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기억이 자욱한 나라 ‘라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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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기억이 자욱한 나라 ‘라오스’
  • 김화준
  • 승인 2010.02.11 1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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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모자보건사업 성공적 시행을 기원하며…

이 글은 비판과 대안을 위한 건강정책학회 웹진 ‘Healthy Sphere' 7호(2010년 2월호)에 실린 칼럼이다.

● Prologue

9월의 어떤 날이었다.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침 나절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라오스에서 Survey가 있는데 한 달 정도 가실 수 있겠습니까?”

전화를 주신 분은 서울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김윤 교수님이셨다. 조금 과장하자면 대답하는 데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물론 당연히 가는 걸로 말이다. 평소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Field Work 경험을 꼭 해 보고 싶었던 입장에선 어떤 일이라도 포기할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라오스로 가게 되었고 한국에서의 일정 때문에 도저히 1개월은 무리여서 상의 끝에 2주 일정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출발일은 2009년 11월 14일이었다.

정확한 프로젝트 명은 “Social Assessment on the Provision and Utilization of Maternal, Newborn, Child Health and Reproductive Health Services in Lao PDR”(Lao PDR은 라오스의 정식 국호인 라오인민민주공화국의 영문 약칭임.).

가서 해야 할 일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의료 인류학적인 접근을 통한 질적 조사였고 다른 하나는 KAP study(KAP는 지식, 태도, 실천을 뜻하는 영문 약칭)로 양적 조사였다.

나의 임무는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안(Vientiane)에서 차로 10~11시간 정도 떨어진 시엥쿠앙 주(Xieng Khuang province)의 쿤(Khoune)이라는 지역에서 Health Provider와 Village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하는 후자였다.

● 라오스라는 나라

라오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다. 수도는 비엔티안이고 인구는 2007년 기준으로 587만 명이다. 위로는 중국과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태국, 남쪽으로는 캄보디아, 동쪽으로는 베트남과 접하고 있다.

인접한 국가에 비해서 라오스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나라일 것이다. 사회주의, 베트남 전쟁, 인도차이나 반도라는 몇 개의 단어로만 각인되었을 뿐 대부분의 경우 라오스라는 나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라오스라는 나라는 결코 생소한 곳은 아니었다. 2007년 겨울 휴가를 이용해서 배낭여행의 공식 루트라 불리는 비엔티안-방비엥(Vangvieng)-루앙프라방(Luang Prabang)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 있고 더군다나 2번의 시도를 통해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깊게 맘속에 배어 있었다. 사실 2006년 겨울 라오스 배낭여행을 시도했으나 일정상의 이유로 실패했었다.

하지만 결코 2번의 시도가 헛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다정했던 나라로 아직도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한국의 1960~70년대의 소박함이 그대로 묻어 있는 나라라고 표현하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것이다. 이런 이유로 라오스 재방문은 한편으론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로 잔뜩 기대가 되는 일이었다. 

▲ 쿤 지역 살림집 모습. 고도가 높아 11월에는 난방을 하고 지냄
● 지도의 거리, 실제의 거리, 생각의 거리

라오스 파견된 인원은 총 4명이었다. 의료 인류학을 전공하시고 질병관리본부에서 일하시는 이종인 선생님, 전남의대에서 전문의로 근무하시는 최성우 선생님, 서울의대 의료관리학교실 전공의인 문상준 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말이다.

일정 때문에 4명 모두가 한 번에 출발하지 못하고 일정에 따라 4명이 각각 다른 날에 출국을 하였고 제일 마지막으로 11월 14일 내가 출국했다. 4명이 따로따로 오는 바람에 공항에 4번이나 마중을 나와야만 했던 WHO Lao office의 박건희 선생님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을 전한다.

아침 10시에 타이 항공으로 출발했지만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 도착한 것은 저녁 9시쯤이었다. 실제 비행 시간은 합쳐서 7시간이 넘지 않지만 직항이 없기에 태국에서 경유해야 했고 대기 시간이 길어 결국은 도착하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비엔티안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라오스 국내선을 타고 폰사반(Phonsavan, 시엥쿠앙 주의 중심 도시)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결국 출발한 지 1일하고도 절반이 지나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도상에서의 라오스는 결코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실제의 거리는 아직도 먼 나라인 셈이다.

실제의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마음의 거리는 더 먼 듯하다. 연일 신문이나 뉴스에서 미국, 유럽, 중국 등 소위 강대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 소식을 듣지만 라오스라는 나라에 대해서 접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쩌다 자연재해가 발생해야 신문 외신 귀퉁이에서 소식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와 비슷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고 서양보다 좀 더 익숙한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역사적 경험도 비슷하다.

하지만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라오스는 인지(認知)라는 측면의 생각의 지도에서는 아직도 먼 나라이다. 지도상으로 가까울지 모르나 실제의 거리도 멀고 관심의 거리도 여전히 멀다.

● 산악 지형에서 살아간다는 것

11월 16일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수중에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마을 이름, 조사원의 숫자, 그리고 쿤 지역의 지도 한 장이 전부였다.

조사자들의 명단도, 연락처도 없었다. 믿을 구석이라곤 나를 도와줄 RA (research assistant)인 Mr. Weng의 경험이 유일했다. Mr. Weng은 이곳 폰사반 지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자 전문 여행 가이드이다. 그나마 그가 여행 가이드라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조사에 할당된 시간은 단 2주뿐이었다. 총 7개의 보건소와 8개의 마을을 적어도 4~5일 이내에 한 번은 다 돌아야 하는 일정이었다.

첫 주는 각 마을을 돌며 조사자들의 조사 여부와 설문지에 대한 설명을 해야 했고 남은 한 주에는 완료된 설문지를 수거해야 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일정이 어긋나면 전체 조사가 어긋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출발하기 전의 설렘은 어느새 사라지고 긴장감만이 남았다. 하지만 막상 마을을 방문해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접근성도 좋았고 거리도 멀지 않았다. 속으로 ‘이 정도면 시간이 오히려 남겠는데.’ 하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더군다나 더 신기한 건 전화번호가 없어도, 마을 조사자들의 이름조차 몰라도 마을을 찾아가 Village Header (우리나라로 치자면 마을 이장 정도 된다.)를 찾아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Village Header는 귀신처럼 마을의 모든 일들을 꿰고 있었고 RA와의 몇 마디의 대화만으로도 조사자들이 금세 설문지를 잔뜩 들고 찾아오기 시작했고 일은 쉽게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기쁨은 얼마가지 않았고 다음 날부터 물거품이 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메인 로드에서 떨어져 위치해 있는 마을과 보건소였다. 일단 Village Header를 찾아가면 어느 정도 일은 해결되었지만 정작 걸림돌이 된 것은 바로 거기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심지어는 보건소에 근무하는 2명의 Health Provider에게서 설문을 얻기 위해 차로 4시간을 가야 했다. 길은 이미 도로의 형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고 엉덩이는 끊임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운전석을 흘끔 훔쳐봤는데 시속 20㎞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해발 1500m 이상의 산악 지형이어서 5시를 조금만 넘어도 해는 이미 내일 보자는 인사를 전하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아침 8시에 출발하여 저녁 7시가 넘어 숙소에 돌아왔지만 손에 쥔 설문지는 달랑 4장에 불과했다.

또 어떤 날은 차량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과 맞닥뜨려 결국 2시간 넘게 오토바이 운전자의 허리를 힘차게 껴안고서야 2장의 설문지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그 지역의 날씨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동남아의 날씨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우리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동남아는 한겨울에도 더운 날씨여야 정상이다.

허나 이곳은 고도의 영향으로 저녁에는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빈번했고 아침에 일어나서 방심하여 간단한 옷차림으로 나가면 금세 오들오들 떨면서 방으로 돌아가 두꺼운 옷을 다시 입고 나가야 하는 일을 경험하게 되는, 그런 곳이었다.

라오스에서도 고도가 낮은 지역에서는 삼모작이 가능하나 이곳은 그런 것을 엄두도 낼 수 없는 곳이었다. 척박함이라는 단어가 절로 매일 상기되는 곳이 바로 이곳 쿤이다. 이런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 이런 곳에서 조사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쉽거나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절로 느낀 2주였다.

아직도 숙소에서 이불 두 개를 부둥켜 안고 자던 생각이 나곤 한다. 난방이라곤 전혀 없는 곳에서 추위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전기장판을 켜거나 이불을 두 겹으로 덮는 것이다. 전기장판을 준비 못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이불을 발로 차고 자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에 두 겹의 이불은 무용지물이 되고 결국 1주가 지나고서는 감기와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었다.

● 시간의 차이, 하이킥의 반복

조사가 거의 끝날 무렵 KOICA에서 파견을 나온 분들과 저녁 식사를 같이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오신 분은 총 3명인데 태권도를 가르치는 씩씩한 여자 대학생, 보건소 업무 전반을 도와 주는 간호사 선생님, 그리고 IT를 담당하는 엔지니어 남자 분이 바로 그분들이다.

타국 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가장 필요한 물건’이라는 주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예상과 달리 가장 필요한 것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아닌 바로 외장 하드였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일까 하시겠지만 단기간을 갔다 온 우리도 적극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작 필요한 것은 외장 하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 있는 한국의 방송 프로그램들이다.

▲ 이번에 조사를 실시한 파견 팀과 현지 팀
라오스의 시간은 한국의 시간과 너무 많이 다르다. 시간 체계가 다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라오스의 시골 주민들과 약속을 잡을 때 ‘오후 2시에 뵙죠.’와 같은 한국 방식의 시간 설정은 오류에 가깝다. 그들의 시간 단위는 오전이거나 오후다. 때론 하루 전체가 하나의 시간 단위가 된다.

한마디로 라오스에서 흐르는 시간은 한국의 그것에 비해서 느리다 못해 지겨울 정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의 단위로 그들의 삶에 접근하면 절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그리고 라오스의 저녁은 한마디로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이들의 삶의 방식은 해가 지면 자고 아침에 해가 뜨면 일을 하는, 그야말로 자연에 절대히 순응하는 방식이다. 물론 중심가에 식당도 있고 주류를 파는 가게가 있지만 저녁 시간이 되면 거의 문을 닫는다.

이런 이유로 아침 식사를 한 이후의 시간은 파견 팀에게는 지루함 그 자체이다. 저녁을 먹고 하루 일과에 대해서 의논하고 내일 계획에 대해서 상의를 하여도 시각이 9시를 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바로 자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낯선 타국 땅, 익숙해지기에는 너무 짧은 체류 기간, 스산한 방안의 공기로 인해 아무리 피곤해도 잠을 청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이런 적막함을 해소해 주는 유일한 길은 밝은 기분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홀로 외로운 시간이 되면 오락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고 이내 팀원들이 가져온 모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동이 났다.

남은 건 당시 한국에서 대히트를 치고 있는 ‘지붕 뚫고 하이킥’이라는 시트콤밖에 없었다. 지루한 주말에, 외로운 저녁에 이것을 보다 보니 거의 외우는 단계까지 도달했고 심지어 그중 재미있는 회는 서너 번까지 보게 되었다.

타국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실하게 느꼈다고 하면 너무 호들갑을 떤다고 타박할지 모르나 공간과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도는 라오스의 휑한 숙소에서 분 단위로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전남대의 최성우 선생님이 웃으면서 나에게 질문을 했다.

‘하이킥에서 준혁이가 영어 점수 97점을 받은 이유는?’

내용 하나하나를 전혀 틀리지 않고 조목조목 이야기하고는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한참을 웃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심전심이다.

여담이지만 하이킥에서 준혁이가 영어 점수 97점을 받은 이유를 알고 싶다면 이 시트콤 시리즈의 9편을 보기 바란다. 자세하게 나와 있다.

● 부드러운 기억이 자욱하게 남는 곳, 라오스

설문지 수거가 끝나고 남은 일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6,000페이지에 달하는 2,000장의 설문지를 무사히 수도 비엔티안으로 옮겨 Coding을 위해 Research Company에 넘기면 이번 파견의 임무는 끝나는 것이었다.

원래의 계획은 설문지는 드라이버인 현지인 쪼이에게 넘기고 최성우 선생님과 나는 비행기를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이었다. 예상보다 하루 일찍 설문지 전체가 수거되었고 한 달 넘게 동고동락한 쪼이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오기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예산 절감의 효과도 있었다.)

차량을 이용해서 육로로 같이 오기로 결정하였다. 오전 10시에 출발하였지만 S자의 연속인 라오스의 산악 국도를 하루만에 주파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한 일정이었다. 그래서 결국 중간에 방비엥이라는 도시에 들러서 자고 다음 날 가기로 하였다.

이곳은 송강(Song River)이 흐르는 아름다운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나에게는 결코 좋은 추억을 주지 않았다. 2007년 여행할 때는 아름다움에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이 날만큼은 결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내일 일정을 위해서 휴식을 취하려고 했는데 심상치 않던 몸이 결국 사달을 내고 말았다. 침대에 누웠는데 끓어오르는 열로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몸을 타고 비적비적 흐르는 땀은 수건으로 닦지 않고는 버티기 힘든 수준이었다.

마침내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고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말라리아 아닌가? 황열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니 긴장감에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기까지 했다.

거기에다 그때 한참 한국에서 신종 플루가 유행했던 탓에 ‘이제 와서 발병하는 건 아닌지?’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다행히 몸은 전날보다 훨씬 좋아졌고 열은 어느새 떨어져 있었다.

그 이후로 별일 없이 귀국했고 지금까지 큰 탈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특별한 전염병은 아닌 듯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동안 쌓였던 피로와, 일이 마무리된 후 긴장감의 일시적 해소로 몸살이 온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라오스의 일정은 그리 만만하거나 쉽지만은 않았다. 프로젝트 수행 내내 전체 설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설문의 결과가 엉망으로 나오면 어떻게 하나, 종종거렸던 것을 생각하면 단순한 여행에 비하면 상당히 지난(至難)한 일이었다.

비엔티안에 도착하여 WHO office에서 안동일 선생님과 박건희 선생님을 만나고 나와서는 다시 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돌아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상당히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 준 경험이었고 가슴 한편으로는 자그마한 뿌듯함을 준 일이었다. 귀국하고 2주 정도가 지나니 그때의 그 장소가 그리워지고 라오스의 장면이 고스란히 상기되었다.

몸을 담고 있을 때 그곳은 자욱한 곳이었지만 지금 나의 맘속에는 부드럽게 남아있다. 자욱하지만 부드러운 기억을 선물해 준 라오스를 당분간은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 Epilogue

참가한 라오스의 조사는 예비 조사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제 라오스의 모자 보건 사업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직접 참여할 수 있을지는 미정이지만 비록 직접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그 사업이 잘 진행되어 좋은 성과를 이루어 내기를 진심으로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다.

비록 두 번밖에 가 본 적이 없는 나라지만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이전 모습을 발견하고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푸비엥(Phuvieng)이라는 마을에서 Village Header분이 식사 초대를 하셨는데 식사 중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였다.

‘우리도 노력은 하고 있지만 정말 필요한 것이 있다. 학교와 의료 시설이 부족하다. 이걸 당신네들이 도와준다면 진심으로 감사하겠다.’

그분의 말씀처럼 이번 모자 보건 사업이 성공하여 건강한 산모가 건강한 아기를 안고 웃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다면 후일 내가 다시 이곳을 방문할 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김화준(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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