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사회, 그리고 한 아버지의 죽음
상태바
탐욕의 사회, 그리고 한 아버지의 죽음
  • 김기현
  • 승인 2010.10.13 10: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논설]김기현 논설위원

 

며칠 전 열두살의 장애아를 둔 한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아버지가 남긴 유서에는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는 게 있다. 내가 죽으면 동사무소 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아들이 국민기초생활수급 등의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제 그의 아들은 장애인이자 고아가 되어버린 셈이니, 한국사회에서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힘들게) 장애인 고아로 살아갈 그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안타까움과 슬픔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하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언제나 그랬듯이 방송과 언론에서는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에 대한 안전망을 점검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말을 호들갑 떨며 반복하고 있다. 자살은 결코 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무엇이 그 아버지를 그런 죽음으로 내몰고, 그 아이의 미래에 잿빛을 뿌려놓았는가 하는 물음에, 이런 식상한 답변은 이제 우리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끔찍한 일이라도 일상이 되어버리면 무덤덤해진다. 이런 일이 이제 우리에겐 너무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일 게다.

초중고생 자살율 세계 1위, 75세 이상 노인 자살율 세계 1위, 20,30대 자살율 세계 1위, 암환자 자살율 세계 1위, 그래서 토탈(?) 자살율 세계 1위인 나라.

이 끔찍한 현실을 마주하고서도 모르는 건지, 외면하는 건지, 우리들의 무덤덤함 또한 세계 최고를 향해 달리고 있는 듯하다.

자살율 1위라는 현실보다 더 슬픈 것이 이러한 우리들의 무관심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개인의 탐욕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의 가운데를 꿰차고, 이웃의 고통이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하는 모습은 한켠으로 밀려나 버렸다. 이런 죽음이 우리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그 순간부터 (권력과 자본을 가진)위정자들 역시 이런 죽음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 이는 우리 사회 전체가 이러한 죽음에 대해 어떠한 책임을 느끼지 않는 결과로 이어지며, 결국 부메랑이 되어 언젠가는 우리에게 그대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유행어가 요즘처럼 실감나는 때도 없는 듯하니 말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개인의 탐욕이 이토록 사회 곳곳에 뿌리내려 동력의 한 축이 되어 버린 지가.....

사실 언제부터였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 고착화 되어가는 이 탐욕의 기재를 무너뜨릴 방법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이것을 개인적 차원에서 무너뜨리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때문에 거대 담론 속에서 실천하고 활동해 나가는 단체가 그 역할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주위에서 이런 용기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어릴 적 처음으로 주사 맞으러 병원 갔을 때 가졌던 용기 정도를 다시 한 번 발휘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라고 말한다. 막상 해보면 쉽고 편한데, 마음먹고 처음 행동에 옮기기까지가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더 늦기 전에 이런 용기를 쥐어짜서라도 내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주위의 수많은 죽음과 고통에 대해 고개 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는 것. 열두 살 장애아동 아버지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

이마저도 할 수 없다면 언젠가 부메랑이 우리를 정말로 끝장낼 것 같으니, 제발. 제발.

김기현(본지 논설위원,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광전지부 공동대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