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 죽음이 남긴 숭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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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죽음이 남긴 숭고함
  • 송필경
  • 승인 2024.01.0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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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트롯 유행가를 들으며 매혹적인 놀이로써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겠지만 커다란 감동이나 진지함이나 존경심에 빠져들기는 어색하다.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합창곡으로 만들어 교향곡에 삽입한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하기보다 존경심을 이끌어낸다. 무엇보다 베토벤이란 천재 음악가가 약 30년간 구상해 만든 작품이다.

음악가로서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치명적인 귀앓이의 고통 속에서 세속의 권력에 허리를 굽히지 않고 음악가의 자존심을 고귀하게 지킨 만큼 베토벤의 음악정신의 크기와 깊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교향악단과 합창단의 웅장한 규모 앞에서 청중이 먼저 느끼는 감정은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숨 막힐 듯한 위압감이나 전율스러운 경외심이다.

이런 숭고한 음악은 본능적인 긴장으로 전율이 일어나고 난 뒤 그 전율이 가라앉아야 안도의 감정이 생기면서 감동이 밀려온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면 『합창 교향곡』에서 신적인 거룩함을 느꼈으리라.

평생 그늘진 인생 공기만을 호흡한 무지렁이 노동자가 굶주린 어린 여성노동자를 위해 숭고한 죽음을 감행한 결과 천박한 남한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인식지평이 열렸다.

22살 청년의 죽음이 사회적 중대사가 된 적이 우리 역사에서는 아주 드물었다. 불교라는 꽃을 심기 위해 순교한 신라 청년 이차돈(506∼527) 이후 처음이리라.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차돈은 순교를 결심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버리기 어려운 모든 것들 가운데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불교가 아침에 행해진다면, 부처님의 해가 다시 떠오르고 임금께서는 길이 편안할 것입니다.”

전태일의 분신이 전율스러운 공포를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유언과 글들이 알려지면서 우리 사회의 모든 양심적인 지성인을 감동시켰다. 이차돈의 순교가 신라의 지성인들을 감동케 했듯이.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전태일에게서 진실한 신앙인들은 어쩌면 순교자적인 ‘숭고함(거룩함)’을 엿보지 않았을까? 민주화운동의 거목인 함석헌 선생과 김재준 목사가 청년 전태일의 죽음을 그렇게 보았다.

어떤 인간이든 마음속에는 분명 나약하고 이기적인 면이 있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있는 이타적인 선한 마음씨도 있다. 이기적인 욕심과 이타적인 연민은 일반적인 인간에게 손의 손등과 손바닥이다.

칸트는 자비로운 동정심은 도덕적 행위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은 여유로울 때 마음이 이끌려 동정심을 발휘하다가 자기 처지가 어려워지면 동정심을 거두기 때문이다.

어려운 처지에서 하기 싫어도 그것이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할 때, 그 행위는 참으로 도덕적일 수 있다. 선이란 ‘어떠한 경향성(마음의 이끌림)이 없이 오직 의무로부터’ 어떤 일을 행할 때 발생한다고 칸트는 말했다.

전태일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에게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준 동정심은 아름다운 일이었다. 어린 여성노동자의 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려 사회에 경종을 울린 행위는 칸트도 감탄할 만한 도덕적인 숭고함, 바로 그것이었다!

전태일의 도덕적 감성은 천부적 자질에다 자신에게 날카로운 채찍을 가하는 엄격한 ‘자기훈련’을 했기 때문에 숭고했다.

전태일은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남루한 환경에서 빛을 낸 전태일이 실천했던 도덕은 남한 현대사에서 가장 숭고한 흔적을 남겼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름다움이라 할 만한 대상은 모두 화려하고, 그 화려한 꾸밈을 어마어마한 돈으로 치장한 요즈음 시대에 아름다운 대상은 많다. 한류라는 이름의 아름다움을 창조한 연예인들이 지구촌 전체를 매료하고 있는 것에 나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전태일의 도덕적 숭고함을 평가하는 데에는 인색하다. 전태일이란 이름의 범위를 ‘단결·투쟁’이라는 노동자 권익쟁취 운동으로만 좁게 한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인간에게 육체노동은 신성한 것이기에 노동자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전태일 정신을 ‘투쟁·단결’이라는 노동운동의 상징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전태일은 ‘어린’, ‘여성’을 향한 연민이 남달랐다. 그 연민을 사랑으로 승화했고 그 사랑을 위해 온몸을 던진 숭고한 휴머니스트이다. 우리는 전태일 정신을 인류가 그토록 오랫동안 염원한 ‘평등을 향한 인간해방 선언’으로 보아야 한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우리 시대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극찬했다. 체 게바라는 영원한 혁명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 죽음으로써 입증한 전태일의 어린 여성노동자를 향한 연민은 가장 숭고한 휴머니스트의 모범으로 인류사에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이 짧은 유언은 남한에서 발행한 수없이 많은 경제학서의 수십만 단어보다 더 진지하게 수많은 노동자를, 수많은 지식인들을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했다. 한 인간이 죽음으로써 그 영향력을 전 사회에 극대화한 예는 우리 역사에서 이차돈 이래 처음이다.

“전태일의 삶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전태일의 유언은 참으로 숭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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