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창 - 위반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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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창 - 위반을 꿈꾸며
  • 신순희
  • 승인 2004.10.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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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 속의 여성

20c초까지 여성의 첼로 연주가 금기였다는 것을 아시는지?

무대위에서, 다리 벌린 여자가 연주하는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여성 첼리스트를 원천봉쇄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브라스나 트럼펫의 여성 연주자 또한 드물었던 역사를 살펴 보면, 그것이 굳이 벌린 다리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짐작이 든다.

음악은, 특히나 클래식 음악 분야는, 그 자체가 주류(majority) 계급성을 상징하는 문화 영역이기에, 비주류인 여성을 터부시하고 금기시하는 성향 또한 참으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 지난 여름, 제 1회 대관령 음악제에서의 정명화.
이 음악제에는 첼리스트 정명화,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펠츠만, 상임연주단 세종솔로이스츠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대거 참가해 총 6차례의 메인 연주회를 개최한 바 있다.
고래로 미술, 음악, 문학 등 대부분의 예술분야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같은 돈 많은 후원자의 경제적 지원으로 그 명맥을 이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정부나 대기업 등의 문화예술 진흥기금으로 음악계의 주요 행사가 열리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클래식 음악이 상징하는 계급역사성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지배계급과 음악이 만나는 곳인 주류 무대에서, 여성 예술인들은 금기라는 이름으로 아주 오랜 세월동안 배척당해 왔다. 설마, 오페라 하우스에 앉아 깃털 부채를 팔랑거리며 주류예술을 감상하는 귀부인의 모습을 음악무대에서의 여성 참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

패왕별희로 유명한 중국의 경극에서 장국영이 거세까지 당하며 여성 배역을 맡아야했던 것도, 그런 배역을 소화할 능력의 여성이 없었기 때문은 물론 아니요, 원래부터 그랬던 중국의 관습헌법도 아니요, 단지 '여자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주류의 '금기'가 관습으로 고착화된 결과일 뿐이다.

금기란 무엇일까?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금기가 있다. 밤에 손톱깍지 말라는 생활 속 금기에서부터, 이슬람에서의 돼지고기같은 문화적 금기들, 또 생선 요리를 뒤집어 먹지 않는 어부들의 미신까지 참으로 다양한 금기가 있다. 이러한 금기들은 선조의 지혜를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격언의 역할을 하기도 하다. 조명이 어둡던 시절에 밤에 손톱깍는 행위로 상처를 입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엿보이기도 하고, 더운 날씨의 문화권에서 가장 쉽게 상하는 돼지 고기는 어쩌면 생명을 위협하는 먹거리일 수도 있었을 것이고, 또 배가 뒤집어지는 풍랑을 피하고 싶은 어부들의 마음은 밥상 앞에서도 늘 기도하는 자세로 표현되었으리라.

금기는 인간의 내부에 있는 공포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너무 강한 부정은 긍정인 것처럼, 합리적 이유가 배제된 '금기'라는 이름의 신화화된 억압은, 때로 지배계급의 공포를 보여주는 잣대이다.

이슬람 여성들을 가리는 차도르처럼, 역사의 한 시기에 보호의 명분이었던 억압들이, 시대와 상황의 변화 앞에서도 좀체 달라지려 하지 않는 것은 지배계급의 공포섞인 고집일 뿐이다. 차도르가 걷어낼 것이 여성의 시야일 뿐 아니라, 합리성이라는 이름의 시대적 요구이며, 그 합리성이 비합리적인 정권의 명분을 박살낼 것임을 두려워하는 공포에 다름아닌 것이다.

여성에 대한 금기로 가득찬 음악계에서, 시대의 변화와 현실적 필요에 의해 고음 소프라노 파트의 여성 성악가가 최초로 주류 무대를 비집고 들어간 이후, 다수의 여성 음악인들이 나타나 바야흐로 여성 음악인 절대 다수의 시대를 열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남성=과학, 여성=예술의 유치한 이분법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금기가 줄어든 이후 여성 음악인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현상은 역설적으로 여성의 친 음악예술성향을 입증한다고도 볼 수 있으니, 인간의 재능을 억누르던 금기의 소멸은 축하할 일이다. 첼리스트 정명화가 20c 이전에 태어 났다라면 어쩔뻔 했는가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음악계의 금기는 곳곳에 남아 있다.

1월 1일의 신년 음악회에는 여성 작곡가의 곡을 연주할 수 없고, 국가(國歌)나 국가행사곡처럼 대규모 곡을 여성 작곡가에게 위촉하지 않으며, 여성 연주자의 비율에 비해 여성 악장이나 여성 지휘자를 찾아보기 힘들고, 예술의 전당 관장 등은 전부 남자인 현실이 이를 입증한다.

또 몇 안되는 음악 예술계의 정규 직장인 대학교수직의 분포를 보면, 시간 강사의 100%가 여성이고, 전임강사의 100%가 남성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하나도 웃기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다. 대부분의 음대 학생이 여학생인 점을 고려하면 이는 과소 대표성(under-representation)의 문제일 뿐아니라, 끔찍한 금기와 차별의 현실이다.

이러한 음악계의 금기는,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이, 단지 음악계의 권력을 쥐고 있는 남성 음악인들의 권력 상실에 대한 공포일 뿐임을 알 수 있다. 금기를 가장한 권력욕일 뿐이다. 그 권력욕의 해체가 여성주의 음악의 목표이다.

음악에서의 여성성은 딱히 구분하기가 곤란하다. 티나 데이빗슨이라는 기고가가 클라이맥스가 한번 있으면 남성 음악이고, 클라이맥스가 여러번이나 전혀 없으면 여성음악으로 구분하자고 했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지만, 청각으로 감흥되는 음악에서 여성성을 따로 구분하기는 참으로 곤란하다. 단지 작곡, 연주, 지휘 등의 음악 생산 분야에서 여성 음악인들의 활동이, 혹은 차별이 어느 정도인가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지적해내는 지점에 여성주의적 시각이 필요하리라.

그렇기에 우리 사회에 가득찬 금기들을 드러내 보이고, 그 속의 두려움과 권력의 욕망을 함께 포착해 해체하는 작업이 여성주의의 몫이자 의무이지 싶다. 바로 그것이 무대에서 거절당한 여성 뿐 아니라 거세당한 장국영도 함께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관습헌법이란 이름으로 수도를 함부로 옮길 수 없다는 금기를 개발해낸 헌법재판소 판사 이하 기득권 세력의 기발함도, 권력을 뺏길지 모른다는 뼛속까지 떨리는 공포에서 출발했음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금기를 정할 권력은 참으로 막강하다. 그리고 공포에 가득차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참으로 위험하나 유치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위반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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