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나의 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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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나의 명함
  • 안기옥
  • 승인 2009.06.2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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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행동하는 의사회에서 발행하는 웹진 '행동하는 의사들'(http://www.khpa.org/board/zboard.php?id=news_letter)에 실린 글의 전문이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명함’을 검색하면 이렇게 나온다.

명함 [名銜]
[명사]
1 성명, 주소, 직업, 신분 따위를 적은 네모난 종이쪽. 흔히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신상을 알리기 위하여 건네준다.

나의 명함에는 여러 가지 신분이 적혀있다.

Medical Doctor를 뜻하는 M.D.도 모자라 emergency physician(응급의학과 의사)이라고 전문과목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옆에 medical director라고 써 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인가가 나의 identity의 독특한 핵심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나는 응급의학과 의사이다. 그런데 나의 일터는 ‘응급실’이 아니다. 나는 서울소방학교 소속 구조구급교육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나의 직급은 5급에 해당하는 전문계약직 가급이다. 쉽게 말해서 공무원이다. 공무원은 성과를 평가받아야 하기 때문에 성과목표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나는 계약직이라 승진 등의 인사에 반영되지는 않지만 이 성과에 따라 성과급을 받게 되니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계약사항이니 만큼 내 맘대로 정할 수는 없다. 어찌되었든 목표계획서를 살펴보면 1. 응급의학 관련 과목 강의 및 실습을 000이상 시간 한다. 2.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활동을 한다. 3. 교육의 결과(교육생들의 만족도, 국가고시 합격률 등)를 향상시키기 위한 활동을 한다. 4. 의료지도 및 자문을 연 12회 이상 한다. 이렇게 4가지 항목이 있다.

정리하면 선생님으로서 강의하고 학생들에게 신경 쓰고 연구 활동도 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일은 medical director로서 해야 할 일의 극히 일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medical director이다.

medical director는 응급의료체계의 독특함 때문에 생긴 직업이다.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의사가 직접 출동하는 유럽과 달리 응급구조사가 현장에 출동하여 환자를 평가하고 처치하는 미국과 우리나라 등에서 필요한데 왜냐하면 응급구조사는 의료인이 아니기 때문에 의학적 행위를 하는데 있어 의사가 관리와 감독, 직접 지시 등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119 구급대원은 5,000명이 넘고 이송건수는 한해에 백만 건이 넘는데 직업적인 medical director는 나를 포함해서 단 네 명밖에 없다. 그것도 모두 서울에만 있다. 병원에서 의사의 지시나 감독 없이는 어떠한 약물도 투여될 수 없고 의료행위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나라의 병원전단계의 의료는, 심각하게 말하면 ‘무면허’인 것이다.

이런 현상은 병원 전단계에서는 별다른 처치 없이 환자를 신속히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만이 강조되어왔던 풍토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119 구급대와 택시의 차이점을 단지 환자가 누울 수 있다는 것 뿐인가?
 
이런 문제들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medical director인 나의 사명이다. 119 구급대의 응급처치가 형편없다는 비난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마치 아이가 공부를 못해 학교에 불려가는 학부모의 마음이 된다. 부끄럽기도 하고 아이가 한심스러워 밉기도 하다.

수준별 이동 학습을 해서 잘하는 아이 더 잘하게 예산을 쓰자는 다른 학부모들 앞에서 우리 아이는 집에 공부방이 없어 공부를 할 수 없으니 학교에 그런 공부방을 만들어 달라고, 그런 일 하는데 예산 좀 달라고 말하기가 참 민망하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우리 아이가 얼마나 공부를 못하는지, 우리 집이 얼마나 가난한지, 사람들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 할 텐데 말이다. 그래도 아이를 위해,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게 올바른 부모노릇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medical director라고 새겨진 명함을 내밀 때마다 나는 그런 부모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반성을 하게 된다.

 

안기옥(응급의학과 전문의, 서울소방학교 소속 구조구급교육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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