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35]공적 행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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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35]공적 행복을 찾아서
  • 전민용
  • 승인 2011.05.11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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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철학-공적 행복을 찾아서, 김선욱, 길

 

얼마 전 김연아가 세계피겨대회에서 2등을 하고 시상대에서 1등을 한 안도 미키 옆에 나란히 섰다. 김연아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이 울음은 어떤 의미일까? 각종 세계대회에서 1등을 하고 올림픽 금메달까지 딴 김연아가 2등을 했기 때문에 우는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울게 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김연아만 알고 있겠지만 (심리학적으로 보면 김연아 자신도 잘 모를 수 있겠지만) 김연아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성취로 보자면 그동안 거의 피겨계 최고의 성취를 이룬 김연아는 행복할까? 이번엔 2등을 해서 행복하지 않다면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나서는 최고로 행복했을까? 그 행복은 얼마동안이나 유지 되었을까?    

‘공적 행복을 찾아서’라는 부제가 붙은 ‘행복의 철학’의 저자 김선욱교수는 우리에게 다양한 차원의 행복을 제시한다.

개인적인 프라이버시의 행복이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혼자 머릿속에서, 골방에서, 혹은 극장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사적 혹은 사회적 차원의 행복이 있다.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창조적인 작업을 하고, 자아실현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며 누리는 행복이다.

공적 행복이 있다. 사적인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모두와 관련한 공적 일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가운데 느끼는 기쁨이다.

프라이버시 행복이나 사적-사회적 행복의 경우 그 근원은 결국 개인에게 귀결되지만, 공적 행복은 다른 사람의 관계 속에 그 근원이 있다. 공공성이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감이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일에 시간과 정성과 지혜를 쏟을 때 공적 행복을 느낄 수 있는데 이를 정치적 행복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 정치는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넓은 의미의 정치를 말한다.

일상적 의미로 보면 행복은 주로 행복한 느낌을 말하고 행복감이란 마음에 달린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도 있다. 이와 관련한 세 가지 해석을 살펴보자.

우선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다는 해석이 있다. 노예로 살아도 내 마음만 평안하다면 자유인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이솝우화의 ‘여우와 신포도’의 여우처럼 때로 자기 기만이 될 수 있다. 내가 마음 먹는 것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생각은 고통당하는 이웃을 외면하는 장치로 작동할 수도 있다.

두 번째 해석은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과 달라지지 않는 부분을 잘 가려서 살펴보는 것이다. 세상에는 샘물도 있고 시궁창물도 있다. 내 마음과 상관없이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을 마음이 잘 받아 알아차리는 것, 즉 마음으로 조작되는 것과 마음이 스스로를 비워 맑게 비추어 알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해석은 적극적인 삶을 권유하는 해석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세상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나와 우리가 어떻게 마음 먹느냐에 따라 세상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세가지 해석을 종합해보면 통상 말하는 ‘행복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내 마음과 무관하게 돌아가는 세상과 마음의 관계를 더 다양하고 정교하게 해석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도 중요하고 내 마음을 넘어서 있는 다른 마음의 생각과 내 마음과 별개로 있는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도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생명체이고 매순간 지속되는 생명과 더불어 ‘과정’으로 존재한다. 항상 달라지고 있는 과정이 나라면 나의 행복은 과정으로서의 행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행복을 정지된 상태로 이해할 때 행복은 덧없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성취의 멜랑콜리 현상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다. 성취의 멜랑콜리는 오랜 시간 추구해 온 목적을 성취했을 때 기쁨과 더불어 이상하게도 어떤 우울한 감정이 함께 생겨나는 현상을 말한다. 성취의 순간과 더불어 행복의 순간도 함께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지나가면 바라던 목표는 없어지고 행복의 공백이 찾아온다. 허무감이란 비어있을 때의 감정이다. 계속 반복되므로 또 다른 목표를 지속적으로 설정한다고 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행복을 삶 전체의 일, 하나의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행복은 상태로서의 행복이 아니라 일로서의 행복이다. 행복은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가는 과정이고, 나의 삶 전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행복에 객관적인 차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을까? 우선 먹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삶은 비참해진다. 인간이 생명 유지를 위해 하는 활동을 노동이라 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했다. 노동은 생명 유지에 직결되는 활동을 말한다. 이렇게 생산된 물품은 즉각 소비되는 특징이 있다. 지속적인 생명 유지를 위해서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의 고통은 위험성이나 강도보다 잔인한 반복에서 나온다.

모세가 인도한 히브리 백성들이 굶주릴 때 신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었다. 그들은 만나를 ‘꿀 섞은 과자’ 맛이라며 환호했다. 하지만 같은 음식을 계속 먹게 되자 히브리인들은 불평을 시작했다. 동일한 것이 반복되면 고통이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고대사회에서 노동은 노예의 몫이었다. 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생의 필연성에 종속된다는 의미이며, 이 필연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삶의 노예로 전락한다. 고대 자유인들의 자유는 노예가 있음으로써 가능했다.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런 노동의 잔인한 반복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고대사회에서는 노예의 삶이 고통과 저주라는 것을 모두 알 수 있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모두의 일이 되면서 노동의 노예적 요소가 은폐되어 있다.

행복은 근대의 이런 조건을 정확히 인식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오늘날 경제활동은 생명 유지를 위한 노동의 연장선상에 있고 이런 경제에만 몰두하는 삶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보다 노예로 만든다. 돈을 많이 벌고 그 돈을 쓰면서 얻는 자유는 개별화된 사적 공간 속에 스스로 고립됨으로써 얻는 자유일 뿐이다. 이런 자유는 공적인 성격은 배제된 채 사적인 성격만 갖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사회에 내재된 경제의 노예적 구조에 대한 자각없이 행복만을 추구하면 우리는 노예적 행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원래 작업은 책상이나 집처럼 생활을 위해 ‘사용’되는 물품을 생산하는 활동이다. 창조적인 활동인 작업은 인간에게 또 다른 기쁨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 대부분의 사람이 임노동자가 되어 작업이 생계 수단이 되면서 사실상 작업이 노동화 되었다. 또한 창작과 예술의 차원은 더욱더 전문화되어 고비용을 요구한다. 일부에게는 창작과 예술이 가난과 등치되는 고단한 과정이 되었고 일부에게는 횡재의 수단이 되었다.

이와 함께 ‘사용’ 개념과 ‘소비’ 개념도 차이가 모호해졌다. 모든 물품이 소비의 대상이 되고 사용 기간이 짧아지는 소비사회가 된 것이다. 또한 근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빈곤사회를 풍요사회로 전환시켰지만 풍요사회는 위험사회임이 드러났다.

먹는 문제는 생존에 필수적이고 행복의 기본 전제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노동의 기회를 주는 것은 당연한 정부의 의무이다. 하지만 노동은 신성하다는 말은 옳지만 노동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이다. 심지어 강요된 노동은 인간성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 노동에만 머물러 있고,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공적 구조에 무지할 때 시민은 노동을 매개로 노예로 전락한다. 오늘날 인간 활동의 다양성이 경제라는 획일적 관점으로 단순화 되면서 우리는 노예가 되고, 행복을 잃어버리고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중에 하나는 고유명사인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며 다름의 요소인 개성을 나타내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개인의 고유한 모습은 말과 행위로 나타나고, 말은 행위의 한 유형이며 행위는 말로 그 고유성을 드러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말은 인간은 폴리스라는 정치적 공동체를 통해서만 비로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공적 공간 속에서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자아의 내면을 형성하고, 실존감을 가지고, 인간다운 삶을 추구할 수 있다.  

처음에 언급한대로 행복은 다차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오늘날 개인주의와 경제지상주의 때문에 가장 소홀히 취급되는 것이 공적 행복의 차원이다.

공적 행복은 공적 영역에서 정치적 행위를 통해 얻게 되는 행복이다. 공적 행복의 경험은 시민적 자유가 가능했던 근대 이후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 의식과 더불어 생긴 경험이다. 인간들이 만든 공적 세계에서 공공의 업무에 참여하는 공적 자유의 향유를 통해 공적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공적 행복에 대한 구체적 증언들은 미국 독립혁명기의 여러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인들은 영국의 지배 하에서 허용된 권리와 자유를 넘어 독립된 자유를 추구했고, 주민들이 마을집회에 참여하여 공공의 일에 대해 토론하고 입장을 결정하면서 참여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며 공적 행복을 경험했다. 공적 행복은 사적인 일에 몰두할 때는 발생하지 않는다. 공적 행위 참여자들은 인간이 사적 행복에만 몰두할 때는 전적으로 행복한 삶이 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정치적 참여에서 나타난 공적 행복의 기록들을 보자. 2002년 두 여중생이 미군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사건으로 촉발된 촛불집회에서 처음에 ‘분노’의 감정이 지배적이었던 집회가 점점 커지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데서 비롯된 즐거운 분위기가 현장을 지배했다. 이런 분위기는 이후 노무현대통령 탄핵 반대집회에서도 나타났다.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1898년 서울 종로의 만민공동회가 있다. 만민공동회는 크게 세 차례 열렸는데 특히 마지막 집회는 11월 5-23일 까지 19일간 계속되었다. 당시 17만 명 정도였던 서울 인구 중 보통 1-2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음식을 나누고 돈을 내놓는 등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한다.

5월에 시작하여 10월 말까지 이어진 2008년 촛불집회는 먹을거리인 광우병 문제로 시작했지만 시민들은 이것을 국가의 의무와 책임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문제제기를 했다. 강제 연행을 하면 닭장 투어를 하겠다고 서로 잡아가라고 나서고, 물대포를 쏘면 ‘온수’를 외치고, 예비군 부대, 유모차 부대 등이 등장하며 거리 곳곳에서 토론과 축제의 마당을 열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항쟁에서 시민들이 경험한 절대 공동체의 경험도 공적 행복의 경험으로 볼 수 있다. 최정운 교수는 ‘5월의 사회과학’을 통해 지도층이 없었어도 단합된 하나의 집단으로 활동했던 광주의 시민들이 음식과 생필품을 나누고 공동체적 질서를 지키고 감정적 공감대를 나누고 인간의 이성과 결의로 죽음의 공포 마저 극복하는 “하나의 절대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아렌트는 공적 행복의 근원은 “차이에 대한 열정”이라고 했다. 이것은 주위 사람들의 눈에 띄고, 발언이 경청되고, 인구에 회자되고, 인정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동의 세계를 사랑하게 되고 공공 업무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이 욕망이 내가 차별화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고 지배를 이룩하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런 종류의 욕망은 모든 정치적 삶을 파괴하는 잘못된 야망일 뿐이다.     

공적 행복은 특정한 실질적 목적 추구보다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린다는 사실에 더 의존하고 있다. 공적 행복을 느끼는 개인은 항상 관계 속의 개인이고 상황 속의 개인이다. 그러므로 공적 행복의 근원은 정치적으로 함께함이고, 서로 차이를 추구하는 가운데 공적 영역을 지속해 나가는 모습이다.

최근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기반해서 사적 행복의 추구에 몰두하는 삶이 결코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고, 새로운 삶과 행복을 찾아 공공성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공적인 행복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프라이버시 행복과 사적 행복을 넘어 공적 행복을 균형 있게 추구할 때 나와 너의 행복과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행복을 통해 궁극적으로 나의 행복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체계적인 내용 전개가 다소 미흡하고 공적 행복에 대한 구체적 사례들도 단편적인 면이 있고 때로 종교적 편향도 보이고 다양한 층위의 공적 참여에 대한 분석이나 연관되는 심리학적 접근에 아쉬움이 있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고마운 책이다.  
 
행복의 철학-공적 행복을 찾아서, 김선욱,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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