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제 도입’ 위해 다시 힘 모으자!
상태바
‘주치의제 도입’ 위해 다시 힘 모으자!
  • 이재호
  • 승인 2010.01.27 14: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건강정책 10년 회고·10년 전망](6) 일차의료

세계보건기구(WHO)는 1978년 9월 12일 알마아타에서 일차보건의료(primary health care)에 관한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그 이념과 실천 전략을 제시했다.

일차보건의료는 국가 보건 체계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며, 국가 보건 및 사회 경제 분야의 핵심 부분을 구성한다. 국가 보건 체계에 개인, 가족, 그리고 지역사회가 처음 접촉하는 단계이며 보건의료를 사는 곳과 일하는 곳에 가능한 가깝게 가져다주고 지속적 보건의료 과정의 첫 번째 요소를 구성한다.

단순한 일차진료(primary medical care)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 가족 및 지역사회를 위해 건강증진, 예방, 치료 및 재활 등의 서비스가 통합된 기능으로서, 제도적으로 주민이 보건의료 체계에 처음 접하는 관문이며, 기술적으로는 예방과 치료가 통합된 포괄적 보건의료를 의미한다.

한편, 일차의료(primary care)는 기존의 일차진료가 일차보건의료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개념이다.

최초 접촉, 포괄성, 관계의 지속성, 조정 기능 등 그 본질적인 속성은 같지만, 보건의료 체계와 문화적 차이에 의해서, 국가별로 그 모습이나 개념에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제 기능 못하는 한국 1차의료

보건의료 체계가 정립된 국가들에서 일차의료는 일차보건의료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므로 일차보건의료와 동등한 개념으로 쓰이지만, 일차의료가 지역사회와 유리돼 분절화된 양상을 보이는 우리나라에서는 그 개념을 혼란스럽게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우리나라 일차의료 개념 정의 연구(2007)’ 결과에 의하면, 일차의료란 <건강을 위하여 가장 먼저 대하는 보건의료를 말한다. 환자의 가족과 지역사회를 잘 알고 있는 주치의가 환자-의사 관계를 지속하면서 보건의료 자원을 모으고 알맞게 조정하여 주민에게 흔한 건강 문제들을 해결하는 분야이다. 일차의료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 보건의료인들의 협력과 주민의 참여가 필요하다.>로 정의된다.

우리나라 의료체계가 안고 있는 문제의 상당 부분은 의료기관의 사적 소유가 지배적이고 공공성이 결여된 점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설명은 일차의료 부문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일차의료기관의 90% 이상이 민간 소유이며, 얼마 안되는 공공 부문조차 일차보건의료의 표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민간 의원들과 경쟁적 관계 속에서 분절화된 일차진료를 제공하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실상 모든 분야의 의사들이 의원을 개설할 수 있는 상황에서 병원 근무가 적합하도록 수련을 받은 모든 분야의 단과 전문의들이 개원하여 일차의료 영역에서 환자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지역사회에서 일차보건의료 팀에 의한 활동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서비스 분절화가 너무 오랜 동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일차의료에서의 주치의에 의한 조정 기능이 결여되어 있어서 지역사회 보건의료 자원 활용에 있어서 중복과 남용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들은 진료비 지불 체계가 행위별 수가제로만 되어 있다는 점에 의해서 더욱 가중된다.

고가 첨단 장비를 사용하는 행위들이 많이 이루어지는 병원 의료에 비해서 교육과 상담이 많은 일차의료에서 행위별 수가제는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동네 의원들은 간단하고 흔한 질환에 대해서도 고가 첨단 장비를 갖춘 대형 병원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점차 영세해지고 있다.

보건의료인 양성은 주로 대형 병원들에서 이루어지며 병원 인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학생들은 지역사회 일차보건의료를 경험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다.

1차의료 상황 10년간 ‘오히려 악화’

안타까운 사실은 이와 같은 우리나라 일차의료 상황은 지난 10년 동안 전혀 개선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악화되거나 퇴조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새로운 천 년을 맞이하는 2000년에 우리 사회는 의약품 실거래가 상환제와 의약분업에 항의하는 의사들의 파업으로 큰 갈등을 겪으며 출발했다. 당시 의사 파업은 한국 사회의 온갖 의료 문제를 폭발적으로 정치화시켰고 집단 간, 사회 주체 간 갈등을 첨예화시켰다.

의료가 정치 사회적인 문제가 된 것도 처음이지만 동시에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이 깊고 다양하여 갈등이 쉽게 조정되지 못하였다. 국민들은 진료 공백으로, 의사는 신뢰와 존경심의 상실로 어려움을 겪었다.

국민의 정부에서 이루어진 의료보험 통합과 의약분업이라는 대규모 정책 현안은 정부의 모든 보건의료 정책을 압도하는 상황이 초래된 나머지 단골 의사 제도와 일차의료 인력 양성 방안 등 일차의료 개혁의 분수령을 이룰 수 있었던 과제들은 정책 의제로도 성립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 시기에 개원 가정의 중심으로 자발적인 주치의 제도 운동이 일었으나 의사 파업으로 싹을 틔울 수 없었다. 만일 정부가 의약분업에 앞서 주치의 제도를 추진했다면 어떠했을까? 커다란 아쉬움이 남는다.

참여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 기조는 대체로 국민의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기는 하나 일차의료와 주치의 제도에 관한 내용은 대선 공약에서부터 제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임기 동안 정책 의제로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인구 5만 명당 1개소의 지역 보건 센터형 보건지소 설치’라는 공약 내용은 한 가닥 희망이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외환 위기 이후 몰아닥친 신자유주의 광풍은 국민의 정부에서 공공 의료기관의 민영화와 보건소 인력 감축을 가져왔고 참여 정부에서는 이를 더욱 노골화하여 의료를 대자본의 이해에 맞추어 산업화시키겠다는 정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의료 민영화는 보건의료 부문에서 정부의 역할을 축소시켜 일차의료의 퇴조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2000년 의사 파업 후 의사협회 요구로 만들어진 의료제도발전특위 전문위원회는 의학 교육 개선 방안의 하나로 임상 수련 의무화 방안을 발표(2002. 12)했는데, 이는 기존의 가정의학 수련 제도와는 별도로 2년제 ‘일차진료 의사’를 양성하자는 것이었다.

그 후 5년간 간헐적으로 제기된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일차의료 전문의(가정의)를 양성해 온 대한가정의학회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대선에서 현재의 여당인 한나라당은 주치의 제도에 대해서 유일하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보건의료 공약에서 일차의료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점은 참여 정부 공약과 유사했으며 참여 정부의 의료 산업화 정책을 한층 강화해 나가려는 모습을 보였던 점은 일차의료에 부정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세계 최저의 공공 의료 비중, 세계 최고의 노인 인구 증가 속도, 행위별 수가제 등에 의해 세계 최고의 국민의료비 증가 속도가 유지되는 모습을 이명박 정부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1차의료 제기능 발휘 대안은 ‘주치의제 뿐’

현재의 보건의료 체계가 일차의료 강화 없이 지속된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건강보험 재정이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는 상황 인식이 이제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그러나 시장주의 관점은 주치의 제도를 주로 비용 절감 수단이나 이용자 선택권 제한 제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아울러 의료급여 수급권자 의료 이용 제한 방안을 ‘주치의 제도’로 간주하려 하거나 만성질환 관리 사업을 주치의(단골 의사) 제도 시범 사업으로 부르는 경우 등이 있는데, 국민에게 주치의 제도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각인시킬 위험이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

최근 신종 플루 대유행을 계기로 주치의 제도 논의가 다시 시작되는 것도 좋은 발단이 될 수 있다.

주치의 제도 도입의 첫 단추는 일차의료 의사에게 비용 절감 차원의 ‘문지기’ 기능을 맡기는 것일 수 있으나 지불 체계, 의료인 교육/수련 체계, 정보 체계 등의 개편을 수반하지 않을 경우, 서비스의 포괄성, 관계의 지속성, 조정 기능 등이 구현되는 성공적인 주치의 제도 도입은 불가능하다.

앞으로 10년간 한국의 일차의료가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보건의료 학계와 시민 사회 진영, 정치권이 힘을 합하여 정부 내의 분위기를 쇄신시켜야 한다.

즉, 보건의료 정책 입안에 있어서 의료 산업화, 영리 병원 도입을 주장하는 시장주의자들이 손을 떼도록 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의료의 공공성이나 국민 건강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계속 확대시켜 나가면서 주치의 제도 도입을 위한 사회적 여건을 조성시켜 정책 의제로 상정시키는 데에 성공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지속적인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이루어 낸 건강보험 통합과 의약분업 과정에서의 확인했었던 그 힘을, 주치의 제도 도입을 위해 다시 한 번 결집시켜야 한다.

향후 10년 이내에 우리 국민이 명의를 찾아 병원을 전전할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신과 가족의 건강 관리를 도맡아 해 주는 믿음직스러운 주치의를 동네 의원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건의료 학계와 시민 사회는 완성된 주치의 제도의 혜택을 우리 국민에게 안겨 주어야 한다.

이재호(카톨릭대 의대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