의 대응이라고는 핵발전밖에 이야기하지 않는 상황을 생각하며 앞으로의 탈핵운동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민의련 이사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피폭된) 환자들이 아프고 돈이 없고 일을 할 수 없고 결혼할 수 없는 중요한 원인이 피폭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환자들과 함께 핵발전과 핵무기에 반대한다면, 그것은 슬프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지 않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당사자의 말에 귀기울여 그 위험성을 인지하고, 핵무기금지와 핵발전소폐지에 연대하여, 오오츠카 씨가 평생의 피폭체험에서 승리하는 데 힘을 보태야겠다.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 권혁태 선생님(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의 칼럼, 민의련과 반핵의사회가 쓰고 번역한 여러 책들을 참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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