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38]우리는 왜 선한 삶을 살려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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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38]우리는 왜 선한 삶을 살려하는가
  • 전민용
  • 승인 2011.06.1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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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카페] 호모 에티쿠스 : 윤리적 인간의 탄생. 김상봉 저. 한길사

“무엇이 선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일까?” 윤리학의 근본 물음이다.

김상봉 교수는 서양 윤리학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을 따라가며 이 근본적인 질문을 반복한다. 어느 철학자도 시대와 상황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그 한계 속에 치열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각자의 윤리학을 완성해낸다. 그 치열함이 시대와 상황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김 교수가 꼽은 서양윤리학의 계보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아우구스티누스, 스피노자, 흄, 칸트이다. 소크라테스부터 여행을 시작해보자. 

“인간이 올바로 살려면 자기욕망에 충실해서 용기와 지혜로 욕망을 최대한 충족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무능한 사람은 이런 능력이 있는 사람을 비난하지만 열등감의 표현일 뿐이다.” 고르기아스에 등장하는 소피스트 칼리클레스의 말이다. 이렇듯 소피스트의 미덕은 그들이 던진 질문의 정직함에 있다.

▲ 호모 에티쿠스 : 윤리적 인간의 탄생. 김상봉 저. 한길사
보통의 사람들은 잘사는 것을 쾌락, 재산, 권력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피스트들과 논쟁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정립한 소크라테스의 공적은 이런 통념에 의문을 제기한 데 있다. “무엇이 삶에서 진정으로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윤리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통해 자기 인식이 가장 중요한 지혜임을 강조했다. 소크라테스는 선을 향한 노력은 먼저 선이 무엇인지 바르게 인식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했다. 악덕과 방종은 무지의 소산이고 윤리적 덕의 본질은 곧 앎이라는 것이다. 그는 육체보다는 정신과 영혼이 인간의 본체라고 생각했다. 재산, 명예, 권력을 얻었더라도 마음이 좋은 상태가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쾌락은 결핍으로부터 충족으로 이행할 때 생기는 데 아예 처음부터 결핍이 없는 것만 못한 것이다. 그는 결핍과 충족의 굴레 자체를 초월하는 것이 영혼의 온전함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플라톤은 각각의 존재가 맡은 일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아레테를 강조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인 행복이 목적이지만 이를 위해 영혼의 건강과 탁월함이 중요하고 건전한 도덕적 판단력을 기를 것을 강조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고전기 그리스 도시국가의 자유로운 시민들의 윤리학이다.

스토아학파와 에피크로스학파는 로마라는 세계로 확장된 거대 국가 속에 공동체에 대한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왜소한 개인들의 윤리학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토아학파는 전체가 온전할 때 개인의 삶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체의 힘 앞에 무기력한 개인의 정신적 상황을 반영하는 철학인 것이다. 그들은 어떤 외부적인 상황과 조건에서도 의연한 정신을 행복의 원천으로 보았다.

에피크로스학파는 허무와 삶의 덧없음에 대한 깨달음의 철학이고 은둔자를 위한 철학이다. 흔히 그들을 쾌락주의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쾌락에 대한 이성적 정의를 통한 절제의 윤리학이고, 그들은 고통도 불안도 없는 절대적 평온함인 아타락시아를 추구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양문화의 전체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처음으로 종합한 사람이다. 수사학교수로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는 두 번의 특별한 개인적 경험을 통해 신앙의 길로 들어선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천진한 거지와 옆 집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펼쳐본 성경의 한 구절이다. 아우구스투스 이전의 그리스-로마 철학의 윤리학은 방법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이성을 통해 인간의 힘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윤리학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모든 도덕과 행복은 오직 참된 신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완성된다고 믿었다.

스피노자는 갈릴레이와 뉴턴으로 대표되는 과학혁명 시대의 철학자이다. 이전에는 자연과 사물의 내적 본성을 아는 것을 진리라고 보았으나 근대과학은 자연현상을 외적 관계 속에 이해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자연은 곧 신이고, 그 자체로 무한하고 완전하며 유일한 실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는 인간도 자연처럼 자기보존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존재의 원리이자 도덕의 원리라고 보았다. 그는 불확실한 정념의 진짜 원인을 이성으로 인식하고 이성을 통해 자신을 온전히 보존하고 참된 자유를 얻는 유덕한 삶을 추구했다. 

동정심의 윤리학자 흄은 계몽주의시대인 18세기 영국의 철학자이다. 흄 이전까지의 윤리학이 객관적인 본성에 근거한 이성의 윤리학이라면 흄은 나의 직접적인 느낌에서 오는 주관적인 감각을 중요시 했다. 이성적인 지식이 보편적인 인식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사람 사이의 공감을 확장해 주지는 못한다. 지식이 많다고 이타적인 것도 아니다. 도덕성은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며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동정심이 도덕성의 참된 근거라는 것이다.

칸트를 서양 윤리학의 최고봉이라고 김 교수는 평한다. 칸트 이전까지 모든 선은 좋음이나 행복과 섞여 있었는데, 칸트는 도덕적 현상 그 자체로서의 순수한 의미의 윤리학을 정초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강요도 없는데 마음속에 발생하는 도덕적 당위와 강제의 의식에 대한 물음이다. 행복을 얻거나 벌을 피하기 위한 선은 계산적인 행위일 뿐이다. 동정심 역시 그 자체로는 선하게도 악하게도 작용할 수 있고, 이성과 정의의 원리 아래 종속될 때만 선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칸트는 본성의 유혹을 뿌리치고 내면에서 올라오는 양심의 요구와 명령에 따르려는 의지와 결단을 강조한다. 나아가 우리의 의지를 규정하는 준칙이 선하면 우리의 행위와 의지도 선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

칸트는 도덕의 첫째 원리인 준칙에 대해 말한다. “나의 준칙이 하나의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내가 바랄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내가 하는 행위의 선악을 판단할 때, 같은 상황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행위하기를 나 자신이 기꺼이 바랄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라는 것이다. 도덕의 두 번째 근본원리는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긴 여정을 끝내고 저자는 서양 윤리의 핵심을 세 가지로 압축한다. 하나는 자기에 대한 참된 긍지를 갖는 것, 두 번째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정심, 세 번째는 우리 모두인 보편에 대한 관심이다.

어려울 수도 있는 내용을 대화를 나누듯 잘 풀어냈다. 등장하는 모든 철학자들에 대한 애정 어린 해석이 느껴진다. 시대적, 상황적 한계 속에 비판적으로 볼 여지들이 많이 있지만 비판적 해석보다는 현재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치를 부각시켜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해준다. 서양 윤리학을 뒤집은 니체에 대한 해설이 없는 것은 아쉬웠다. 윤리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인식이나 윤리 양면에서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인간끼리의 사회적 관계 맺기가 윤리라면 바람직한 윤리를 위해서는 개인의 성찰도 필요하지만 타인과의 소통과 사회적 제도나 시스템 역시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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