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43]百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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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43]百의 그림자
  • 전민용
  • 승인 2011.09.0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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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의 그림자, 황정은 장편소설, 민음사

 

재건축 대상으로 차례로 헐리고 있는 도심 전자상가. 서로 연결된 가, 나, 다, 라, 마 다섯 동 중 나동에 있는 여 씨 아저씨 수리점에서 은교는 접수와 심부름을 한다. 무재는 트랜스를 만드는 공방의 견습공이다. 가난한 집에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대학을 중퇴한 무재. 세상 모든 일에 무관심한 홀아버지 밑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만 은교. 이들은 이 건물에서 만나 조금씩 사랑을 키워간다.

이 소설은 낡은 전자상가라는 공간과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은교와 무재에 대한 이야기다.

무엇보다 새롭고 독특한 글쓰기 방식이 예사롭지 않다.

“은교 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는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계란 먹을래요? 네.”(39쪽)

이런 식의 아무런 의미 없는 잡담 같은 대화가 수시로 오고가는데 그 안에 뭔가 찡하는 것이 숨어 있다. 의미 과잉의 복잡 현란한 세상을 비웃는 듯 담백한 흑백의 수묵화를 그리는 것 같다.

무재와 은교의 가족 이야기 뿐 아니라 여 씨 아저씨 친구나 유곤의 가족 이야기 등 난폭한 세상 속에서 일어난 매우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약간의 거리를 두며 펼쳐진다. 이런 절제된 서사와 문장들이 오히려 공감을 더해주는 느낌이다.

이 소설에서 오무사 노인의 이야기는 특별히 공들인 느낌이 든다. 오무사는 아는 사람만이  찾아갈 수 있게 외진 곳에 있는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조그만 전구를 파는 가게이다. 전구를 파는 노인은 언제나 전혀 서두르는 법 없이 느릿느릿 하다. 품절되어 찾기 어려운 전구도  대부분 가지고 있고, 수많은 상자들 속에서 손님이 원하는 전구를 정확하게 찾아내고, 꼭 덤으로 전구 하나씩을 더 넣는다. 가다가 깨질 수도 있고 불량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 것 때문에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넣어 주는 것이다. 배려심이 느껴지는 귀한 덤이다. 노인이 죽거나 오무사가 사라지면 이 전구들은 어떻게 될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104쪽)

다섯 개의 건물 중 오무사가 있는 가동이 먼저 철거 된다. 이 과정에서 정말로 오무사도 사라져 버린다. 그 자리에는 테니스 코트처럼 예쁘장한 모습의 공원이 들어선다. 무재와 은교는 샌드위치와 마실 것을 들고 적막한 공원 가장자리의 의자에 앉는다. 다음으로 나동이 철거되면 옮겨갈 곳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조용하네요. 네. 예쁘네요. 예쁘지만,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라며 무재 씨는 물끄러미 공원을 바라보고 있었다.”(117쪽) 

무재와 은교의 사랑 이야기. 같이 걷고, 같이 먹고, 긴 전화를 하고, 배드민턴을 치고, 자취방에서 국수를 먹고, 고물 자동차를 타고 ‘맑고 개운한 국물’을 먹으러 간다. 그 흔한 키스 장면 하나 없다.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데이트를 하고,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무심한 대화를 나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무덤덤한 사랑이야기다. 그런데도 진흙탕 속에서 피는 아름다운 연꽃을 본 것 같고, ‘맑고 개운한 국물’을 마신 것처럼 나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는 것은 왜일까?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서 사람들이 너무 착하게만 보이는 것은 조금 불편했다. 눈칫밥이라는 말이 괜히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조금 지루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흡입력이 떨어지는 면이 있다. 소설에서 계속 반복되는 그림자가 일어서는 이야기는 읽고 난 후 각자 그 의미를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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